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소유 Jul 12. 2024

취한 밤


  나의 결혼식 날이었다. 나도 모르게 실실 웃고 있었는지 보는 사람마다 입 좀 다물라고, 그만 웃으라고 했다. 오직 나의 결혼을 축하하러 와준 친지와 친구들 앞에서 스포트라이트 받는 주인공이 되었다는 흥분감이, 떨리는 마음을 가뿐히 눌러버렸다. 긴장되기보다 가슴이 너무 파인 드레스가 불안해 신경 쓰였다. 그 정도였다. 신랑의 회색빛 예복은 그에게 잘 어울렸고 멋져 보였다. 식은 순식간에 끝났고 폐백까지 마친 뒤 같은 건물 꼭대기 층에 있는 식당으로 올라가 손님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렸다. 마지막으로 신랑 친구들이 모여있는 식장 근처 식당을 찾아갔고 술이 약한 신랑은 순식간에 술에 취해 뻗어버렸다.


  신랑 친구들 도움으로 택시를 잡아타고 우리 집, 아니 이제는 친정이 될 영도 집으로 향했다. 원래는 식을 마치면 해운대 있는 호텔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발리로 신혼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다. 그런데 신혼여행 가방이 영도에 있는 데다, 이미 그곳에 모인 큰댁 사촌 언니들과 형부들에게 인사하고 가라는 엄마의 당부도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하자 들뜬 잔칫집 분위기가 새신랑, 새신부를 맞이해 주었다. 거꾸로 매달려 발바닥을 맞아야 할 신랑은 여전히 술에 취해 기절 상태로 안방의 부모님 침대에 나동그라졌다. 잔뜩 기대하던 형부들의 기분을 맞춰줘야 한다는 생각을 나는 왜 했던 걸까. 정숙한 신부의 모습으로 다소곳이 인사만 드리고 적당히 분위기만 맞출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그날은 내 결혼식 날이었고. 흥분되기로 따지자면 나만큼 흥분될 자가 있겠는가. 게다가 나도 이미 술이 몇 잔 들어간 상태였으니 말이다.


  인사불성인 신랑을 대신해 형부들과 대작 자리에 앉았다. 부모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인 것도, 고주망태로 마시는 것도 난생처음이었다. 밖에서는 물론 다 해본 일이었지만. 그 정도로 나는 흥분 상태였다. 상황판단이 더딜 만큼 나는 취해있었다. 술뿐만 아니라 어찌 되었든 그날은 '나의 날'이라는 상황에 흠뻑 취해있었던 것이었다. 아버지가 고이 모셔둔 장식장 속 술병들이 줄줄이 연행되었다. 내가 술을 마시는 단계를 지나, 술이 술을 마시고 술이 나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진작에 맛이 갔지만 겉보기에는 멀쩡했는지 형부들은 차례로 나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혀를 내두르며 쓰러져 갔다. 아버지 장식장 속 고이 아끼던 술들은 모두 동이 났고 나는 이날의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여기서 끝냈다면 그래도 새신부가 술꾼이더라, 정도로 비교적 아름답게 덮었을 텐데. 나는 맛이 갔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나의 타깃은 이제 이 대작 사태를 멀쩡한 정신으로 지켜보던 사촌 언니들이었다. 큰댁의 사촌 언니들은 모두 다섯, 딸부잣집이었다. 그중 셋째 언니를 향했다. 내가 6학년 때 대학생이었던 언니는 중학교 입학을 대비해 나에게 과외를 해준 적이 있었다. 공부가 너무 하기 싫었던 나는 언니와의 과외를 그만두고 싶다고 구구절절 쓴 편지를 엄마 보라고 화장대에 슬쩍 올려두었다. 그런데 그 편지를 언니가 우연히 읽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그 일이 여태껏 내 마음에 남았던지 언니를 부둥켜안고 미안하다며 꺼이꺼이 울어댔다. 다음 차례는 옆에 앉아있던 다섯째 언니. 어릴 적 큰집에 놀러 갔을 때 언니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봤다고 고해성사했다. 언니는 아마 알았을 것이다. 어느 날 펼친 자신의 일기장에 딱 봐도 초등학생이 적은 걸로 보이는 꼬리말이 일기 곳곳에 적혀있었으니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을까. 술에 취한 새 신부의 뜬금없는 고백에 언니는 몇십 년 만에 다시 황당했으리라.


  대미의 장식은 엄마였다. 고해성사는 없었다. 그냥 엄마를 부둥켜안고 펑펑 울며 미안해요, 미안해,라는 말이 다였다. 한참을 그리 꺽꺽대며 울었다. 뭐가 그리 미안했을까. 결혼식 내내 환하게 웃고 있는 내 모습과 대비되게 창백하고 굳은 얼굴로 혼주석을 지키던 엄마의 모습이 신경 쓰여서였을까. 아니면 결혼식 전날까지 엄마에게 짜증을 부렸던 내가 미안해서였을까. 결혼식 전날 밤 남동생의 여자친구이자 곧 올케가 될, 하지만 아직은 어색한 사람과 내 방에서 같이 자라는 엄마의 말에 화가 났다. 내가 결혼하는 전날까지도 엄마는 딸만을 오롯이 위해주지 않는구나 싶은, 나의 속 좁은 마음에서 나온 짜증이었다. 그날 밤을 그렇게 보내서 미안했을까. 아니라면 결혼이란 것이 우리의 마지막도 아닌데 어쩐지 자꾸만 마지막 같아서, 그것이 서글퍼서였을까.


  자정이 다 되어 형부들이 뿔뿔이 각자의 집으로 실려 나갔다. 마침내 쓰러진 새신부는 혼자 맨 정신으로 깨어난 새 신랑에게 기댄 채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예약된 호텔로 향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쓰러지고 싶었지만, 온종일 신부 머리 구석구석에 박혀있던 수십 개의 실핀들이 이제 우리 차례라며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너무 일찍 인사불성이 되었던 죄로, 밤새 내 머리카락 속에 숨은 실핀을 찾아 빼느라 여념 없는 이 남자와 이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속 깊은 곳에서 메슥거림과 함께 신물이 올라왔다. 마침표를 찍듯 쏟아낸, 취한 밤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버리는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