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진 냉장고가 해준 말

일상에세이 11편

by forcalmness

주말 아침 갑자기 냉장고가 미지근해졌다. 반나절만에 냉장고가 고장이 나 버렸다. 아이의 아이스크림 대령요청에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다 물이 된 아이스크림을 발견한게 시작이었다. 전조증상도 없었는데 반나절만에 냉장고 기능이 다한 상황에 난 벙쪄버렸다. 다행히 신랑은 상황대처가 빨라 신속히 연락을 이곳저곳 해보더니 한 온라인몰에서 주문하면 하루만에 설치해준다는 걸 발견했다.



지금 중요한건 부가기능보다 신속한 설치. 방법을 찾아준 신랑에게 발맞춰 군더더기 없이 냉장고 용량 기준을 통과한 가성비 제품을 빠르게 선택해 주문했다.



이렇게 주문하고 나니 이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신랑은 냉장고에 감정이입을 했다. 8년 동안 하루도 안쉬고 밤이나 낮이나 움직인 냉장고가 일순간에 수명을 다하니 그 모습이 짠하다고 했다. 쉼없이 이어지는 노동과 나이듦의 사이클에 대한 회고 같았달까. 아이는 냉장고가 아파서 이제 보내줘야 한다고 하니까 싫다면서 냉장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주문했다. 냉장고를 기억하리 하면서. 감정선을 타고 있는 부자를 보며 속으로 킬킬대는 건 내몫이었다.



재밌는건 그러면서도 냉장고 제조회사에 손해배상청구를 해야하는 게 아니냐는 거였다. 냉장고 온도가 급격히 떨어져 안에 저장해둔 음식들을 버려야하니 그 음식구매비 손해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스개소리로 넘겼지만 맞벌이 부부가 냉장고, 냉동실에 쟁여둔 재료, 밀키트, 냉동식품들을 버리는 게 만만치 않았다. 신랑이 한바탕 재활용, 음식물쓰레기로 분류해서 버리고, 또 설거지후 잔잔한 것들을 내가 이차로 추려 버렸다. 버리는 게 진짜 일이구나 그때그때 소량씩만 사고, 요리도 해둔걸 다 먹고나서 또 새 음식을 해야겠구나 자연스레 체감했다.



이사를 하면서 사람들이 미니멀의 필요성을 느낀다고들 하는데 난 냉장고를 버리면서 냉장고 안의 미니멀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적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넘치게 쟁이고 있었고 이런 사건이 예기치 못하게 생기면 정리가 감당이 쉽지 않은 부담이라는 걸 깨달았달까.



예전에 유품정리 관련된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내 뒷정리를 할 사람의 수고도 생각해서 쟁이지 않고 필요한 물품들만 두고 살리라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냉장고 안도 그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다.



꺼진 냉장고가 내게 말해줬다. 분별없이 적재하는 공간으로 사용하지 말라고. 소진하고 신선하게 채우는 법을 익히라고. 내게 묵혀있는 때같은 것들이 뭐가 있을까. 무엇을 더 버리고 채우지 않아도 되는 여백으로 둘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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