분강(汾江)의 달, 농암(聾巖)

농암 이선생께 올림(上聾巖李先生)

by 이탁

농암(聾巖) 이선생(李先生)께 올림 ❙ 上聾巖李先生


높은 대(臺)에서 새 노래로 깊은 가을을 감상하고(高臺新曲賞深秋)

국화꽃 꺾어 쥐고 흰 갈매기 마주하셨네(手折黃花對白鷗).

덕(德)을 우러러 온 지금, 밤 꿈 맑은데(仰德至今淸夜夢)

신선 세상에 밝은 달 다시 떠 오네(月明時復到中洲).

이황 '상농암이선생(上聾巖李先生)'





어릴 적, 선친이 흔히 노래처럼 흥얼거리신 한시입니다. 고대(高臺)로 시작하는 첫 구절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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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퇴계(退溪 李滉 1501-1570)가 농암(聾巖 李賢輔 1467-1555)께 올린 것입니다. 제목이 그렇습니다. 퇴계집 권 1(退溪集 卷一)에 있고, 1547년 가을에 지었습니다.


선친이 그랬듯, 많은 이가 이 시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쉬운 시가 아니었습니다. 얼핏 낭만 감상시같은데, 들어가면, 갈수록 무슨 말씀인지 좀체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제게는 약간 과제 같았는데, 얼마 전, 농암집에서 농암의 분강 유상(汾江 遊嘗)을 보다, 문득 이 시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 생각을 따라 시를 정리해 보았는데, 시의 배경이 제 유년 놀이터여서 시어의 의미를 좀 더 체감할 수 있다는 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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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서, 농암(聾巖)이란 단어가, 사람이기도 하고, 농암이 자호(自號)한 바위기도 해서 혼동될 것 같아, 사람은 한글 ‘농암’으로, 바위는 ‘농암(聾巖)’으로 한자와 같이 쓰겠습니다.




1. 분강(汾江)의 가을 ❙ 시의 시간, 공간


시의 시간은 가을입니다. 심추(深秋)와 황화(黃花)로 봐서 음력 9월 무렵입니다. 공간은 분강(汾江) 일대입니다. 농암과 관련하여, 백구(白鷗), 고대(高臺), 신곡(新曲) 등이 같이 등장할 곳은 분강밖에 없습니다.


분강 일대는, 은퇴 후 농암이 주로 거주한 곳입니다. 농암(聾巖) 기슭 강변의 강각(江閣)과 강 건너 임강사(臨江寺)에 주로 머물렀습니다.


다음 [자료 1]이 분강 하류 지점에 있는 '분천(汾川)' 바위인데, 사람 없는 수몰 후 모습이 쓸쓸합니다. 분천(汾川)이 곧 분강(汾江)입니다.


[자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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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이 분강에 머무르자, 많은 이들이 내방(來訪)하였습니다. 농암은, 그들과 더불어, 음악과 함께 분강 유상(汾江 遊嘗)을 하며 만년(晩年)을 보냈는데, 이웃 퇴계는, 약속 없이도 방문하고, 발소리만으로 농암이 퇴계임을 아는, 가장 가까운 내방객(來訪客)이었습니다.




2. 농암(聾巖)에서 점석(簟石)으로 ❙ 퇴계의 시적 시선 이동


시의 무대는 분강, 계절은 음력 9월, 이제 시 본문을 따라가며 시어(詩語)와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시의 내용은 이 시기 다른 퇴계의 글과 시 연장선에 있고, 같은 단어로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 기록을 참고하고, 또 하나, 화자 퇴계의 시선 이동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는 농암의 분강 동선(動線)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후술합니다.




❙❙고대(高臺) ❙❙ 먼저 기(起)의 고대(高臺)를 보겠습니다. 분강 일대에서 대(臺)의 기록을 확인한 곳은 농암(聾巖)과 점석(簟石), 두 곳입니다. 두 곳을 차례로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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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농암(聾巖)입니다. 농암(聾巖)을 대(臺)라 한 기록은 농암연보(聾巖年譜) 중종 39년에 ‘퇴계와 농암대 위에서 놀았다(與退溪遊聾巖臺上)’라 한 기록이 있고, 후대에 새긴 농암각자(聾巖刻字)도 농암선생정대구장(聾巖先生亭臺舊庄)입니다.


기록이 아니어도 농암(聾巖) 위는 대(臺)이고 고대(高臺)입니다. 대(臺)는 주변보다 높고 평평한 곳인데, 고대(高臺)는 그 높음이 더 강조된 단어입니다. 다음 농암(聾巖) 일대를 한번 보십시오.


[자료 2]


[자료 1]- 농암바위.png


1960년 무렵 사진인데, 1이 농암(聾巖)입니다. 2가 욕기정(浴沂亭), 3이 애일당(愛日堂)입니다. 이 농암(聾巖) 일대 이야기는, 필자의 졸고 ‘농암바위를 찾아서’를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농암(聾巖) 위는 그야말로 고대(高臺)입니다. 사진에는 욕기정이 있지만, 욕기정은 1932년 건립되고, 그 이전 저 위는, 농암 이래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둘러앉아 술잔과 담소를 나눈 장소입니다. 이십여 명이 둘러앉을 정도로 넓고 평평하여, 분강 일대에서 고대(高臺)가 가장 어울리는 장소입니다.


더구나 저기는 농암이 소요(逍遙)하고, 퇴계를 포함한, 수많은 내방객(來訪客)이 방문한 곳입니다. 퇴계의 시적 공간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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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석(簟石)을 보겠습니다. 점석을 대(臺)라 한 기록은, 농암시 ‘동산재 시에 차운해 상사 금원정에게 주다(次東山齋韻贈琴上舍元貞)’에 있습니다.



나는 농암 집에 있는데(我有聾巖舍)

그 옆에 점석대가 있다네(傍存簟石臺)



점석대(簟石臺), 당시 사람들이 점석을 대(臺)로 인식하였음이 확인되는 단어입니다. 실제 점석은, 상부가 대여섯 명이 둘러앉을 정도로 넓고 평평하여 대(臺)로 손색이 없습니다. 다음 점석 사진을 한번 보십시오.


[자료 3]


점석 사진.png


6이 점석입니다. 4가 사자석(獅子石), 5가 상암(象巖)입니다. 점석은 농암의 분강 유상(汾江 遊嘗) 동선의 최종 지점이고, 1547년 퇴계, 금계와의 유상곡수(流觴曲水) 모임을 포함, 많은 분강 모임 자리입니다. 가히 농암(聾巖), 애일당(愛日堂)과 함께, 분강 유상(汾江 遊嘗) 1번지를 다툴 자리입니다.


그런데 점석은, 사진에 보듯, 고대(高臺)라고 선뜻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높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가, 퇴계가 농암에게 올린 시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점석 주인이 농암이니, 당연히 퇴계에게 높습니다. 더구나 점석은, 후술하지만, 농암이 봉영(蓬瀛)이라 말하였고, 봉영은 퇴계도 추구한 세상입니다. 높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요컨대 점석은, 단순한 강의 바위가 아니라, 농암과 선계(仙界)의 표상입니다. 퇴계에게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대(臺)인데 높으면, 그것은 고대(高臺)입니다. 요컨대 점석은 퇴계에게 정신적 고대(高臺)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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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聾巖)과 점석(簟石), 고대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시상을 전개하는 화자 퇴계의 시선 이동을 생각해야 합니다.


퇴계 시선은 농암에게 가 있습니다. 시 대상이 농암이기 때문입니다. 시선 이동도 농암의 동선(動線)을 따라갑니다. 그러면 농암의 분강 동선(汾江 動線)이 곧, 시의 공간 이동이 됩니다.


농암의 분강 유상 동선(遊嘗 動線)은 거의 일정합니다. 강변, 즉 농암(聾巖), 애일당(愛日堂), 강각(江閣), 병암(屛巖)에서 시작해, 배를 타고 사자석(獅子石)과 상암(象巖)을 거쳐, 점석으로 갑니다. 배 띄울 수 없는 날씨가 아니면, 거의 매번 그렇습니다. 1544년, 1547년, 1549년 기록이 모두 그렇습니다.


농암(聾巖)에서 점석(簟石)으로의 동선과 그에 따른 시상 전개, 고대(高臺)는 시상 전개의 시작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대는 농암(聾巖)일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시상 전개를 떠나도, 농암(聾巖)은, 점석에 비해, 보다 명확한 고대입니다. 점석은 물리적 고대로서는 다소 부족한데, 농암(聾巖)은 물리적, 정신적 고대로 이견(異見)이 없을 것입니다. 이어 나오는 황화(黃花)도 고대를 농암(聾巖)으로 해석하게 합니다. 강 중앙에 있는 점석에서, 황화를 꺾어 손에 쥔다는 것은 어색하니까요.


고대(高臺)를 특정한 다른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필자는, 이 논지로, 고대를 농암(聾巖)으로 보겠습니다.




❙❙ 신곡(新曲) ❙❙ 고대(高臺)에 이어진 신곡(新曲)은 무엇일까요? 농암이 신곡(新曲)이라 표현한 것은 어부가(漁父歌)인데, 어부가는 이 시 2년 뒤의 작품이라, 이 신곡을 어부가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퇴계에게, 농암 신곡(新曲)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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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 신곡(聾巖 新曲), 우선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 1495-1554)의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한 대목을 보겠습니다. 신재가 1544년 청량산을 유람하고 쓴 글입니다.



‖이생이 소매에서 농암의 글을 끄집어 내었는데, 농암이 재미로 지은 노래였다. 이생을 시켜 부르게 하고 들었다. 이에, 예안의 술을 마시고, 안동의 악기로 연주하며, 이생에게 농암의 노래를 부르게 하니, 또한 산중의 기이한 한 흥취였다(李生袖出聾巖書乃公戲作歌使李生歌而聽之者於是酌宣城之酒奏福州之管使李生歌聾巖之歌亦山中之一奇興也).



이생(李生)이 가지고 와서 부른 '농암이 재미로 만든 노래(公戱作歌)', 이생은 농암의 조카 양곡당 이국량(暘谷堂 李國樑)입니다.


농암은 은퇴 후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이미 이전 1542년 은퇴 당시, 단가(短歌) 효빈가(效顰歌)와 농암가(聾巖歌)를 만들었고, 이 후에도 어부가(漁父歌)와 생일가(生日歌)를 만들었습니다. 은퇴 이후 졸하기까지 14년 정황으로 보면, 더 많은 노래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신재(愼齋)의 글에는 더 주목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농암의 노래(聾巖之歌)'라는 부분입니다. '농암의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이렇습니다.

이름을 브랜드에 앞세우는 것은, 보통 그 사람이 일가(一家)를 이루었을 때입니다. 농암은 음악으로 오로지 한 인생이 아니지만, 마치 '목월의 시', '동리의 소설' 같은 뉘앙스입니다.


우리는 신재(愼齋)를 최초의 서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설립자로 보통 배웁니다. 그러나 그는 도동곡道東曲을 비롯한 8편의 장가(長歌)와 단가(短歌) 지어 노래한 탁월한 음악가였습니다. 그 음악 식견 높은 그가, 농암의 노래 연주를 '산중의 기이한 흥취(山中之一奇興)'라 하고, '농암의 노래(聾巖之歌)'라 이름으로 명명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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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뿐 아닙니다. 농암의 어부가 병서(漁父歌 竝書)의 내용도 한 번 보겠습니다. 1549년 음력 6월 기록입니다.



‖내가 늙어 전원에 물러나, 마음이 한가하고 일이 없어, 옛사람이 술 마시며 읊은 것 중, 노래 부를 만한 시문(詩文) 몇 수를 모아, 비복에게 가르쳐, 때때로 들으며 무료함을 달랬다(余自退老田間心閒無事裒集古人觴詠間可歌詩文若干首敎閱婢僕時時聽而消遣)



농암은, 이전에 ‘읊던(詠) 시문’을 ‘노래하는(歌) 시문’으로 바꾸어 비복에게 가르쳐 들었습니다. '읊는(詠) 시문'과 '노래하는(歌) 시문'은 다릅니다. 연주로도 물론 다르고, 형식적으로도 다릅니다. 다음 퇴계의 도산십이곡 발(陶山十二曲 跋)의 한 대목을 보십시오. 1565년에 쓴 글입니다.



‖지금 시는 옛날 시와 달라, ‘읊는 것(詠)’은 가능하지만 ‘노래(歌)’는 불가능하다. 만약 이를 노래로 하고자 하면, 반드시 ‘이속(俚俗)의 말(우리말-역자주)’로 연결해야 한다(今之詩異於古之詩可詠而不可歌也如欲歌之必綴以俚俗之語).



‘요즘 시(詩)를 노래로 하려면, 반드시 우리말로 연결해야 한다(如欲歌之必綴以俚俗之語)’, 우리나라 사람이 한시를 노래하기 위해서는 한시 원문에 우리말 구성을 더해야 합니다. 요즘 용어로 하면, 서술 부분에 토를 달거나, 단어들에 토씨를 분여야 하는 것이지요. 한문, 한시를 읽을 때 토를 달거나, 시창(詩唱)처럼, 본문 중간에까지 토씨를 넣는 것을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농암도 이런 과정을 거쳐 비복들에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래야 노래가 되니까요. 요컨대 농암은 '읊는 시문'을 '노래하는 시문'으로 편곡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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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은 은퇴 후에 음악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그것이 '농암의 노래(聾巖之歌)'입니다. 노래를 만들고, 아이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기생들은 배워 춤추고 불렀습니다. 그는 노래를 만드는 창작가였고, 아이들을 가르친 음악 교사였고, 공연 예술을 사랑한 음악 애호가였습니다. 수준 높은 청취자였습니다.


농암의 노래(聾巖之歌)는, 퇴계가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곡, 즉 신곡新曲입니다. 그는 농암과의 오랜 동반에서 흔히 이런 농암의 노래를 들었고, 이는 그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또한 좋은 음악을 찾는 음악 애호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훗날,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지어, 부를 만한 노래, 들을 만한 노래라고 자족적인 글을 더하여 세상에 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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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을 포함한 농암 음악이 얼마나 퇴계에게 감동을 주었는지, 그 2년 후의 어부가(漁父歌) 감상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어부가가 창작된 1549년 가을에 쓴 ‘형님과 선생을 모시고 병암에서 놀다가 늦을 무렵 분천에 배를 띄웠다(同家兄陪侍先生遊屛巖至晩泛舟汾川)’의 한 부분을 보십시오.



우리들 또한 무슨 요행으로(吾儕亦何幸)

덕에 취해 덩실 춤출 수 있었나(醉德舞僛僛)



앞부분에 기생들이 춤추며 어부가를 부르는 모습이 나오는데, 어부가가 공연되는 분강 세상을 ‘인간 세상이 아니(非人間)’라 하고, 그것을 보는 자기 형제를, 인생의 ‘무슨 요행(何幸)’, ‘덕에 취해 덩실덩실 춤추다(醉德舞僛僛)’라 표현합니다.


농암의 분강 세계 오랜 동반자로, 농암 신곡(聾巖 新曲) 정점에 있는 어부가 공연을 보며 느끼는 퇴계의 감동과 마음이 그대로 다가옵니다.


다음이 농암종택이 소장한 농암어부가(聾巖 漁父歌)입니다. 무대가 분강이기 때문에, 곧 분강어부가(汾江 漁父歌)입니다.


[자료 4]

어부가 사진.png





❙❙ 황화(黃花)와 백구(白鷗) ❙❙ 황화(黃花)와 백구(白鷗)는 의미가 비교적 명확한 시어입니다.


‘국화 꺾어 손에 쥔다’는 것은, 도연명(陶淵明)의 음주(飮酒)라는 시에, ‘동쪽 울 밑에서 국화 꺾어 들고(採菊東籬下)/ 멀리 남산을 바라본다(悠然見南山)’로 나오고, 이후 이 동리채국(東籬採菊)은 세상 잊은 은자의 초연한 모습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림으로도 그려져, 다음은 겸재 정선(謙齋 鄭敾)의 부채 그림 동리채국도(東籬採菊圖)입니다.


[자료 5]


동리채국도(겸재).png


본문의 수절황화(手折黃花)라는 구절도 이미 이전에 있던 표현입니다. 1376년 언양에 유배된 포은(圃隱)이 반구대를 찾아 읊은 ‘언양구일유회차유종원운(彦陽九日有懷次柳宗元韻)’에, ‘국화 꺾어 손에 쥐고 그저 한 번 취한다(手折黃花聊一醉)’에도 나옵니다. 유배를 온 처지에서, 잠시 자연에 몰입하는 장면입니다.


요컨대 ‘국화 꺾어 손에 쥔다(手折黃花)’라는 것은, 자연과 함께하는 유자의 모습을 묘사하는, 거의 정형화된 표현입니다. 이 황화(黃花)는 인간에 대비된 자연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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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백구(對白鷗)도 다르지 않습니다. 퇴계의 서어부가후(書漁父歌後)로 보겠습니다. 거기에 같은 단어가 나옵니다.



‖갈매기와 함께하며 세상을 잊었고, 물고기를 보며 즐거움을 알았으니, 강호의 진락(眞樂)을 얻었다고 말할 것이다(狎鷗而忘機觀魚而知樂則其於江湖之樂可謂得其眞矣).



내용상, 이 글 압구(狎鷗)가 곧 시의 대백구(對白鷗)입니다. 압구이망기(狎鷗而忘機)인데, 그러면 시의 의미도 대백구이망기(對白鷗而忘機) 정도일 것입니다. 갈매기와 함께하며 세상을 잊었다는 것입니다.


갈매기와 함께하며 세상을 잊는다는 것은 은일(隱逸)한 유자를 표현하는 옛글에 흔히 나옵니다. 구로망기(鷗鷺忘機)라는 말도 있습니다.


다음 정선(鄭敾)이 그린 압구정(狎鷗亭)을 보시면 그 의미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농암과 퇴계의 글에 한명회 정자가 좀 그렇지만, 겸재의 그림으로만 보시기 바랍니다.


[자료 6]


압구정도(정선).png


요컨대 수절황화(手折黃花)와 대백구(對白鷗)는, 자연과 물아일체(物我一體)로, 속세를 벗어난 노경(老境)의 농암을 표현한 것입니다. 갈매기 역시 인간에 대비된 자연물입니다.




❙❙ 앙덕지금(仰德至今)과 청야몽(淸夜夢) ❙❙ 전(轉)의 앙덕지금(仰德至今)과 청야몽(淸夜夢)을 보겠습니다.


앙덕지금(仰德至今)은, 농암과의 오랜 동행에서 받은 정신적 영향, 그에 대한 감사와 존중의 표현입니다. 그들의 오랜 동행은, 퇴계는 농암 행장(行狀)에서 ‘모시고 따르며 논 것이 얼마인지 모른다(扶几從遊者不知其幾)’고 했고, 농암 자제들은 퇴계를 ‘아버지를 가장 오래 모신 사람(侍最久)’이라 하였습니다. 앙덕지금은 그 오랜 동행에서 받은 정신적 세례(洗禮)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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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야몽(淸夜夢)은 무엇이겠습니까? 꿈이 맑게 선명해졌다는 것인데, 이와 관련해, 이 해 여름 퇴계가 쓴 시 한 구절을 보겠습니다. 농암과 퇴계와 금계가 점석에서 유상곡수(流觴曲水)를 하고, 함께 강각에 유숙(留宿)한 다음 날, 퇴계가 농암에게 올린 시의 결구(結句)입니다.



숲속 작은 집은 밤새 꿈이었는데(林間小閣通宵夢),

문득 깨어나니 정신이 분수 밖에 맑습니다(陡覺神魂分外淸).



이 시의 몽(夢)과 청(淸)은, 시의 맥락으로 보면, 위 시 청야몽(淸夜夢)과 완전히 의미가 같습니다. ‘꿈’과 ‘맑음’, ‘꿈이 맑아짐’, 이 시의 청(淸)과 몽(夢)은, 청야몽(淸夜夢)의 청(淸)과 몽(夢)을 풀어 배치한 것입니다. 그가 오랫동안 추구해 왔던 꿈(夢)이, 문득 명료해졌다(淸)는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 전(轉)은 퇴계가 오랜 기간 농암과의 동행에서 받은 정신적 세례(仰德至今),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문득 얻은 맑은 깨달음(淸夜夢)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랫동안 그가 꿈꾸었던 세상을, 지금 농암 신곡(新曲)이 연주되는, 이 농암의 점석 세상에서 명료하게 본 것이지요.


다음 그림은, 농암과 퇴계, 그들 세상이 한눈에 들어오는 강세황(姜世晃)의 도산서원도(陶山圖)입니다. 우측에 도산서원이 있고, 좌측에 애일당, 분강서원이 있습니다. 애일당 앞이 분강(汾江)입니다. 1751년에 그린 것입니다.


[자료 7]


도산서원도(강세황).png





❙❙ 퇴계의 꿈 ❙❙ 이 시를 포함해, 퇴계의 분강 농암 시에는 흔히 꿈이 등장합니다. 그 꿈은 무엇일까요?


시 맥락으로는 신선 세상(仙界)이나 신선(神仙)입니다. 점석이 봉영(蓬瀛)이고, 점석 주인 농암은 그가 신선(神仙)이라 표현한 인물인데, 그 농암의 점석 세상을 보고 꿈이 맑아졌다고 하였으니까요.


농암과 퇴계는 가끔 반도단(蟠桃壇) 모임도 하였습니다. 반도단은, 임강사(臨江寺) 옆, 큰 복숭아나무 아래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단(壇)입니다. 그 복숭아나무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 농암이 ‘평범한 나무가 아니다(非常品)’라고 한 나무입니다.


반도(蟠桃)는 삼천 년에 한 번 열매가 열리는 선계(仙界)의 복숭아입니다. 반도니, 봉영이니, 온통 신선 세상입니다. 그들은 아무래도 열렬한 신선 지망생이었던 듯. 선계와 신선은, 분강과 농암을 이야기한 다른 시와 글, 다른 이의 글에도 드물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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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꿈과 관련하여, 이치억(李致億) 박사의 단언적인 글이 있습니다. 2015년 간행된 ‘인생교과서 퇴계’에 실렸습니다. 이치억 박사는 퇴계 17대 종손입니다.



‖퇴계는 무엇인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고,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 등을 ‘얻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지만, 그 역시 되어야겠다고 공공연히 말했던 것이 하나 있다. 의외로 그것은 신선이다. 신선을 갈망하는 마음은 그의 글 곳곳에서 발견된다.



퇴계 종손이면서, 또 오랜 시간 학자의 눈으로 퇴계를 탐구한 분석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되는 것을 목표하지 않고, 무엇을 얻는 것을 기뻐하지 않은 퇴계가, 드러내어 말한 소망이 신선(神仙)이라는 것입니다.


농암은 그렇다 해도, 일생을 인간과 우주 질서를 논리적으로 궁구하고 설명한 도학자(道學者), 글 한 편도 근거를 찾아 쓰는 그 엄정한 퇴계가, 어쩌면 비현실적인 신선, 선계를 갈망하였다니,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다소 낯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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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겸재(謙齋)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를 잠깐 가져왔습니다. 도산서원 자리에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조합해 그렸다고 하는데, 필자 눈에는, 서당 뒤편으로 이어져 나간 서취병(西翠屛), 병암(屛巖), 서취병 끝자락에 있을 애일당, 농암, 농암 앞 분강, 이런 것이 순식간에 같이 들어옵니다.


정거(靜居)는 세상일 잊고 고요히 산다는 의미입니다. 저 퇴계의 고요한 정거(靜居) 속에 신선의 꿈이 있었다는 것을, 퇴계를 깊이 존경하였다는 겸재는 알고 있었을까요? 그렇게 봐서 그런지, 어쩐지 선계 같기도 하고, 신선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단정하고 고요한 신선.


[자료 8]


계상정거도.png





❙❙ 월명(月明)과 중주(中洲) ❙❙ 결(結句)이 퇴계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인데, 어렵습니다. 상징화된 달(月明)과 중주(中洲) 때문입니다. 달과 중주는 무엇일까요?


달(月明)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선 퇴계 자신의 각성(覺醒) 순간, 혹은 경지일 수 있습니다. 깨달음은 흔히 문득 떠오른 달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달을 농암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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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달을 퇴계 자신의 각성(覺醒)의 순간으로 보면, 전(轉)의 청야몽(淸夜夢)과 의미 연결이 자연스럽습니다.

안개처럼 불확실하던 꿈이 문득 환하게 밝아진 것이 청야몽(淸夜夢)인데, 그 깨달음의 경지 혹은 순간을 달(月明)로 표현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청야몽의 맑음(淸), 밤(夜), 꿈(夢)은, 명월의 밝음(明), 달(月)의 이미지와 정확히 어울리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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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는, 달을 후자(後者), 즉 농암이라고 보았습니다. 달은 중주(中洲)에 뜬 달이고, 중주가 시상 전개의 끝에 있기 때문입니다.


중주(中洲)가 시상 전개의 끝에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상 전개가 농암(聾巖)에서 점석(簟石)으로 간다는 점을 상기해 보십시오. 기구(起句)의 고대가 농암(聾巖)이면, 결구(結句)의 중주는 점석일 가능성이 높게 됩니다. 시상 전개상 그렇습니다.


그렇게 보면, 중주(中洲)의 주(洲)는 아마 영주(瀛州)일 것입니다. 농암이 점석을 영주라 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해 여름에 쓴 농암시 ‘비 온 뒤, 배 띄워 점석에서 놀다가, 경호 시에 차운하다(雨餘泛舟遊簟石次景浩)’의 한 부분을 보십시오.



예부터 이름난 물에 잠긴 기이한 바위(蘸水奇巖舊著名)

유람객 승경 찾으니 절로 봉영이라네(遊人探勝自蓬瀛)



봉영(蓬瀛)은 봉래(蓬萊)와 영주(瀛州)입니다. 방장(方丈)과 함께, 신선이 산다는 전설의 삼신산(三神山)이지요.


요컨대, 퇴계의 시선은, 농암 동선을 따라, 고대인 농암(聾巖)에서 시작해, 영주인 점석에서 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시의 시상 전개 과정입니다.


농암(聾巖)에서 점석으로의 전개, 과연 빈틈없는 구성입니다. 분강 농암을 표현하려면, 농암(聾巖)과 점석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을 농암 동선 따라 연결한 것이니까요. 참으로 탁월한 전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음이 당시 분강 일대 풍경입니다. 농암이 부모를 위헤 축수연(祝壽宴)을 하는 분천헌연도(汾川獻燕圖)인데, 1526년 그림입니다.


[자료 9]


분천헌연도.png


우측 사람들이 앉은 바위가 농암(聾巖)이고, 그 앞 강이 분강이고, 분강 중앙에 점석이 있습니다. 그림처럼, 저렇게 노를 저어 농암(聾巖)에서 점석으로 가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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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주(中洲)가 점석이면, 중주에 뜬 달은 무엇이겠습니까? 점석 주인인 농암일 수밖에 없습니다. 퇴계에게는, 점석 세상의 농암이 바로 중주에 뜬 달인 것입니다.


또한 중주에 뜬 달도, ‘물가에 뜬 달’처럼 평범한 서술이 아니라, ‘신선 세상에 뜬 달’로 큰 의미 하나가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 해석이 훨씬, 퇴계가 본, 농암과 분강의 시적 정황에 부합합니다.




3. 중주(中洲)에 뜬 달, 농암 ❙ 상농암이선생(上聾巖李先生)


이제 전체 내용을 정리하겠습니다. 화자의 시선은 고대(高臺)에서 중주(中洲)로, 즉 농암(聾巖)에서 점석(簟石)으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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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기(起)와 승(承)의 주체는 농암입니다. 농암이 농암(聾巖)에서 소요(逍遙)하고 있고, 그 풍경 속에 새로운 노래(新曲), 국화(黃花), 갈매기(白鷗)가 있습니다. 음악과 함께, 자연과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된 노경(老境)의 농암 모습입니다.


전(轉), 결(結)의 주체는 퇴계입니다. 전(轉)은, 농암과 오랜 동행에서 받은 정신적 세례, 그 끝에 분강 세상의 농암을 보고 얻은 선명한 깨달음, 그것에 대한 감사, 존중, 기쁨을 고백하였습니다. 결(結)은 점석 세상, 곧 신선 세상의 빛나는 존재 농암을 하늘의 밝은 달로 찬양하였습니다.


달 그림 하나를 가져왔습니다. 김홍도(金弘道)의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입니다. 점석 분강의 달은 아니지만, 성근 나무 사이로, 마음으로 오는, 고요하고 맑은 달입니다.


[자료 10]


서림명월도(김홍도).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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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 마무리로, 퇴계의 서어부가후(書漁父歌後)를 보겠습니다. 본문 시 2년 뒤 만들어진 어부가(漁父歌)의 뒤에 붙인 글입니다.



‖매양 반가운 손님과 좋은 경치를 만나면, 뱃전에 의지하여 물안개와 작은 배를 희롱하고, 반드시 아이들로 합창케 하며, 손잡고 춤추게 하니, 옆 사람이 바라보면, 세상을 아득히 벗어난 신선 같았다(每遇佳賓好景憑水檻而弄烟艇必使數兒竝喉而唱咏聯袂而蹁躚傍人望之縹緲若神仙人焉).



물안개, 작은 배, 어부가로 자연과 물아일체가 되어 진세(塵世)를 아득히 벗어난 신선, 그것이 퇴계가 본 분강의 농암입니다.


신곡(新曲)이 있는 점석 세상, 분강 세상, 아득히 세상 떠난 곳에서 홀로 빛나며 삶의 등불이 된 존재, 월명시부도중주(月明時復到中洲), 중주(中洲)에 떠오른 달, 그가 농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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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강 표석(標石)을 가져왔습니다. 표석은 표시하는 바위입니다. 흔히, 새긴 글씨를 따라 ‘분천(汾川) 바위’라고 하는데, 분천(汾川)이 곧 분강(汾江)입니다. 분강 하류에 있고, 지금은 수몰 지역 안에 있어, 접근이 쉽지 않습니다.


[자료 11]


분천 사진.jfif




4. 덧붙이는 글 ❙ 어부가(漁父歌)가 있는 농암의 강(江)


이 시 발표 2년 후 1549년에 농암은 어부가를 만듭니다. 전래하던 곡을, 더하고 빼고 정리하여, 장가(長歌) 9장 단가(短歌) 5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장가는 읊고(詠), 단가는 창(唱)하도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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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가를 고쳐 만드는 과정에는 퇴계와 의견 교환이 있었습니다. 금계(錦溪)에게 원본을 받은 농암은, ‘잘라내고 고치고 많은 내용을 덧붙여(非徒刪改添補處亦多)’, 퇴계에게 보이고 수정을 요청하였습니다.


요청을 받은 퇴계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였는데, 그 구체적 내용은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 후의 편지로 보면, 직접 만난 자리에서 말로 개진한 것이 아닌가 하는데, 그 편지에는, 당시 그런 의견 피력이 ‘주제넘었다(誠不穩愜誠爲叨僭)’고 겸양해 말하고 있습니다.


퇴계 의견을 받아 수정을 거친 농암은, 수정본을 다시 퇴계에게 보내 또 ‘버리고 지우고 고치고 기워서 돌려보내 달라(幸覽取捨抹改添補送還如何)’고 요청합니다. 가만히 보면, 두 사람은 음악 동지입니다.

퇴계는 ‘이번에 수정하신 것은 모두 노래할 만하고 전할 만합니다(今來所定章次及短歌新作一闋皆勝於前日之所示可歌而可傳者也)’라고 회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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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할 만하고(可歌), 전할 만하다(可傳)’를 ‘겨우’ 정도의 함의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퇴계의 가가(可歌)와 가전(可傳)은 최고의 인정과 칭찬을 눌러 표현한 것입니다.


가가(可歌)는 작품의 음악적 완성도가 높다는 것입니다. 퇴계의 ‘노래’에 대한 식견은 깊습니다. ‘읊음(詠)’과 ‘노래(歌)’의 형식적 차이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고, 노래가 갖는 토착적 효과도 잘 알아,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노래할 수 있도록(可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발문에서 그가 밝힌 내용입니다.


가전(可傳)은 세상에 내어도 될 만하다는 것입니다. 후대에도 물론 전달되겠지요. 퇴계의 가전(可傳)은 의례적 수사가 아닙니다. 그는 세상에 무엇을 내는 기준은 엄격해, 훗날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짓고도 한동안 세상에 내지 않았습니다. 검토를 거듭하고 자신이 설 때 세상에 내었습니다. 퇴계의, 세상에 내어도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되실 것입니다.


가가(可歌)와 가전(可傳), 어부가에 대해서는 농암도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많이 더하고 보완해(添補處亦多)’ 만들었다고 은근한 자랑도 하고, 만든 후에는 ‘새로운 노래(新曲)’라 자부합니다. 그는 이후, 이전 노래는 다 버리고 이것만 들었다는데,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부가(漁父歌), 우리는 지금 그 ‘노래’는 모르고, 전하는 ‘가사’만 보지만, 과연 농암 음악의 정점이었던 듯합니다. 어떻게, 한 번이라도 들어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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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봄부터의 의견 교환을 거쳐, 농암은 1549년 여름 어부가를 완성하였습니다. 퇴계가 이 시를 쓴 2년 후의 일입니다. 퇴계도 이후, 우리말 구성으로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짓는데, 그는 훗날 어부가와 도산십이곡을 모두 자필로 정서를 하였습니다.


그 퇴계 글씨로 쓴 어부가와 도산십이곡을 목판으로 만들었는데, 다음이 그 목판입니다. 농암종택 소장입니다.


[자료 12]

어부가 목판.png


문득, 여담인데, 어부가(漁父歌)와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농암 음악과 퇴계 음악은 따로 떼서 논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관련 기록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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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부가에 대한 퇴계의 생각을 적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원본 개찬(改撰) 후, 농암이 퇴계에게 수정을 요청하며 보낸 편지에 대한, 퇴계의 회신입니다.



‖이 어부가로 인해, 강호의 밝음, 풍월의 맑음, 고기잡이의 즐거움은, 하늘이, 고상하게 물러난 경지를 위해 주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세상사에 매인 자가 이를 보면, 마치 벌레가 고니를 보는 것처럼, 진실로 그 강 가장자리도 보지 못할 것입니다(因此又知江湖之景風月之淸漁釣之樂天所以餉高退之境自世俗規規者觀之不啻黃鵠之與壤蟲固不得窺其涯際也).



강과 호수의 밝음(江湖之景), 바람과 달의 맑음(風月之淸), 고기잡이의 즐거움(漁釣之樂)이 있는, 어부가가 있는 농암의 강(江), 농암 세상 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