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자의 기억법 #22
임정로드가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을 무렵 문득 되돌아보니, 그간 줄기차게 면만 먹어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렴하고 간단한 길거리 음식을 고집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면. 그리고 또 면. 정신을 차려보니 그릇 안에는 늘 면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그냥 가볍게 면. 그다음 날도 면. 그다음 날은 국물이 있는 면. 그다음 날은 국물이 조금 다른 면. 그리고 또 면. 면은 늘 그 자리에 있었고 저는 늘 그릇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계속 이어졌습니다.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라는 것을. 임정로드 후반부에 만난 풍경들은 마치 수묵화 같았습니다. 산이 겹겹이 서 있고 강이 흐르며 시간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만 같은. 그리고 저는 그 고요함 속에서 끊임없이 후루룩거리고 있었습니다. 역사는 묵직하게 가슴을 치는데, 제 입은 면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위장 자치정부와 끝없는 협상을 벌이며 국물과 화해하고 향신료와 타협하며, 매운맛과 일종의 신사협정을 체결했습니다. 물론 다음 날 곧바로 파기되었습니다만. 아무튼 그 모든 순간에 면은 저와 함께했습니다. 라멘, 탄탄멘, 어쩌면 아멘.
桂林担子米粉 in 구이린
구이린 칠성공원의 경치에 흐느적대던 감정을 추스르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발견한 집입니다. 좁은 공간에 필요한 것들만 구겨 넣은 인테리어, 이케아도 아니고 다이소에서 모두 장만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테이블과 의자,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은 타일 벽면. 기대되는 맛과 걱정스러운 위생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 끝에 결국 발길을 들이게 된 그런 곳이었습니다.
한 그릇에 4위안(850원) 받는 쌀국수. 맛이 없으면 곧바로 다른 집을 찾아야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앉았더니 정말 이게 뭔가 싶은 국수가 나왔습니다. 작은 스댕 그릇에 대충 담은 면 한 줌과 역시나 정체 모를 고기조각들, 땅콩 몇 개와 수줍게 올라간 매운 양념. 이게 전부냐 물으니 대답 대신 퉁명스러운 눈길이 돌아옵니다.
하는 수 없이 면을 뒤적여보니 밑바닥에 뭔가 흥건한 소스가 숨어있지 뭡니까. 간장 베이스 같은데 색깔이 오묘했습니다. 적당히 휘저어 입으로 가져갔더니 오 이런.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단짠의 조화가 입안을 에워싸는 것이 아닙니까. 뒤이어 말라비틀어져 보이던 고기와 땅콩은 극강의 고소함을 풍기며 시간차 공격을 해왔습니다.
대체 왜 맛이 있는 건지 용을 쓰며 나름의 분석을 시도했으나, 어느 순간 그릇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습니다(그래서 사진도 없나 봅니다). 비주얼과는 180도 다른 맛의 충격에 한참을 앉아있어야 했습니다. 그 옛날 소개팅에서 첫인상에 실망해 섣부르고 경솔한 판단을 내렸던 제가 떠올랐습니다. 아니, 저를 보고 그랬던 수많은 그녀들이 떠올랐습니다.
王嬢嬢 重庆小面 in 충칭
충칭에 도착해서 돌아다니는데 유독 길거리에 ‘중경소면(重庆小面)’이라는 간판을 내건 집들이 많았습니다. 김밥천국 수준으로 자주 보이다 보니 호기심이 드는 건 당연했습니다. 몇 곳을 고르고 고르다 적당히 허름해 보이는 곳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내용물은 구이린에서 먹은 쌀국수와 비슷했습니다. 다만 핵심인 면에 쌀 대신 밀가루가 사용됐다는 점이 달랐습니다. 공심채가 들어가고 매운 내음 가득한 고추기름이 끼얹어져 있다는 것도요. 비벼보니 쌀국수처럼 산뜻하진 않지만 뭔가 조금은 익숙한 느낌이 드는 텍스처의 면이 완성됩니다.
온기가 남아있는 면은 사나운 마라의 향을 머금고 있었습니다. 방금 비빈 것 같은데 생각보다 맛이 빠르게 잘 스며든 느낌이었습니다. 기름기가 상당하지만 입안이 그리 불편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식감 좋은 조연들의 역할이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만 반숙 계란후라이 두 개 정도 넣어 휘저으면 아주 완벽할 것만 같은, 약간의 아쉬움을 동반한 맛이었습니다.
뽑기 운이 좋지 못했나 싶어 다른 가게도 두어 차례 시도했지만, 맛은 대동소이했습니다. 이름을 봐서는 분명 충칭을 대표하는 음식 같은데 이 정도 맛으로 대표성을 부여하기엔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뭔가 저보다 훨씬 잘 아시는 분이 나타나서 반박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딘지 기억나지 않는 란저우 우육면 in 충칭
임정로드를 준비하던 중에, 임정 사람들이 란저우 우육면을 자주 먹었다는 기록을 얼핏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눈에 띄면 먹어야겠다 다짐했는데, 생각보다 기회가 없었습니다. 중국 어느 도시를 가나 한 두 곳쯤은 있고, 심지어 한국에서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긴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식사 타이밍이 맞지 않거나 혹은 식당이 지나치게 고급스럽거나 하는 따위의 이유로 번번이 놓쳤던 것 같아요. 아무튼 충칭은 마지막 도시다 보니 어떻게든 찾아내서 먹어야 했습니다. 그 옛날 그들이 먹었다면 필시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숙소 주변을 검색해 적당히 허름한 외관의 가게를 골라 찾아갔습니다. 구수한 소고기 육향과 고추기름의 매콤한 냄새가 섞여 올라오는 국물 위로 양지 부위로 보이는 고기 몇 점이 보였습니다. 무를 넣어 끓였는지 시원한 느낌도 있고요. 면은 중면인데 살짝 질깃한 식감이 괜찮았습니다. 면의 밀가루가 살짝 녹아든 것 같았지만 오히려 국물의 밀도를 적당하게 채워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원래는 부대찌개 먹을 때도 농도 변화에 민감해서 면 사리 투입을 경계하는 편이거든요.
향신료가 과하지 않아 소고기 국물 본연의 맛이 두드러집니다. 중국의 여느 국물 요리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심심한 맛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임정 사람들에게 고향의 맛까진 아니지만 어느 정도 만족할만한 맛이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생각이 나는 맛이냐 묻는다면, 솔직히 자신은 없습니다. 분명 특별한 음식이었지만 뇌리에 깊게 남았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분들도 환국 이후에 그 우육면을 떠올렸을지 궁금해지더군요.
月半 in 충칭
충칭을 떠나기 전날 밤,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조금은 푸짐하게 먹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래봐야 혼밥 신세인지라, 원형 테이블에 앉아 유리판을 빙빙 돌리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호스텔 직원에게 지역 요리를 잘한다는 집을 추천받아 방문했습니다.
중국인들에게 식당을 물어보면 대개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값비싸고 화려한 집을 추천해 주곤 합니다. 사 줄 것도 아니면서(아? 사 줄 것이 아니라서 그런 것인가!) 항상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걱정을 조금 안고 찾아갔는데, 그냥 작고 낡고 흔한 백반집이었습니다. 임정로드의 운명적인 정체성은 그렇게 마지막까지 강력했습니다. 사실 그가 보기에 제 행색에 적격이다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게 규모에 맞지 않게 100가지 가까운 요리가 메뉴판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20년 전 대학 입시 때의 눈치싸움을 떠올리며 신중하게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안전빵으로 선택한 건 西红柿炒鸡蛋, 토달볶입니다. 중국에서는 우리로 치면 거의 멸치볶음 수준의 포지션인데, 약간 달큼한 맛에 전분기가 있어 진득한 것이 특징입니다. 여기에 절임채소 위에 얹은 동파육을 매치했습니다.
고심 끝에 선택한 마지막 화룡점정은 마파두부. 사천 땅에 발을 들인 이상 본토 오리지날 진짜 원조 마파두부는 필수였습니다. 몇 년 전 삼국지 촉나라 루트를 여행할 때 청두에서 갔던 진마파두부(陳麻婆豆腐)에서 정말 기절하는 줄만 알았던 그 맛이 떠올랐거든요.
감사하게도 세 가지 요리의 쓰리쿠션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마파두부를 얹은 밥을 입에 넣고 동파육을 씹은 뒤 토달볶으로 마무리하는 로테이션은 완벽했습니다. 반주로 주문한 작은 백주 한 병으로는 택도 없어 두 병을 추가로 더 마셔야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P.S.
어쨌든 저의 임정로드는 면과의 동행이었습니다. 화려하지 않았고 대단하지도 않았으며 대부분은 그냥 후루룩이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후루룩의 시간들이 가장 또렷합니다. 사람은 결국 자기 체급에 맞는 기억을 오래 붙드는 법이니까요.
이제 정말 끝입니다.
면도 끝났고,
고추기름도 끝났고,
제 통장도 끝났습니다.
하지만 위장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진짜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