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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나는 이제 그랑 크뤼

시칠리아의 활화산 포도밭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와인을 고르라면 단연코 바롤로가 맨 먼저다. 이런 바롤로의 명성에 점점 다가서는 와인이 시칠리아에 있다. 바로 에트나다. 벌크 와인의 이미지를 벗어나려는 시칠리아의 노력은 이 에트나에서 결실을 볼 것이다.


지난날 에트나의 융성했던 와인 문화가 필록세라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지만, 21세기 들어서면서 몇 양조가들에 의해 부흥하기 시작했다. 선각자들 중에 첫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은 안드레아 프란케티다. 그는 이미 작고했지만 그의 숨결이 남아 있는 양조장 '파소피샤로'는 이제 개업한지 사반세기가 되었다. 파소피샤로는 현대 에트나의 선구자인 셈이다. 지금은 시라쿠사 인근에서 몬테카루보 양조장을 독립 운영하는 피터 빈딩도 한때 안드레아와 함께 에트나 와인의 비전을 꿈꾸었었다.


KakaoTalk_20250727_180141125.jpg 3300미터를 상회하는 에트나는 고도에 따라 상이한 식물들이 분포한다



파소피샤로의 설립 이후로 여러 신생 양조장들이 에트나 동산에 태어났다. 안드레아처럼 외지인들이 넘어 왔고, 현지인들도 가세했다. 토스카나 남부에서 테누타 트리노로'로 큰 주목을 끌며 일약 최고 수준의 와인으로 등극한 안드레아의 에트나 투자는 양조가들의 야망을 자극했다. 마그마 와인으로 유명한 벨기에 출신 프랑크 코르넬리센도 전입 신고를 했다. 미국으로 이탈리아 와인을 수출하여 크게 성공한 마르코 데 그라치아도 '테누타 테레 네레'를 설립하며 전입해 들어 왔다. 쇼팽을 연구하던 피아니스트 주세페는 아버지 지롤라모 루쏘를 승계하여 더이상 벌크 와인이 아닌 자신의 와인을 양조하기 시작했다. 투자 은행 출신의 알베르토 그라치도 낙향하여 와인 만들기에 나섰다.


마렘마, 몬탈치노에 이어 에트나에까지 자신의 왕국을 확장하고 싶어한 바르바레스코의 안젤로 가야는 알베르토와 공동 투자하여 와인을 양조하고 있다. 거기에다 최근에는 토스카나 와인 재벌 프레스코발디가 테누타 데레 네레의 지분을 일부 매입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그외에도 많은 양조 브랜드들이 앞다투어 에트나로 향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을 통해 활화산 경사면의 에트나는 필시 고품질 와인을 양산할 수 있는 잠재력이 증명되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양조장 방문 1. 마우제리

에트나에 이르는 길 안내

이번 취재 여행에서 처음 방문한 곳은 양조장 마우제리(Maugeri)다. 밀로에 위치한 신생 양조장으로서 2020년 빈티지부터 와인을 출시했다. 밀로는 에트나 동쪽 경사면에 위치한 마을로, 이곳 포도밭은 에트나에서 유일하게 에트나 비안코 수페리오레'라는 원산지명을 지닌다. 에트나의 다른 경사면에서도 화이트 와인이 많이 양산되지만, 밀로 지역의 화이트만이 '수페리오레(월등한)' 명칭을 붙일 수 있다.


밀로는 다른 어떤 마을보다 더 지중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포도나무는 끊임없이 불어오는 산바람과 바닷바람을 받아, 흔한 병충해에도 잘 걸리지 않는다. 수분에 숨은 노균병도 매일 불어오는 바람에 다 날아간다. 삼천미터가 넘는 고산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차가운 바람으로 포도나무는 늘 서늘한 기운을 유지하여, 종국에는 완숙에 이른다. 이런 영향으로 인해 밀로의 화이트는 특별한 것이다.



마우제리가 집중하는 청포도는 카리칸테다. 시칠리아에 널리 분포하는 카타라토와는 달리, 카리칸테는 서서히 익어가는 청포도로 산도가 높고 미네랄 느낌이 풍부하며 숙성력이 좋다. 마우제리의 카리칸테는 시장에 등장한지 얼마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 그 풍부한 맛과 향을 인정받고 있다. 특히 카리칸테는 에트나 해발 고도 높은 경사면에서 재배될 경우에 긴 생장 기간에서 오는 특유의 산미와 미네랄이 뿌리 박은 그 토양 깊은 속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묘력을 지닌다.


마우제리의 신규 출시 와인들

타는 듯한 지중해의 태양을 생각한다면 시칠리아는 마땅히 레드가 더 많을 것 같지만 사실은 화이트 생산이 더 많다. 마우제리 역시 화이트를 집중 생산하다. 다만 약간의 적포도 네렐로 마스칼레제를 경작하여 로제 와인을 만든다. 인근의 항구도시 리포스토에 있는 미슐랭 식당 짜쉬의 출장 음식으로 꾸민 점심 식탁에서 마우제리의 에트나 비안코 수페리오레는 빛을 발했다. 짭쪼롭한 새우 스파게티와 살짝 토치한 잿방어 접시를 오래 음미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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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슐랭 셰프의 동작은 빨랐다. 양조장의 식탁을 우아하게 표현하는데 성공했다



양조장 방문 2. 바로네 디 빌라그란데

또 하나의 에트나 비안코 수페리오레를 찾으러 이번에는 바로네 디 빌라그란데(Barone di Villagrande, 이하 빌라그란데'로 표기)를 방문했다. 이 곳은 참 유서깊은 양조장이다. 왜냐하면 에트나 최초로 화이트와 레드를 구분하여 만든 곳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탈리아 전체를 통틀어도 이 업적은 최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포도밭에는 적포도, 청포도가 혼재해서 재배되었고, 수확도 같이 했으며 당연히 발효도 같이하고 마지막으로 병입할 때에는 한가지 와인 즉 혼합 와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로마네 콩티 양조장에서도 지난 시절 한동안 피노누아, 샤르도네, 피노 블랑 등을 혼합 농법으로 재배하고, 혼합하여 와인을 만들었었다.


빌라그란데 양조장의 레스토랑에 있는 회화 작품의 부분

1700년대 초에 에트나로 이주한 니콜로지 가문은 지금까지 한 곳에 정착하여 10대째 양조장을 이어가고 있다. 1868년에는 근대식 양조장을 새로 건립하였고, 여기서 에트나 사상 처음으로 화이트와 레드를 따로 구분 양조한 것이다. 1968년 에트나 DOC 와인의 원산지 구획 확정 서명식도 여기 빌라그란데에서 치러졌다.


빌라그란데의 화이트는 미네랄 느낌이 풍성하다. 산도가 높지만 입 안을 기분좋게 자극하여 음식 친향적이다. 거기에다 숙성력도 아주 풍부하다. 오너 마르코가 시트러스 아로마가 풍기는 와인을 개봉했고, 우리는 빈티지를 짐작해야만 했다. 곧 그 와인의 탄생년도는 2017이란 걸 알고 일행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리포스토 항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과거 리포스토 항에는 수출용 와인을 잔뜩 실은 배들이 출항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칠리아의 자비없는 뜨거운 태양이 태울듯이 익힌 포도로 만든 레드 와인들은 북이탈리아 심지어 프랑스로 실려 나갔다. 벌크 와인, 즉 이름 없는 와인이 되어 다른 와인들과 혼합되어 난데없는 라벨을 입는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칠리아 와인은 혹은 에트나 와인은 상황이 다르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성업중인 고급 레스토랑의 화이트 페이지에는 빠짐없이 에트나 비안코 혹은 에트나 비안코 수페리오레 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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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2017 빌라그란데의 에트나 비안코 수페리오레, 경사면에 조성된 테라스 포도밭, 에트나의 다양한 토양 구분 지도.





양조장 방문 3. 비베라

비베라의 오너 로레다나

양조장 비베라(Vivera)는 첫 방문지 마우제리처럼 신생 양조장이다. 링구아글로싸 마을에 소재한다. 이 마을은 그 어원이 재미있다. 링구아글라싸는 혀'란 뜻으로 마을을 덮친 용암의 흔적이 마치 혀처럼 보여서 지어진 이름이다. 거대한 에트나 사면 동서남북으로 소재하는 마을 중에서도 이런 이름은 각별하다.


비베라를 이끄는 로레다나는 "우리 가족은 온통 시칠리아다. 아버지는 라구사, 어머니는 코를레오네(영화 <대부>의 주인공 이름이 코를레오네 마을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그녀 자신은 카타니아 출신이라 시칠리아 주요 도시 모두를 망라한다"라며 자기 소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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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비베라의 다채로운 와인 라벨, 바람을 피하려고 포도나무를 낮게 생작시킨다

그녀는 이어서 양조장이 위치한 콘트라다(구역) 이름은 마르티넬라인데, 이 곳 와인은 한세기전에도 마르티넬라 레이블을 달고 거래될 정도로 상거래에서 구분되었고, 그 포도밭이 우수하다"고 말했다. 비베라 와인 시음은 에트나와 코를레오네 두 지역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었다. 에트나의 반대쪽 곧 시칠리아 서부에 있는 코를레오네는 깊은 산골로서 화산재 토양의 해발고도가 높은 에트나랑은 포도밭의 토양과 테루아가 많이 다르다. 서늘한 기후대의 북사면이 주는 긴 생장 기간의 에트나는 레드와 화이트 모두를 아주 또렷하고 분명한 아로마와 질감을 지니게 하는 반면, 내륙의 코를레오네는 풀바디한 질감을 지녔고, 풍성한 과일맛을 준다. 다채로운 와인 레이블들이 시음자의 감흥을 잘 대변하는 것 같다.



방문 양조장 4. 지롤라모 루쏘

주세페 루쏘


지롤라모 루쏘(Girolamo Russo)는 에트나 북사면 마을 파소피샤로에 위치한다. 양조장 바로 옆에 기차역 파소피샤로가 있다.


이 곳은 에트나의 전형적인 가정 셀라에 기초한다. 지하와 1층에는 양조장이 있고, 생활은 이층에서 하는 구조이다. 한때는 쇼팽처럼 피아노에 살고 피아노에 죽으려 했던 주세페는 아버지 지롤라모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아 2005년부터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피아노 연주에는 더이상 미련이 없지만 대신 유망 피아니스트를 초청해서 지인들과 음악회를 자주 개최한다. 페우도 와인을 만드는 포도밭 농가 2층에 그 피아노가 있다.



지롤라모 루쏘는 파소피샤로, 테레 네레, 그라치 등과 함께 에트나 북사면의 대표 와이너리로 꼽힌다. 주세페는 자신의 동네가 역사적으로 레드 와인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용암이 흘러 형성된 화산재 토양과 해발고도 약 칠백 미터에 작용하는 북사면의 서늘한 기후는 오랫동안 완숙되어 늦수확하는 네렐로 마스칼레제 품종 재배에 알맞다. 그에 반해 화이트 와인은 역사적으로 덜 중요했다. 화이트를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네리나'라는 화이트 와인을 2010년부터 출시했다"고 말했다.


주세페와의 와인 시음은 이번이 세번째이지만, 와인들은 모두 새롭고 품질 향상이 느껴졌다. 화이트, 로제, 레드로 이어지는 열가지가 넘는 시음은 쇼팽 선율처럼 감미롭고 매끄러웠다. 와인을 시음할수록 에트나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타닌은 정교하고 뚜렷하지만 거칠거나 쓰지 않다. 향기는 곱고 진하며 붉은 과일 아로마가 지배적이다. 에트나에서 바롤로의 카누비 또는 브루나테가 연상된다면 놀랍지 않겠나. 토양의 특성을 투명하게 표현하는 와인을 접한 시음자는 자연스레 땅속의 신비로운 구조를 상상한다. 특히 에트나 레드 피안 델레 콜롬베 (Pian delle Colombe) 2022에 코를 대었을 때 그 잔에서 넘쳐 오르는 풍부한 산딸기, 체리 향기는 지금도 생생하다. 이 와인의 생명력은 점점 지쳐가는 입안과 입천장의 감각들을 다시금 긴장시켜 그 풀바디한 질감마저 놓치지 않게 했다. 이 와인은 콘트라다 산 로렌조의 일부분에서만 양조하는 극소량 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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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지롤라모 루쏘의 와인들, 주세페가 연주하던 피아노, 지롤라모 루쏘 와인 중의 넘버 원



방문 양조장 5. 페라타


마지막 개별 방문 양조장은 페라타(Ferrata)다. 이 이름은 기차길'이란 뜻으로 포도밭 한가운데 기차길이 있다. 매일 한두차례 짧은 기차가 지난다.


이 기차를 타고 항구 리포스토에도 갈 수 있고, 인근 마을 파소피샤로는 물론이고 멀리 카타니아까지 이를 수 있다.


오너 시모나는 기차길옆에 펼쳐 놓은 피크닉 테이블에서 첫 와인으로 스파클링 와인을 개봉했다. 그녀의 직업은 음악 프로듀서인데, 방문객들을 위해 막 뉴욕에서 돌아온 소속 가수와 함께 우리를 맞이했다. 페라타 와인들은 음식친향적이다. 에트나 로쏘에 곁들이는 토착 음식들은 맛의 결합이 좋았다. 야채 볶음은 직접 재배하는 올리브 오일로 볶았고, 산적같은 고기말이와 구운 소세지 등은 네렐로 마스칼레제의 타닌과 함께 계속해서 먹고 마시게 했다. 애초 이 곳은 골프장을 건설하려고 구입해 둔 땅이었지만, 뒤늦게 와인의 잠재력을 깨달아 양조장으로 문을 연 곳이다. 레이블의 화려한 디자인은 모두 오너 일가의 작품이다.


페라타 양조장은 카스틸리오네 디 시칠리아 마을에 위치한다. 이 마을에는 아직 노르만 성곽이 남아 있다. 약 일천년 전에 시칠리아를 다스렸던 노르만 왕조는 알칸타라 계곡 전체를 내려다보는 견고한 성을 건설하였고, 이 성을 차지하려는 전투가 무수히 많았을 것이다. 알칸타라 강을 따라 바다까지 내려가다 보면, 용암이 형성한 거대하고 진기한 모양의 바위들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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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p0.jpg 에트나 와인 투어 경로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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