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간의 임정로드_Chap.22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
제2조. 대한민국의 강토는 대한의 고유한 판도로 함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원칙상 한국민족으로 함
제4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인민전체에 있음. 국가가 광복되기 전에는 주권이 광복운동자 전체에 있음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좌렬 각항의 자유와 권리를 향유함
1. 언론, 출판, 집회, 결사, 파업, 신앙의 자유
2. 거주, 여행, 통신, 비밀의 자유
3. 법률에 의하여 취학, 취직급 부양을 요구하는 권리
4. 선거, 피선거의 권리
5. 공소, 사소, 청원을 제출하는 권리
6. 법률에 의치 않으면 신체의 수색, 체포, 감금, 심문 혹 처벌을 받지 않는 권리
7. 법률에 의치 않으면 가택의 침입, 수색, 출입제한 혹 봉폐를 받지 않는 권리
8. 법률에 의치 않으면 패산의 징발, 몰수 혹 추세를 받지 않는 권리
제7조.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 혹 박탈하는 법률은 국가의 안전을 보위하거나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거나 혹은 공공이익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것이 아니면 제정하지 못함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6호, 1944. 4. 22.>
한여름 충칭의 공기는 눅눅하면서도 묘하게 느슨했다. 그 안에서 그들이 겪었을 폭격 그리고 전쟁의 끝이 다가오던 당시의 감각이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대신 상상으로. 연화지 청사 인근을 다시 걸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불안정한 공간에서, 그토록 임시적인 삶 속에서 임시정부는 무엇을 가장 지키고자 했을까.
생존만을 목표로 했다면 더 단순했을지도 모른다. 무력 강화에 집중하거나, 특정 세력에 완전히 기댄 채 정치적 색을 분명히 했을 수도 있다. 하다못해 조선 왕족 중 누군가를 구심점 삼아 왕정복고를 꾀하는 방법도 있었다. 중앙집권체제는 당시 민중들에게 아직 익숙했던 데다 통치 측면에서도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국민이 주권을 가진 정부의 형식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그 형식의 핵심에는 민주주의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무모해 보일 만큼 까다롭고 비효율적인 원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출발부터 왕정의 복원을 선택지에서 배제했다. 1919년 상하이에서 수립될 때부터 국호부터가 ‘민국’이었다. 임시헌장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분명히 했고, 삼권분립과 책임정치를 명시했다. 그것은 독립 이후의 청사진이 아니라 독립 이전부터 스스로를 규율하는 기준이었다. 그래서 임시헌장은 다섯 차례의 개정을 거쳤음에도 광복의 순간까지 민주주의 체제를 포기하지 않았다.
물론 그 과정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이동의 역사였던 임정의 일상은 늘 분열과 갈등을 동반했다. 상하이에서 시작해 충칭에 이르기까지 도시가 바뀔 때마다 구성원도 바뀌었고 상황도 달라졌다. 민주주의 체제가 포용하는 모든 이념과 각기 다른 의견들은 임정이라는 틀 안에서 긴장과 이완을 반복했고, 독립운동의 방식과 우선순위를 둘러싼 다툼도 끊이지 않았다.
누군가는 외교를 중시했고 누군가는 무장투쟁을 앞세웠다. 사회주의 노선을 지지하는 이들과 민족주의 입장을 고수하는 이들 사이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못했다. 정부 운영을 둘러싼 권한 다툼, 인사 문제, 재정 집행을 둘러싼 반목도 반복됐다. 때로는 말다툼을 넘어 폭력으로 비화했고, 실제로 서로를 제거하려 했던 시도들도 기록에 남아 있다.
그럼에도 임정은 끝내 해체되지 않았다. 누군가 완전히 승리하지도 축출되지도 않았다. 갈등은 봉합되거나 미뤄졌고 때로는 상처로 남은 채 다음 국면으로 넘어갔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미숙하고 답답한 선택들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가능한 한 협상하고 타협하려 했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오해하기 쉬운 조건 속에서도.
충칭에서 그 흔적은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이곳은 임시정부의 마지막 피난처였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내부를 붙들어 매는 힘으로 작용했을지 모른다.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이 막바지에 이르러 주도권을 잡았지만, 그렇다고 반대 세력들이 임정에서 완전하게 배제된 것도 아니었다. 우익 색채를 띠었던 임정 수뇌부들이었지만 장제스를 만나 외교를 이어가는 동시에 공산당 지도부와도 접촉하고 교류했다.
중립과 균형은 외교의 기술이었지만, 동시에 내부 운영의 근간이자 원칙이기도 했다.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고 견제하면서도 반대파들의 목소리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게끔 유지하는 일. 그것은 매우 느리고 비효율적인 방식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임정을 ‘조직’이 아닌 ‘정부’로 남게 했다.
이는 1940년 4월에 공포된 임정의 제5차 헌법 개정에 여실히 드러난다. 임정과 임시의정원 밖의 좌익세력을 합류시켜 통합정부 및 의회를 구성하는 데 초점을 둔 개헌이었다. 특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좌우세력이 합의해 만든 헌법이라는 점, 다른 하나는 부주석제를 신설해 주석·부주석 체제를 갖췄다는 점이다. 이를 계기로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이 부주석에 선임됐는데, 이념을 달리하고 있던 좌우익 독립운동 세력이 공동의 목표를 설정했다는 의미다. 좌우익 진영이 통합정부와 통합의회로 광복을 맞은 셈이다.
충칭의 거리에서 란저우 우육면을 먹었다. 임정 사람들이 즐겨 먹었다던 국수 한 그릇. 밀가루가 풀어져 맑고 담백하진 않지만 그래도 속을 채워주는 고기 국물이 두둑한 든든함을 준다. 무엇보다 값싸고, 쉽게 먹을 수 있으며, 허기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한 끼. 민주주의도 그와 비슷했을지 모른다. 화려하지 않고 늘 불완전하지만,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방식. 모두의 취향을 만족시키지는 못해도, 쉽게 굶지 않게 해주는 선택지.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됐지만, 서구 사회에 본격적으로 안착한 것은 20세기를 전후해서다. 정치 제도가 상대적으로 발달하지 못했던 동아시아에서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다. 식민지 망명정부였던 임정의 민주주의가 완성형이 아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미완의 민주주의 아래에서 갈등은 충분히 해소되지 못했고, 상처는 축적됐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그들이 끝끝내 다른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 강한 지도자, 더 단순한 명령 체계, 더 빠른 결정을 유혹으로 느끼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제도와 절차를 완전히 걷어내지는 않았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독립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임시정부는 여전히 정부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때까지 완벽하지 않았지만 붕괴되지도 않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들의 선택은 충분히 평가받을 가치가 있다.
물론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척박한 길을 걸어왔다.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조건 속에서 국가의 존립 자체가 우선 과제로 떠올랐고,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구현은 반복해서 유예되거나 후순위로 밀려났다.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권위주의와 독재 정권이 이어졌고 제도는 껍데기로만 존재했다. 선거는 형식뿐이었고 헌법에 새겨진 권리는 현실에서 쉽게 무력화됐다. 민주주의를 되찾기까지 수많은 이들이 거리에서, 감옥에서, 혹은 어딘가에서 피를 흘리고 이름 없이 사라져야 했다. 그 과정에서 고착화된 사회적 구조와 갖가지 병리현상들은 지금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못한 채 사회적 비용의 지출로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갈등 속에 살고 있으며, 이념의 차이도 정치적 대립도 사라지지 않았다. 완벽한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고 어딘가 불만족스러운 타협들의 연속인 나날들이다.
그럼에도 민주주의는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 여러 차례 좌절과 후퇴를 겪으면서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감각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권력이 일방적으로 집중될 때마다 이를 문제 삼는 목소리가 있었고, 제도와 절차가 무너질 때마다 다시 세우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완벽하게 작동하지는 못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기준 자체가 지워지지는 않았다. 그 기준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한 세기 전 망명지에서 정부의 형태로 살아남으려 했던 선택들 속에서 축적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2024년 12월의 계엄 사태를 막아낸 힘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는다면, 이 긴 망명사의 끝자락을 떠올리게 된다. 완벽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으려 애써온 민주주의의 기억. 그 기억은 제도와 관성으로 남아 오늘의 위기를 버텨내는 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충칭에서의 마지막 날 밤, 어둠이 내려앉고 불빛이 화려한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이 도시에서 임정은 끝을 맞으며 동시에 씨앗을 남겼다. 당장 눈에 띄는 결실은 아니었을지라도 쉽게 뽑히지 않는 뿌리를 내렸다. 가장 불안정했던 시기에, 그 어디에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히, 누구의 박수도 기대하지 않은 채 그렇게 남겨진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