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간의 임정로드_Chap.21
중경을 떠날 당시에 중국 공산당 본부에서 주은래·동필무 등이 우리 임시정부 국무원 전체를 초청한 송별연이 있었다. 국민당 정부에서도 송별연을 열었는데, 장개석 선생을 위시하여 중앙정부와 중앙당부 각계 명망가 수백 인이 모였고, 우리 측에서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한국독립당 간부들이 초청받았다. 연회는 국민당 중앙당부 대례당에서 중·한 국기를 교차한 채 융숭하고 간곡하게 진행되었다.
<백범일지>
충칭에서 임시정부의 외교를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인상은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는 부분이다. 독립을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지만 그 힘은 내부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태생부터 외교를 운명처럼 안고 출발한 정부였다. 총과 병력에 앞서 국제적 승인과 지원이 곧 생존의 조건이었던 정부. 임시정부의 또 다른 전선은 외교였고, 그 외교는 언제나 외줄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임시정부는 일찍부터 구미위원부를 통해 미국과 유럽 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고자 했지만, 현실적으로 활동의 무게중심은 그들이 머물고 있는 중국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임시정부가 상대해야 했던 중국의 얼굴은 분명했다. 대륙을 장악하고 있던 국민당 정부, 그리고 그 중심에 있던 장제스였다. 임정은 국민당 정부와의 관계 속에서 활동 공간과 자금을 확보했고, 광복군 역시 그 틀 안에서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1936년 제2차 국공합작 이후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공산당 역시 항일 전선의 한 축으로 떠올랐고 임시정부는 이 새로운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일본과 싸우는 두 개의 중국, 그리고 그 사이에서 독립을 꿈꾸는 망명정부. 임정은 어느 한쪽에만 기대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충칭에서의 둘째 날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장제스와 만났던 행영을 방문했을 때, 그 사실이 조금은 실감 났다. 지금은 상업시설로 쓰이고 있지만 고택의 외양과 내부는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의 시간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곳에서 1943년 임정 요인들은 중요한 요청을 건넸다. 곧 열릴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즉각 독립을 명시해 달라는 요구였다. 작은 정부의 간청이었지만 그 무게는 가볍지 않았고 장제스로부터 협력 약속을 받아냈다. 결국 카이로 선언에는 한국의 독립이 포함됐고, ‘적절한 시기’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국제 문서 속에 조선의 이름이 처음으로 언급됐다. 그 문장 한 줄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계산과 설득이 필요했을지 이 건물 앞에 서서야 조금 짐작할 수 있었다.
행영을 나와 찾은 계원은 또 다른 방향의 외교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곳은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이 충칭에 머물며 장제스와 ‘중경담판’을 벌였던 공간이다. 광복을 앞둔 1945년 여름,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곳에서 마오쩌둥과도 만났다. 국민당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공산당과 접촉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으면서 어느 쪽도 완전히 놓치지 않으려 했던 외교의 곡예였다.
그럼에도 임시정부는 그 위험을 감수했다. 국민당과 공산당 양측으로부터 자금과 활동 공간을 제공받으며, 국내외 동포 사회를 연결하는 항일 네트워크를 유지했다. 중국 내부의 대립을 그대로 끌어안으면서도 그 균열 사이에서 독립운동의 통로를 만들어냈다. 분열된 중국 정치 지형 한가운데서, 오히려 한국 독립운동 진영의 통일 전선을 지켜낸 셈이었다.
물론 이 협조와 연대가 순수한 호의만으로 이뤄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서로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임시정부를 자신들의 우군으로 두고 싶었을 것이다. 임정 역시 그 계산을 모를 리 없었다. 장차 어느 세력으로든 통일된 중국은 해방 이후 한국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자신들의 입지를 활용했다. 한쪽의 도구가 되지 않으려 애쓰면서 동시에 가능한 모든 지원을 끌어내고자 했다. 중립은 선언이 아니라 매 순간의 선택이었다.
이런 고도의 외교 전술은 결코 말이나 선언만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임정은 일정 규모 이상의 군대를 편성하는 것조차 제한받았고 활동 범위와 방식에도 수많은 제약이 따랐다. 오늘날 한국이 국제 질서 속에서 미사일 사거리나 무기 체계에 제한을 받고 있는 것처럼, 그 시절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늘 존재했다. 임시정부의 외교는 그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최대한의 효과를 끌어내기 위한 끊임없는 계산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1945년 가을,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을 위해 충칭을 떠나기 전 국민당 정부는 장제스의 주관 아래 성대한 송별연을 열었다. 며칠 뒤 공산당 역시 별도로 임정 요인들을 초청해 연회를 열었고,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같은 인물들이 직접 김구와 인사를 나눴다. 중국의 두 거대 정치 세력이 모두 임시정부를 공식적으로 예우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외교가 단순한 생존 전략을 넘어 분명한 성과를 거두었음을 보여준다.
임정의 외교는 거창한 이념이나 노선이라기보다 버티는 기술에 가까웠을 것이다. 어느 쪽에도 완전히 기대지 않고 어느 쪽도 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독립이라는 목표만을 중심에 두는 일. 그것은 중립이 아닌 끝없이 흔들리는 균형이었을지도 모른다.
충칭을 걸으면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때의 임정이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서 있었던 것처럼, 지금의 한국도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고민하고 있다. 상황도 조건도 국력도 다르지만, 강대국 사이에서 선택과 계산을 요구받는 위치라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으면서도 어느 한쪽도 적으로 돌리지 않으려는 외교. 말로는 간단하지만 실제로는 늘 비난과 오해를 동반하는 길이다.
임시정부의 중립외교는 이상적이어서가 아니라 불가피했기 때문에 치열했다. 선택지가 많아서가 아니라, 선택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정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외교의 결과는 완벽하지 않았고, 해방 이후의 현실은 또 다른 갈등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그들이 끝까지 정부의 형태를 유지하며 외교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금도 충분히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전쟁과 외교, 계산과 신념이 겹겹이 쌓였던 도시. 이곳에서 임시정부는 싸우지 않는 방식으로도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그 치열함은 총성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그리고 그 거리를 계산하는 끝없는 고민 속에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