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책과 졸지에 버려진 책
도서관을 뒤져보면 그곳이 온통 파묻어 놓은
보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된다
- 버지니아 울프-
최종 폐기 도서 목록이 작성되어 담당 선생님에게 인계되었다. 학교 운영위에서 도서 폐기에 대한 승인이 났으니 학교의 한 학기 및 한 학년을 마무리할 12월 어느 날에 책들은 모두 정리가 될 것이다. 진작에 폐기를 위해 서가에서 서고로 옮겨졌고 내가 근무를 시작하면서 폐기 도서 목록을 위한 바코드 등록 작업이 착착 진행되었으면서도 아직은 먼 훗날의 일일 것만 같았는데 모월 모일로 디데이가 잡히고 나니 기분이 이상하다. 그 디데이가 내가 이 학교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마지막 날이라서 그럴까.
폐기선고를 받은 책들은 더는 본인의 쓸모를 증명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차갑다 못해 싸늘한 서고 공기의 날카로운 감촉을 버티며 숨죽이고 있다. 여름에는 습기를 머금어 무겁게 축 처진 공기가 가득했으나 때때로 에어컨의 가차 없는 냉기를 피하는 쉼터가 되곤 했는데 겨울의 서고는 달랐다. 문을 열자마자 훅 끼치는 냉기가 서고에 한 발작도 들여 넣기를 꺼리게 한다. 겨울이니까 그런 것임을 알지만 어쩐지 책들이 마지막으로 뿜어내는 사늘한 존재감만 같다.
이 냉기 가득한 서고에서 긴 시간 폐기 책들과 벗을 해주는 분이 있었다. 예의 책을 사랑하는 수녀선생님이다. 수녀선생님은 책들이 곧 폐기된다는 소식을 듣고 담당 선생님의 허락 하에 폐기 책들을 살펴보러 자주 들렀다. 한 날은 학생들 세특을 쓰다가 머리가 지끈거려 잠시 쉴 요량으로 들렸다고 했다. 서고로 직진해 한참을 그 안에서 시간을 보내고는 양팔 가득 책을 안고 나왔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책을 안은 수녀선생님의 웃음 가득한 표정이 귀여워서다. 순수한 책사랑에서 뿜어 나오는 그 말간 기쁨이 나에게도 절로 전염되었다. 수녀선생님은 골라오신 책 한 권 한 권을 펼쳐 보이며 이 책들을 살리기로 선정한 이유를 들려주었다. 본인의 종교와 관련된 책도 있고 그밖에 다양한 분야의 책이었다. 내가 느낀 수녀선생님의 인상처럼 그 책들도 다 수더분하고 착할 것만 같다. 함께 들어다 드리겠다는 내 말을 사양하고 도서관을 나서는 수녀선생님의 양팔은 무거울지언정 두 발은 썩 가벼워 보였다.
디데이날. 제시간에 출근하고 보니 벌써 폐기도서들이 폐지가 모이는 운동장으로 운반되고 있었다. 도서관 담당 선생님을 필두로 미술 선생님, 아르바이트로 지원 온 대학생들과 3학년 학생 여럿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원 온 대학생이 남학생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도 서둘러 가방을 내려놓고 운반에 손을 보탰다. 작업을 시작하고 한 시간이 훌쩍 넘어서 인지 다들 손발 맞게 착착 진행되고 있었고 얼마 후 작업이 얼추 마무리되어 갔다. 점심시간이 되어 선생님들이 도움을 준 학생들과 아르바이트생들을 데리고 점심을 먹으러 갔고 마지막 정리를 내가 맡았다.
급히 마무리하고 가는 바람에 도서관 한 편에는 미술선생님이 폐지 위기에서 건진 수 권의 책들과 아르바이트생이 따로 챙겨둔 해리포터 시리즈와 해외여행서적이 몇 권 놓여 있었다. 식사 후 돌아온 미술선생님은 연식은 오래되어도 읽고 싶었던 책이라며 칼라 도판의 서양미술사 책을 흐뭇한 표정으로 보여주었다. 꽤 낡은 해리포터 시리즈 중의 몇 권과 연식이 오래된 여행서적을 따로 챙긴 대학생을 보며 이제 막 어른이 되었으나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는, 딱 고 나이다운 선택 같아 그 풋풋함이 은근 기분 좋았다.
서고에는 폐기할 책만 있지 않다. 학교 수업에 쓰여서 복권이 많은 책들이 일부 비치되어 있기도 하고, 사전류의 덩치 큰 참고도서도 있고 만화책 같은 비치도서도 있다. 그래서 되도록 헷갈리지 않도록 폐기 도서들만 한쪽 서가로 몰아 혹시 내가 없을 때 폐기하더라도 알아보기 편하게 분류해서 배치한다고 했는데도 착오가 생겼다. 출근 후 바쁘게 움직이는 서고에 들어갔을 때 폐기할 도서가 아닌 비치도서 서가에 책이 하나도 없었다. 이미 폐지 처리장으로 모두 운반이 되었다고 했다. 그 서가에는 만화책이 있었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 <불의 검> 같은 김혜린 작가의 만화 시리즈, 윤태호 작가의 <미생>, 고우영의 <삼국지>와 <수호지>, 미우치 스즈에의 <유리가면> 같은 대가의 만화들이 서가 두 칸에 비치되어 있었는데 싹 다 폐지가 될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이미 늦었다는 담당선생님의 표정을 뒤로 하고 혹시나 폐지가 모인 운동장으로 달려가 미친 듯이 포대를 뒤져 봤지만 일부만 찾을 수 있었고 옮기는 과정에서 파손도 생겨서 끝내 그들을 구출할 수 없었다.
폐기의 대상이 된 책이라도 그 가치를 아는 이들에게는 그 책의 외형이 어떻든 연식이 어떻든 간에 그에게만은 보물이 되는 반면 도서관의 책이 관리해야 할 대상이 되면 책은 그저 시간이 흘러 정리하고 버려야 할 물건이 되고 만다. 누군가에게 가치 있는 책들이 누군가에게는 낡고 오래된 책이었다. 어찌하여 그 책들을, 그냥 낡은 만화책이라 여기고는 고민도 않고 버려버렸는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당연하게도 그이는 관리자였다. 또 한편 생각해 보면 그 책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 없는 도서관 서고에 내내 꽂혀있기만 하는 것 역시 책으로서 더 나은 삶이라 할 것인가 싶었다. 매일이 똑같은 일상 속에서 어느 날 졸지에 폐지 포대 속으로 가차 없이 내던져진 그들에게 그날이 하나의 불꽃같은 이벤트가 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아무 생각 없을 책에 이렇게 내 감정을 실어 토해내는 내가 일종의 도서관 관리자라 할 수 있는 '사서' 일을 잘 해낼 수 있을 것인가. 글을 마무리 짓다가 뜬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답은 사서로서 훨씬 더 많은 경험과 연륜이 쌓인 후에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직은 사서보다 '이용자'의 마음이 더 큰 '준사서'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