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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할 수 있는 것을 그냥 해보자, 그렇게 살아요.

춘천 노을집 주인장 김은영 님

춘천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구봉산. 전망 좋은 카페들이 즐비한 큰길을 벗어나 산자락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들어가니 작은 마을이 나왔다. 그 안에 자리 잡은 작은 2층 집. '노을집'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집에 들어서니 따뜻한 공기가 확 느껴졌다. 그리고 이 노을집의 주인 김은영 님이 밝은 웃음으로 맞아주었다.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집 안 소품과 가구들, 식기들 하나하나에 김은영 님의 취향을 엿볼 수 있었다. 집과 사람이 참 닮았구나. 


점심이 좀 지난 시간이었고, 얼른 인터뷰를 시작하려 하였는데 은영님이 준비해주신 '올챙이국수'를 먼저 대접받았다. 춘천 육림고개에 위치한 참 오래된 올챙이 국숫집이 있는데, 면이 올챙이처럼 똑똑 떨어진 것 같은 모양으로 생겼다. 주인 할머니의 특제 소스와 김치까지 함께 하니, 분명 점심을 먹고 왔는데도 술술 들어갔다. 


이렇게 함께 올챙이국수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김은영 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저는 노을집 주인장
'김은영'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곳 노을집의 주인 '김은영'이라고 합니다. 닉네임 '오늘'로 불리고 있어요. 동시에 직장인이기도 하고 두 아들의 엄마이기도 하고 동네 그림 작가이기도 해요. 이 노을집은 살고 있는 집과는 별개의 저만의 공간이에요. 춘천에서, 이 곳 노을집에서 다양하게 제가 하고 싶은 것들을 그냥 다 해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노을집에서 만난 김은영 님

저는 평일과 주말이 많이 다른 생활을 하고 있어요. 평일의 제 일상은 비슷해요. 지금 분당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는데요. 출근해서 업무 하고, 거래처 만나고, 퇴근 후 이 노을집에 들러 잠시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갑니다. 


주말에는 최대한 노을집에 있으려고 해요. 여기서 그림도 그리고, 노을도 보고, 차도 마시고요. 지인들이 들리면 자연스럽게 홈카페가 되지요. 최근에는 달리기도 시작했어요. 제가 열이 참 많은 사람이었더라고요. 그래서 달리면서 풀고 있어요. 춘천 러닝 크루에서 활동하고 있고요. 오늘도 8km 달리고 왔어요. 소양 1교를 시작해서 3교까지 소양강변을 돌아오면 8km 정도 돼요. 오늘은 아침에 서리가 앉았더라고요. 뛰면서 매일 보던 곳이 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이 참 좋아요. 


춘천에 내려와 가지게 된
치유의 시간


춘천에 온 지는 10년이 다 되어가요. 그 전에는 분당에 살았었고, 아이들 잘 키우고, 일 잘하는 것에만 신경 쓰면서 살았어요. 그 당시에는 아이 낳고도 한달 만에 회사 출근할 정도로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탁'하고 놓아졌어요. 번아웃이 왔던 것 같아요. 병원을 갔고, 우울증이 심하게 온 것 같다는 진단을 받았죠. 무작정 회사를 그만두고 부모님께서 노후를 보내기 위해 준비해두셨던 춘천 변두리 시골마을에 위치한 집으로 아이 둘을 데리고 왔어요. 


그런데 시골에 내려오고 정말 많이 변했어요. 예전이면 10분 거리도 걷는다는 생각을 못해봤는데, 아이들을 이곳 학교에 보내고 제가 일을 쉬며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게 되니, 학교에서 집에 오는 길에 아이들과 걷고, 길에서 곤충도 보고, 자연도 보고요. 저도 그랬지만 아이들에게도 치유의 시간이 된 것 같아요. 특히 첫 아이에게는 미안했거든요. 그전까지 무작정 학원을 보내고 막 쫓기듯이 키웠으니까요.



인터뷰가 진행되었던 노을집 2층 전경


아이들의 배움을 고민하며
내가 성장한 것


1년을 아이들과 그곳에서 보내고 나서는, 춘천으로 온 가족이 자리를 잡게 되었어요. 이곳 춘천도 분당과 학구열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들 서울 살다가 어릴 때 좀 한적한 데서 키워보자 하고 내려왔다가 중학교 갈 때쯤이면 다시 서울로 가는 패턴이더라고요. 아이들 교육이라는 것이 나만의 입장이나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아잖아요. 제가 아이들에게 '꼴찌해도 괜찮아. 자존감만 낮아지지 않으면 괜찮아'라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주변 친구들, 그 엄마들의 영향을 받는 거예요. 


그래서 큰 애 4학년 때, 둘째는 1학년부터 대안학교를 보냈어요. 하지만 대안학교도 무엇에 대한 대안인가가 중요하더라고요. 학교의 프로그램에 대한 여러 견해의 차이로 같이 학교를 보내던 10 가족과 세 분의 선생님이 학교를 나왔습니다. 아이들을 놀게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때 부모님들과 선생님들과 함께 홈스쿨링을 시작했어요. 학교 공간이 없으니 저희 집에서 아이들 13명이 함께 수업을 하게 되었어요. 그때만 해도 아이들이 어렸으니까요. 방 세 개 우리 집이 학교가 된 거죠. 그러다 아이들도 크면서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되었고, 함께하는 부모들과 땅을 사고 건물을 지어 진짜 학교를 세웠습니다. 무슨 거대한 뜻이 있다기 보단, 아이들을 위해서 하나하나 하다 보니 그냥 힘든줄 모르고 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함께 했던 가족들이 후원하고 서로 돕고 지내요. 


인터뷰가 진행된 2층에 놓인 큰 테이블이 그 당시 아이들이 공부했던 책상이라고 한다


대안학교를 함께 만드는 일을 하면서 '같은 목표를 가지고 모였지만 이렇게 다 다르구나' 느낄 수 있었어요. 그런데 힘들어도 이야기를 다 듣고, 최상의 의견을 내는 과정, 원점이 된다 하더라도 멈추지 않고 계속 대화하면서 해결점을 찾아가는 것을 경험하면서 내가 성장한 것 같아요. 결론이 다르더라도, 또 이 과정을 잘 보내면 다시 좋은 결론을 낼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각자의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에 대해 배웠어요. 그래서 학교 이름도 '서로의 다름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다인학교'라고 지었죠. 그러면서 저 스스로도 '나도 남들과 다른데, 왜 똑같이 살려고 했지?' 이런 생각을 했어요. 


드로잉을 통해 배운
혼자 시간을 보내는 용기


5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일상이 안정이 되었다 생각하는 시점에 복직을 하였어요. 직장이 멀다 보니 직장 근처에 숙소를 하나 두고 평일에는 그곳에 머물며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게 됐어요. 그러면서 다시 직장에서 업무 스트레스로 나를 조이니까 데자뷔처럼 몸이 다시 아프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페이스북에서 분당에 있는 드로잉 클래스를 하나 보게 됐어요. '5주만 하면 당신도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하더라고요. 퇴근해서 혼자 있으려니 심심하고, 밑져야 본전이다 마음으로 신청을 했죠. 다섯 번에 뭘 해볼 수 있으면 뭐,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했어요. 드로잉 선생님이 계속 그림을 잘 그리라는 얘기보다 '그냥 그리세요. 그리고 그 순간을 즐기세요'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림이 그리는 시간이 나에게 주는 의미와 내 모습에 집중하는 재미를 알게 해 준 분이에요. 


노을집 책상 위에 놓인 드로잉을 위한 다양한 색깔의 물감들


클래스 5주 이후에는 그냥 독학으로 했어요. 그리고 싶은 것들도 관찰해보고 그려보기도 하면서요. 카페에 가서 커피를 시키고 아무도 신경 안 쓰니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내고 그 시간을 보내면 뭔가 남고... 

이 경험을 하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더 이상 어색하거나 외롭지 않더라고요. 너무 재미있고 도전하게 되는 시간이었어요. 예전에는 해보고 싶은 거, 가보고 싶은 데가 있으면 가족이건 친구이건 연락해서 "나 이런데 알고 있는데 같이 해볼래?" 하고 꼭 누군가와 같이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런 시간이 쌓이면서 혼자 하는 것에 대한 용기가 생겼고, 그 시간들이 제 취향으로 쌓인 것 같아요.


취향을 통해 연결된 춘천의 친구들,
그리고 노을집


드로잉 취미가 생기고 나서 춘천의 골목의 모습을 그리곤 했는데, 이 때 춘천에 대한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소품샵 '춘천일기'를 운영하는 정혜씨를 알게 되었어요. 정혜 씨가 제가 그린 골목과 거리 풍경 그림을 엽서로 만들고 싶다고 했고, 저에게 '동네 작가 1호'라는 부캐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또 다른 세계가 열리더라고요. 


춘천을 삶의 터전으로 정하고 오는 젊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춘천일기 정혜 씨도 그렇고, 옥천동 스페인식당 아워 테이스트도 그렇고, 춘천에 놀러 왔다가 춘천의 공기에 반해서 춘천에서 자신의 취향을 기반으로 무언가를 해보려는 친구들이요. 제가 처음 춘천 내려왔던 10년 전만 해도 로컬, 취향 이런 단어 없었잖아요. 춘천이라는 로컬에서 제가 경험하지 못했던 그들만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젊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니 얼마나 좋아요.


춘천의 다양한 골목길과 풍경을 그린 그림엽서들


이 노을집도 원래 집주인이 정혜 씨였어요. 종종 이 집에 들러 창 밖으로 노을 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던 것이 큰 낙이었는데, 이 집을 내놓게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이 공간이 그대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고민을 했어요. 마침 그림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하면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곳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구요. 그래서 이 공간을 운영하게 되었어요. 


처음 이 공간을 한 공유 플랫폼을 통해 '홈카페' 콘셉트로 다양한 사람들의 방문을 받아보았어요. 근데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에게 맞춰 공간과 시간을 세팅하는 것이 참 어려웠어요. 자기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콘텐츠가 단단하지 않으면 정말 어렵구나 느꼈어요. 그래서 요즘은 타깃을 더 명확하게 정하고 열고 있어요. 그러니까 더 편해지고 재밌어지더라고요. 


되도록 지인들을 중심으로 해서 간헐적으로 주말 아침 홈카페를 열어요. 그리고 지난 10월에는 10명의 지인만 초대해서 얼마전 춘천에 터를 잡은 싱어송라이터 밴드인 하이하바, 코스모스앤로즈와 함께 '노을집 일공10음악회'도 열었어요. 지금은 그 만남이 또 새로운 계기가 되어 하이하바 선생님께 매주 보컬 트레이닝을 받고 있어요. 트레이닝이라기보다 내 목소리를 내가 들어보고, 내 말을 나 스스로 들어보는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쑥스럽지만 또 참 잘한 일 중에 하나예요.


닉네임 오늘,
오늘을 잘 보내자는 생각


어느 날 TV에서 목발을 짚으면서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을 보다가 갑자기 마음에 뭔가가 확 와 닿았어요. '이건 뭐지, 나도 답답한데 달려볼까' 그래서 인스타그램으로 #달리기 검색하다 춘천 러닝 크루를 알게 되었죠. 그래서 가입하고 첫 모임에 나가보았어요. 그야말로 그날 정해진 거리를 달리고 헤어지는 모임인데 함께 페이스 같이 맞춰 달려주는 크루가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되었어요. 처음엔 사람이 어떻게 4km를 쉬지 않고 뛰지 했는데, 지금은 8km 도 거뜬히 뛰어요. 70살이 되었을 때, 풀 마라톤 한번 뛰어보는 게 꿈이에요. 


노을집 공간을 운영하면서 처음으로 삽 사다가 제가 땅을 파서 나무를 심고, 모닥불도 직접 피우고, 바베큐도 직접 굽고요. 예전에는 이런 일들을 다 왜 남자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어요. 달리기, 드로잉, 보컬 트레이닝, 사람들을 공간에 초대해 만나는 거, 그리고 해금도 배우고 있어요. 이것저것 다 해보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일단 시작해봐야 아는 거죠. 해보지 않으면 모르고 살았을 것들을 만나가는 거죠. 


구봉산에서 바라본 춘천의 노을 풍경


나이가 들면서 내가 변해야 주변이 달라지는 걸 조금씩 알게되어 가는 것 같아요. 늘 했던 것을 안 해보기도 하고, 해보기도 하면서... 이젠 꾸준히 하면 무엇이든 바뀐다는 것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생겼어요.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시작한 것에 대해 끝까지 해보는 끈기같은 것도 느는 것 같아요.  


'언젠가는'이라는 생각을 하며 하루를 견디었던 것에서 '오늘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바뀌었어요. 어떤 날은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엄청 받고 오기도 하는데요. 지금은 그런 날은 나를 위한 선물을 주기도 해요. 와인 한잔 따르고 안주도 예쁘게 준비해서 예쁘게 나를 위해 차리는 거죠. 


예전엔 퇴근길에 맥주 한 캔, 소주 한 병 사다 먹으며 스트레스를 풀었던 것이 선물인 줄 알았지만 선물이 아니었어요. 그건 내가 나를 너무 불쌍히 여겨서 따라 마시는 술 같아요. 그런데 이제는 많이 먹지 않더라도, 선물처럼 느끼고, 또 내일을 위해서 기꺼이 술잔을 멈출 수도 있게 되었어요. 


오늘 하루 잘 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제 닉네임도 '오늘'입니다. 





2시간 정도 예상했던 인터뷰가 마치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를 만나 수다를 풀어가듯 무려 4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인터뷰를 마치니 2층의 큰 창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왜 이 공간의 이름이 '노을집'인지 알 수 있었다. 은영님에게 마지막 질문으로 혹시 자신의 삶과 생활을 주제로 책을 쓴다면 제목이 무엇이 될 것 같은지 여쭤보았다. 대답은 "적령기는 있을까" 4시간 동안 들었던 은영님의 이야기와 찰떡인 제목인 것만 같다.


노을집 '오늘'님이  프로젝트올라운드에 남긴 메시지


2층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은영님이 우리를 기다리며 남겨두신 메시지를 보았다. 메시지와 더불어 긴 시간을 지나 지금의 노을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모닥불을 피우고, 달리는 은영님을 보며 큰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여성으로, 직업인으로, 엄마로 성장해 나가고 있는 나에게 좋은 레퍼런스가 되어주는 선배와 마음 편안하게 들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났다는 것이 깊은 여운과 위로를 남겼다. 


정리 by 생강
사진 by 올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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