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자의 기억법 #21
임정로드의 전반부 지역인 중국 동부 연안의 도시들은 사실 개인적으로 방문 경험이 많았던 편입니다. 그래서 음식도 상대적으로 익숙한 것들이 많았죠. 반면 중후반부 도시들의 경우 거의 가볼 일 없는 작은 도시들이 대부분이라 음식 또한 스타일이 상당히 독특하고, 저마다 차이가 뚜렷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물론 값비싸고 좋은 요리라고 하는 것들은 애써 외면했습니다만, 지금 떠올리면 그놈의 감정선이 뭐라고 뭘 그렇게까지 했나 싶은 생각도 드네요. 이렇게 외전까지 쓰면서 소개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특이하고 귀한 음식들도 많았는데 말이죠.
다만 가끔씩 그런 유치함을 근사함으로 착각하는 기질이 있습니다. 2020년대에 홍콩 거리를 거닐면서 버버리 코트에 선글라스를 쓰고 성냥개비를 씹으며(실제로 했음), 이어폰으로는 캘리포니아 드리밍과 몽중인을 들으면서 괜히 통조림 캔이 어디 없나 흘끔대는 그런 따위의 행위들을 좋아합니다. 사실 지독한 과거지향주의자거든요. 다들 미래를 지향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당장 내일 뭐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앞날을 지향한다는 건 무망한 일 같아서요. 미래는 시간이 지난 뒤 회상하고 되새김질할 과거를 만들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입니다. 별 이야길 다 하네요 아무튼.
<二小姐 长沙菜馆> in 창사
중국의 중부도시이자 삼국지 형주의 주요 도시인 창사,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배가 고파 기어들어가다시피 한 식당입니다. 가게 이름인 두 소저..두 아가씨..라는 말에 현혹됐던 것은 결코 아니라고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배가 고팠다니까요. 강한 부정은 말 그대로 강한 부정일뿐입니다.
아무튼 강력한 허기가 뇌를 지배했던 터라 눈에 들어오는(읽을 수 있는) 요리를 대충 주문했습니다. 그랬더니 소고기와 공심채와 고추와 마늘을 넣어 볶은 요리 하나, 그리고 우리네 영원한 밑반찬 감자채 볶음이 나왔습니다. 향긋한 매운 내음이 이미 흘러넘치고도 남던 식욕을 한층 더 폭발시키는 느낌이었습니다. 맛 또한 상당했습니다. 맵기는 적당했고 염도 또한 흰밥과 밸런스가 완벽했으니까요. 그렇게 도파민의 분출과 함께 열심히 저작 활동에 매진하고 있던 어느 순간, 갑자기 지옥의 매운맛이 득달같이 덮쳐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어느 정도 맵기는 예상했지만 그렇게 난데없이 한순간에 선을 넘는 경우는 처음이었습니다. 심지어 익숙한 음식들이었는데 말이죠. 마치 학창시절 성적으로 저와 함께 바닥을 기던 친구 녀석이 “어제는 벼락치기 좀 했어” 이러면서 요상한 분위기를 풍기더니 돌연 100점을 맞아버리는 그런 배신감 같다고나 할까요.
덕분에 창사에 머무는 이틀 내내 고생했습니다. 읽는 분들이 식전일 수 있으니 고생의 디테일은 자세히 다루지 않겠습니다. 브런치북 본문에는 온갖 의미를 갖다 붙여 뭔가 있어보이게 썼던 에피소드입니다만, 실은 그냥 매운 음식에 고생했다는 이야깁니다. 그리고 음식점은 간판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는 건 덤입니다.
<天山牛杂> in 류저우
천산우잡. 소의 잡스런 것. 맞습니다. 소 내장 전문점입니다. 평소 남의 내장이라면 1티어 안주로 삼고 살아온 저로서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방앗간 같은 곳이었습니다. 비교적 높은 가격에 잠시 고민했지만, 100년 전에는 내장 부위가 저렴한 식재료였을 것이 분명하고 그렇다면 독립운동가들도 쉽게 먹지 않았을까! 하는 뇌피셜을 이기지 못하고 발길을 들였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도합 10종이 훌쩍 넘는 온갖 내장들이 아우라를 뿜고 있었습니다. 내장 종류라야 고작해야 서너 가지밖에 모르던 저로서는 그 상당한 그로테스크함에 잠시 흠칫했으나, 왠지 그것들의 정체를 일일이 확인했다가는 발길을 돌리게 될 것만 같아 당당하게 착석했습니다. 가장 보편적으로 팔리는 것 같아 보이는 메뉴로 주문했습니다. 비닐을 씌운 큰 그릇(옛날 분식집 떡볶이 접시에 쓰던 방식을 떠올리면 되겠습니다)에 각종 내장과 채소와 면이 들어가고 견과류들이 흩뿌려져서 나옵니다. 국물은 매운맛과 신맛이 강렬한데, 이럴 수가..무려 차갑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벌겋게 짙은 국물을 조심스레 헤치면서 내장들의 생김새를 관찰했습니다. 원물을 볼 때도 몰랐는데 잘라놓으니 뭐가 뭔지 무슨 수로 알겠습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내장 조각들을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습니다. 예상대로 특유의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는가 싶더니, 이내 맵고 신 향신료들에게 신속히 진압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영화에서 보면 갑자기 등장해 날뛰나 싶더니 곧바로 얻어터지고 사라지는, 출연 분량이 너무 적어 안쓰럽던 악당들이 떠오를 지경입니다.
몇 입 더 먹으면서 그리고 독한 술까지 대동하니 차츰 적응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내장류 특성상 원래 온도가 식으면서 냄새가 더 강렬해지는 법인데, 이건 그럴 일이 없으니 더 나빠질 게 없었습니다. 어느덧 다양한 내장들의 저마다 다른 식감과 풍미를 즐기는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하나의 이름은 모르지만 제 입은 그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을 때도 그는 나에게로 와서 내장이 되었다..). 사실 지금까지 엄살이었고 냄새 강렬한 음식 잘 먹습니다. 아니, 없어서 못 먹습니다. 흔히 긍정적으로 언급되는 ‘잡내가 없는’, ‘냄새를 잡은’ 요리들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저도 제가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름 모를 시장통의 뤄쓰펀 in 류저우
광둥성의 서쪽 광시성, 류저우는 그 중심이지만 규모가 작은 도시입니다. 임정로드가 아니었다면 방문할 일도 알 길도 없었을 곳이지요. 아무튼 이곳에서 나름 명물이라는 ‘뤄쓰펀(螺蛳粉)’이란 국수가 있다기에 호텔 리셉션에 택시 기사에 심지어 행인에게까지 다 물어봤지만 돌아온 답은 하나였습니다. “그냥 아무 데서나 먹어. 어디서든 다 맛있어.”
오, 그렇다 이거지. 뭔가 오만한 자신감이 느껴져 더욱 흥미가 돋아났습니다. 길거리 음식인 만큼 식당보다는 캐주얼한 분위기가 어울리겠다 싶어 시장통에 보이는 곳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10위안(2100원)이라는 맘씨 좋은 가격. 넉넉한 면 위에 청경채와 목이버섯, 땅콩 같은 것들이 올라가 있습니다. 거무튀튀한 저 튀김은 놀랍게도 순수한 계란입니다. 휘휘 풀어서 한껏 뜨거운 기름에 짧게 튀겨내면 저런 모양이 되더군요. 당황스런 색감은 웍과 기름의 청결 상태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뭐 어쩌겠습니까.
면은 밀가루가 아닌 쌀로 만든 면입니다. 미펀(米粉) 혹은 미시엔(米线)이라 부르는데, 동남아가 멀지 않은 곳이라 그런지 광시성에 들어오고부터는 흔하게 눈에 띄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핵심은 다슬기로 냈다는 국물입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고린내가 난다느니 신체 가장 하단의 어떤 부위에서 나는 냄새라느니 하는 악평들이 좀 있던데, 뭐 아주 아니라고는 못하겠습니다만 그렇게까지 악취는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들큼하면서도 짭조름한 그 특유의 느낌이 꽤나 매력적이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향이지만 몇 번 삼키고 나면 이상하게 또 떠오르는 맛이었어요. 여행이란 결국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낯설지만 반복되면 익숙해지고 결국은 그리워지는 것.
…이라고 쓸 뻔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아무 생각 없고 그냥 한 그릇 더 먹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