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실레책방 어선숙 님
점심을 너무 여유롭게 먹고 난 오후 시간이었다. 그 덕에 기차 예약 시간에 쫓기어 실레책방으로 가는 길을 서둘러 올랐다. 그런데 마을 입구에서 실레책방을 마주하고는, 그냥, 그냥 마음이 좋아서 멈춰 서 있었다. 그저 아담하고 정겨운 그 느낌에 이끌리어 책방 안으로 들어섰고, 그러곤 채 몇 분 안되었는데 우리는 서로 눈빛 교환을 했다. ‘여기야, 여기!’라는 싸인이었다.
마당부터 코스모스와 맨드라미의 환영을 받았고, 몇 개의 방으로 나누어진 내부 공간은 시선이 머무는 구석마다 책방지기의 마음이 느껴졌다. 특히 돌담 창가는 자연광 보정 효과가 돋보이는 스튜디오였고, 마당 창가 테이블은 기약 없이 앉아서 꽃멍, 하늘멍, 책멍하며 머물고 싶은 그런 곳이었다. 이렇게 따뜻한 느낌의 공간을 왜, 어떻게 꾸리고 계신 건지가 너무 궁금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마을 책방지기 어선숙입니다.
춘천의 시골마을에서 작은 책방을 하고 있습니다. 몸으로 종이책을 경험하는 따뜻한 공간,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열린 공간을 제공하고 싶고 또 이 실레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아카이빙하고 전하는 커넥터 역할을 하며 사회에서 작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니어로 살고 싶은 소망을 가진 어선숙입니다.
실레책방에서 멍중 단상과
꿈꾸던 책 읽기를 누리고 있어요.
저는 운 좋게도 이 동네에 집을 지어 살고 있고, 아침 10시면 걸어서 책방으로 출근합니다. 책방에 들어와 불을 켜고 음악을 틀고 환기를 하는 동안 정원에서 차 한잔을 내려 마시며 본격적인 책방지기로서의 일과를 시작합니다.
구입한 책들 먼저 정리를 하고 인스타 구경이나 업로드를 하며 오전 시간을 보냅니다. 방문객이 적은 아침시간에 저는 정원을 감상하기도 하고 멍해 있기도 하는데요. 특별히 무엇을 생각하지 않아도, 무엇을 하지 않아도 좋은 그런 시간을 저는 어려서부터 참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시간을 통해 저를 정리하고 계획할 수 있거든요. 그 시간 중 떠오른 생각들 중에서 ‘이게 될까?’ 하는 것들을 골라내어 실행하곤 합니다. 이상하게도 집에서는 그런 시간들이 좀처럼 나지 않더라고요. 해야 할 일, 치워야 할 것들, 먼지들이 보여서 혼자 있음에도 이런 시간들이 잘 주어지지 않죠. 반면, 이 곳 책방에서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갖게 되어 참 좋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꿈꾸었던 책 읽기를 이곳 실레책방에서 누리고 있어요. 어렸을 적에는 책 읽을 기회가 넉넉하지 않았어요.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도 오래된 책들이 주로 많았어요.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집이 부의 상징이기도 했죠. 어쩌다 그런 집 친구가 생기면 그 애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저와 같은 지금의 50~60대는 그렇게 책에 대한 갈망이 많은 세대예요. 월급 타면 전집부터 사고 그랬죠. 그렇게 책에 대한 향수가 있어서 늘 마음속에 ‘나중에 책방 해야지’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책방을 구상하면서는 독립서점이나 동네책방을 많이 돌아다니고 엿보면서 준비했고요.
작년(2019년)에 ‘지금 여기서 더 늦어지면 용기가 사라질 것 같다’는 느낌에 가족들에게 퇴직을 선언하고 이 자리에 실레책방을 열었어요. 그리고 직업인으로 살던 젊은 시절에는 충분히 읽지 못했던 책들, 도구적으로만 접근했던 책들 외에 다양한 책들과 이곳에서 만나고 있어요. 책 읽다가 졸고, 접어 뒀다가 다시 읽고 하는 그런 꿈 꿨던 책 읽기를 지금 여기서 누리고 있어요.
무작정 촌집을 찾아달라고 했어요.
제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촌집이요.
50대, 과로로 건강의 위기가 왔다고 느꼈을 때 더 이상 아파트에서 살면 안 될 것만 같았어요. 사무실 창 밖 목련이 피고 지는 것도 알지 못한 채 분주하게만 살아갔던 그때, 아파트에서의 규격화된 삶이 나를 죽어가게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래서 부동산중개소에 대뜸 ‘촌집’을 구해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이 집 저 집 가보는 비교도 없이 (지금은 실레책방이 된) 이 집을 샀어요. 당시에는 폐가 같았던 이 집을 주말마다 남편과 함께 치우고 정리하며 가꾸어 갔어요. 지나고 보니 그 시간들이 제겐 휴식이고 회복의 시간이었네요.
그러고는 얼마 후 남편이 해외 파견 근무를 나가게 되었는데, 전 그 때 아파트를 팔아 버리고 집을 이곳으로 옮겨 3년을 이 공간에서 혼자 살았어요. 어쩌면 제가 욕심이 없어서 집을 구하고 이주를 하는 그런 결정을 남들보다 짧은 시간 안에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할까 말까 고민하는 데에 시간을 더 많이 쏟잖아요. 저는 어려서부터 무엇을 결정할 때에는 이것이 내게 필요한지, 이 시간들이 나에게 지금 도움이 되는지를 우선으로 판단했던 것 같아요. 저의 결정을 전적으로 믿어주는 가족 덕분이기도 했네요.
책방의 콘셉이요?
만만함이 주는 편안함 같아요.
작년에 이곳에 책방을 열기로 결심하고 나니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그래서 집 모양대로 책장과 책상을 배치하였지요. 마음속 바램은 넓고 단순하고 트인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지만 이 공간의 생김이 그걸 이루기엔 어려웠고, 대신 누구든 구석진 자리에서 잠시라도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길 바라는 마음에서 좁은 공간마다 의자를 두었어요. 공간이 채워지고 보니, 약간 불편하지만 만만한 것이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요소가 된 것 같아요.
우리 책방에서는 김유정 문학마을의 특성을 살린 주 2회의 ‘김유정 책 읽기 모임’이 정기적으로 진행되고 그 밖에 춘천 관련 세미나, 영화보기 등을 하고 있어요. 또 지난 겨울과 봄, 마을 분들 몇분 그리고 지인들과 스마트폰으로 주 1회씩 세 달 동안 마을 사진 찍기를 한 후 그 결과물을 가지고 책방 담벼락에서 ‘마실 사진전’을 했었어요. 소박했지만 좋은 기억이에요. 기회가 된다면 사진 크기나 프레임을 좀 더 근사하게 하여 조금 업그레이드된 마을 사진전을 하고 싶습니다.
올해는 마을의 뜻있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토요일 아침마다 마을 옛길 걷기 모임을 운영하고 있고, 또<실레마을지도>를 같이 만들고 있습니다.
책방을 하기 전에는
마을 기자가 되어 마을과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했어요.
10년 전 이 촌집을 구했을 때는 이곳이 참 작고 아담한 마을이었어요. 그런데 이후 굉장히 빠르게 마을 모습이 바뀌어가는 게 보이더라고요. 오가며 보았던 정감 있는 돌담이 하루아침에 허물어지기도 하고 좁은 길이 도로로 덮어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가 보았던 마을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놓고 싶었어요. 우선, 뜻을 같이 할 것 같은 몇 분을 찾아가 마을 신문을 만들자고 제안드렸죠. 그분들과 함께 가가호호 찾아다니며 취재를 해 마을 신문을 만들었는데 마을분들이 너무 좋아하시고 또 저를 늘 환영해주셨어요. 글을 읽을 줄 아는 어르신들은 “너무 잘 읽었다”라는 응원을 보내주셨고, 글을 읽지 못하는 어르신들조차도 “저이가 우리 마을을 위해 애쓰고 있네”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 과정에서 제가 도리어 마음의 큰 힘을 받았고, 이방인이었던 제가 이 마을에 스며들 수 있었던 길이었던 같아요.
이 마을이 대략 200가구 정도 되는데요. 마을 소식 취재하고, 편집하고, 인쇄하고, 배달하며 약 20호까지의 마을신문을 만들기까지 그 과정이 너무 즐거웠어요. 동네 마을 잔치를 취재하기도 했고 청년들 밤새 기다려서 인터뷰하기도 하면서 이 마을과 마을 분을 더 잘 알게 되었죠. 그때 표지 모델을 해주셨던 어르신 중 이제는 소천하신 분들도 계시는데 가족 분들은 그 신문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해 주시겠지요. 나중에는 제가 마을 분들께 인사드리며 “저 마을기자 했던 어선숙에요” 하면 “아~” 하고 다 알아봐 주시며 소식을 먼저 알려주시곤 하였죠. 참 감사하죠. 우리 책방에 있는 책 중 <사랑은 내 시간을 내주는 것이다>라는 책이 있어요. 제목을 보고 들여놓은 책인데, 마을기자로 보낸 그 시간 동안 저와 마을 분들이 그런 사랑을 한 것 같아요. 2년 동안의 마을 신문 만들기는 마무리했고 요즈음은 마을지도를 만들고 있어요. 2020년이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되겠지요.
실레마을 걷기 여행 코스를 소개하고 싶어요.
마을을 조사하며 느낀 건 이 곳이 김유정 문학마을로 알려져 있어요. 김유정 작가를 너무 좋아하고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하지만 의도치 않게 김유정이라는 존재에 의해 이 마을이 잠식되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저는 마을의 역사, 전설들을 중심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그 첫 번째가 다섯 개의 마을길 만들기입니다.
첫 번째 길은 '백두고개 길'이에요. 이곳은 동학의병의 활동지였던 곳으로 한 번도 패전한 적이 없는 곳이죠. 나라를 지켜냈던 지역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두 번째는 '새고개 길'이고요. 글 배우는 것이 귀하던 시절에 춘천초등학교를 다닌 아이든 달랑 2명이었데요. 걸어서 2시간 거리였던, 지금 춘천 세종호텔 자리인 신사에 가서 참배를 하고 공부를 했대요. 아무나 학교를 다닐 수 없었던 시대였죠. 그러다 김유정 야학이 열렸고 초등학교가 생기니 산 넘어 아이들이 먼 길을 걸어 공부를 하러 오기 시작했어요. 그들이 오가던 그 산길이 ’ 새고개길‘이에요. 지금 어른 걸음으로 걸어보아도 1시간 반은 족히 걸리는데 그 시절 아이들은 30분 걸렸다고 하니, 배움을 갈망하며 뛰어오 가던 아이들 모습이 상상이 가지요? 그 아이들이 지금은 60대가 되어 아직도 이 마을에 살고 계세요.
세 번째는 '문학터 길'입니다. 문인들이 김유정을 기려서 16개의 길 지명을 만들었고 그중 6개가 마을 안쪽에 있어요. 그것을 연결해 '문학터 길'이라고 불렀어요.
네 번째는 '두 개의 샘 길'이에요. 원수돌샘과 담 안에 샘은 수도가 없던 시절 마을의 생활식수였는데 아름다운 전설도 있어요. 이곳과 실레공소를 엮은 길이죠. 은퇴 후 실레마을 공소에서 지내셨던 장익 주교님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어 교사로 알려진 분인데, 교황청 종교 대평화 의회 의원, 한국 천주 교주 교회 의장도 하셨던 분이라고 해요. 항상 검소하게 생활하며 신자들과 함께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셨던 모범적인 분으로 알려져 있죠. 현대의 그분의 이야기도 이 곳 실레마을의 소중한 이야기라 포함되었죠.
다섯 번째는 '예술촌 길'이에요.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예쁜 걷는 길인데 그 길에는 책과 인쇄박물관, 함섭 화가의 스튜디오, 수채화, 민화, 도예작가의 작업실 등을 기웃거려 볼 수 있는 길이지요.
앞으로의 실레책방은
프랑스의 철학카페 처럼 되었으면 좋겠어요.
프랑스의 철학카페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시니어분들이래요. 아이들은 함께 자리하여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인생에 대해 배우죠. 이곳 실레책방을 그런 철학에 대한 나눔이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게 제 꿈이에요. 얼마 전, 춘천문화재단 주최의 <도시가 싸롱>이라는 프로그램에 ‘인생싸롱’이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해서 함께 했어요. 어르신들이 당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 이에 관심 있는 누구나 모여 이를 듣고 서로 나누는 프로그램이었죠.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지만, 이후 여건이 되면 이 ‘인생싸롱’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어요.
어르신들 섭외를 어떻게 했냐고요? 예상하신 대로 쉽지는 않았어요. 누군가의 앞에서 마이크 잡고 얘기할 기회가 대부분 없었으니까요. “어르신, 어르신의 인생 이야기를 해 주세요”라며 섭외하면 대부분 “나는 배운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다.”며 거절하세요. 그래서 어르신들께 딱 10분씩만 이야기를 들려주시길 청하며 모셨고 연령대 별로 주제를 제안드렸어요. 예를 들어, 80대 분들께는 6.25 시절의 삶과 마을 이야기, 70대 분들께서는 새마을운동 이야기 이렇게요.
그 덕분에 어르신들이 당신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편하게 나누어주셨고요. 8번을 진행하고 모인 마지막 시간에는 그 동안 모셨던 여덟 어르신과 모두 함께 모여 서로의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를 해드리고 있더라구요. 그 순간을 기억하면... 아직도 울컥할 정도로 그 시간이 소중했고 감동적이었어요.
누군가 춘천에서의 삶을 꿈꾸고 있다면
삶의 질을 유지하려면 일의 방향과 속도가 중요하잖아요. 또 그런 것을 용인할 수 있는 환경 속에 있어야 하고요. 소박하게 살고 싶다면 소도시인 춘천이 좋은 점이 많아요. 이 곳에서의 삶을 꿈꾸고 있다면, 반드시 우선 실행을 해 보시길 권해요.
실레책방에 처음 방문했던 그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책방지기님은 기차 시간에 쫓겨 1시간 만에 아쉬움을 안고 책방을 나서는 우리를 문 앞까지 배웅해 “쉬고 싶을 때, 언제든 또 오세요”라고 인사해주셨다.
"쉬고 싶을 때면 언제든 오라"는 그 말이 마음에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일상에서 일이 나를 쫒는지, 내가 일을 쫒는지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숨 가쁠 때가 있다. 그러다 지쳐 쉼이 필요하면 이 곳을 찾아오라는 그 인사는지친 일상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나올 수 있는 탈출구가 되어 주었다. 그 탈출구의 존재 덕분에 나는 이후 일상을 좀 더 힘 있게 살 수 있었다. 제한된 공간과 환경 안에서 버티고 버텨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살 때의 피로도와, '힘들어지면 거기 가서 바람 쐬고 오면 되지~'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때의 마음의 힘은 차이가 컸다. 한술 더 떠, 가까운 친구에게 “너 지치고 힘들면 말해, 내가 좋은데 데려가 줄게”라는 너스레도 떨었다.
이렇게 마음의 힘을 주는 공간과 삶, 어떻게 가능했을까? 얼핏 보면, 책방지기님이 운이 좋은 사람이라, 촌집도 쉽게 구하고 마을기자 활동도 하며 어디를 가던지 환영을 받았다고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그 행운은 그의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곳을 잠시 스쳐가는 경유지가 아닌, 삶의 터전으로 삼고 뿌리내리려 했던 진실한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마을과 이웃들의 현재를 기록하고, 그것을 신문, 사진전, 인생싸롱으로 나누었고, 마을이 가진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누리도록 열어주는 <실레마을지도>를 만드는 일로 이어졌다.
나는 실레책방을 ‘많은 이들의 이름이 귀하게 여겨지는 곳’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모두의 삶은 참 귀하다”는 인생에서 아주 기본적이고 중요한 진리, 그럼에도 자주 간과되곤 하는 그 진리를 지켜내며, 누구든 따뜻하게 바라보고 위로하는 그런 시간들이 이 곳에서 계속 펼쳐질 것 같은 예감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적 소망을 더하자면, 그 시간들이 이 곳에서 넘쳐 사회 곳곳으로 흘러갔으면 좋겠다.
정리 by 함성
사진 by 프로젝트 올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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