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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팬지 Mar 28. 2024

강남건물주도 못 피한 전세사기 여파

나의 멘토 마 여사는 강남 건물주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다가구주택 주인인데, 요즘 전세사기 여파로 애꿎은 마 여사도 덩달아 고생 중이다.


다들 빌라, 다세대 주택 전세 거주를 꺼리는 탓에 원룸 여러 개가 공실인 데다가, 전월세 계약 관련 정부의 규제가 심해지면서, 연세 많은 마 여사가 신경쓰기에는 귀찮은 일들이 부쩍 많아진 것이다.


주위에서 수없이, 이제 그만 골치아픈 다가구 주택을 정리하고 편리한 신축아파트로 가시라고 권유하지만 마 여사는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매달 나오는 월세와, 간혹 재계약할 때 나오는 전세보증금은 연금이나 소득이 없는 마 여사에게는 매우 소중한 “유동성”이었기 때문이다.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그 무거움이, 마 여사가 30여 년의 세월을 견디고 ‘강남 건물주‘가 되게 한 힘이었다.




지역이 지역인만큼, 마 여사네 집에는 다양한 세입자들이 거주하였다. 강남 성형외과에서 일하는 간호사, 대형병원에서 일하는 중국인 간병인, 강남 어학원에서 영어 가르치는 미국인 선생님, 지방에서 상경한 아이돌 연습생, 학군 때문에 전입해온 기러기 모녀, 사업하다가 집날리고 재기하려는 부부 등등.


마 여사는 한 번 세를 주면 좀처럼 세입자들에게 먼저 나가라고 요구하는 법이 없었다. 또 통이 커서 웬만하면 세를 잘 올리지 않았다. 그래서 마 여사의 집에는 전월세 계약을 연장해가며 6년씩, 8년씩, 10년씩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 여사는 세입자가 결혼하면 축의금을 보내주고, 외국인 세입자나 혼자 사는 청년에게는 구정이면 떡국과 김치, 추석에는 송편을 갖다주곤 했다.


주식으로 집날리고 원룸으로 이사와 보험 영업을 하는 세입자에게는 주변 지인들을 여럿 소개하여 매상을 올려주었다. (나도 마 여사님 소개로 실손보험을 하나 들었는데, 혜택 좋은 1세대 보험이어서 매우 감사하고 있다.)


마 여사는 매일 기도할 때마다 세입자들을 위한 기도를 빼먹지 않았다. 같은 장막 안에 거주하는 이들이 다 잘 되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이었다.


얼마 전에는, 8년 전 이사와서 직장다니며 알뜰살뜰 생활하던 202호 아가씨가 좋은 사람 만나 결혼도 하고 집을 사서 나가게 되었다면서 너무 좋아하셨다.


여기서 8년을 살면서 자리잡아 나가는거야.


흡사 결혼 후에 시댁살이 또는 친정살이를 하면서 돈 모아 가지고 독립해 나가는 자식한테 하는 말 같았다.




마 여사는 방이 안나가서 고민하던 중, 202호 아가씨가 나가는 방에 “LH청년전세임대주택”으로 연예인 지망생 아가씨를 들이기로 했다.


하루는 마 여사와 함께 있는데, 내일 이사를 오기로 한 세입자 아가씨 엄마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세입자 엄마) (따지듯이) 도배 장판 비용 중 일부를 저희 딸에게 내라고 하셨다면서요?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도배 비용을 물리는 경우가 어디있어요? 저도 경기도에서 부동산 일을 하면서 원룸 월세를 주고 있는데 그런 경우는 없어요. 그러시면 안되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걸걸하니, 보통 쎈 분이 아니었다. 이미 계약도 했고 내일 이사오기로 한 마당에, 나이드신 마 여사한테 돈 10만원 가지고 다짜고짜 따지는 말투가 몹시 거슬렸다.


아니, 상호 합의한 대로 하는 거지, 집주인이 도배장판 해줘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나?! 마음 같아서는 내가 당장 수화기에 대고 이렇게 맞서고 싶었다.그렇지만 마 여사는 전혀 동요 없이 차분하게 설명을 해나갔다.



(마 여사) 그건, LH에서 도배비용을 25만원인가 주는데 세입자 아가씨가 이미 받아서 다 써버렸다고 하니까, 부동산 사장님이 그럼 집주인이 도배장판 해주는 대신에 아가씨도 10만원만 내라고 말해서 그렇게 하기로 한거예요.


세주고 계시다니 잘 아시겠지만, 요즘 경제도 안좋고 세금이다 뭐다 너무 힘들어요. 저도 30년째 월세 주고 있는데 지금처럼 힘든 적은 없었어요. 원래 과부 사정은 과부가 잘 아시잖아요.


(세입자 엄마) (여전히 흥분한 목소리로) LH에서 도배장판비가 나온다는 말은 처음 들어요…그래도 그렇지, 세입자에게 도배장판 비용을 내라니 말이 안되잖아요!


(마 여사) 사실 저는 LH랑은 계약 안하려고 했어요. 내라는 서류도 너무 많고 귀찮아서…그런데 아가씨가 방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하고, 부동산 사장님도 꼭 좀 해달라고 해서 이번에 처음 계약한 거예요.


그리고 그 방, 작년에 도배장판한 거예요. 깨끗한데 또 해달라고 해서 내가 그랬어요. 어디 땅 파면 돈이 나오냐고.


연예인 지망생이라고 했죠? 안그래도 아가씨가 너무 이쁘고 날씬하더라구요. 뒷바라지 하느라고 엄마가 얼마나 힘들어요? 우리 딸도 예전에 모델 활동하고 그랬어요. 내가 뒷바라지 못한다고 안시킨다고 해도…예쁘니까 길거리 지나다니면 카메라 테스트 하자고 하고, 안시킬 수가 없더라니까요?


(세입자 엄마) (누그러진 목소리로) 네…뒷바라지 너무 힘들어요. 걔가 무용도 하고 운동도 하고, 돈이 많이 들었어요…그런데…참 관리비가 별도 5만원이라구요?


(마 여사) 수도세, 주차비 포함이에요. 저도 건물 청소, 쓰레기 분리수거 해주시는 사장님께도 비용도 드려야하고, 이것 저것 다가구주택 운영하는 데 돈이 많이 들어요. 그리고 여기는 강남이라서 뭐든지 다 더 비싸요. 똑같이 생각하시면 안돼요.


저 그렇게 나쁜 집주인 아니에요. 한번 들어오신 분들에게 나가라고 하지도 않고 세도 잘 안올려요. 이 집에 사시는 분들 위해서 매일 기도하고 있어요. 지금 이사가는 그 방이 어떤 방인지 아세요? 갓 직장에 들어간 아가씨가 8년 동안 살면서 기반 다져서 결혼도 하고 강남에 집사서 나간 그런 방이에요, 그 방이… 이번 아가씨도 우리 집에서 잘되어서 나가기를 바랄게요.


아가씨한테도 내가 그랬어요, 혼자 살면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할머니한테 와서 상의하고 이 집에 사는 동안 그렇게 의지하며 지내라고.


(세입자 엄마) (상냥해진 목소리로) 목소리가 이렇게 젊으신데 무슨 할머니예요?…안그래도 제가 조만간에 서울 올라갈 건데 그 때 한번 찾아가 뵙고 인사드릴게요. 저희 딸 좀 잘 부탁드립니다~~




도배장판비 10만원을 두고 오고간 전화통화를 엿들으며, 마 여사님에게서 진정한 '고수'의 풍모를 느꼈다고 하면 너무 오버일까?


아무튼 전세사기와는 무관한, 마 여사님의 다가구주택 공실이 빨리 나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강남건물주 마여사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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