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한 촛대로도 그만이죠
피아스코를 아시나요?
피아스코(fiasco)는 13세기 무렵에 토스카나에서 만들어진 배불뚝이 병입니다. 발델사와 발다르노 지역의 유리 장인들이 말을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의 물병을 보고 피아스코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피아스코는 영어로 플라스크를 말하며, 모양은 박물관에 있는 분청사기나 청화백자처럼 주둥이가 길게 뻗은 호리병 같습니다.
유리가 용기로 쓰인 것은 아주 오래된 일입니다만, 피아스코처럼 입으로 불어서 모양을 만드는 방식은 기원전 1세기 경 시리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시리아는 긴 대롱으로 유리를 떠내서 입으로 부는 방식에 대한 기득권을 공인받으려고, 유네스코 무형 유산 등재를 신청했습니다.
이탈리아 땅에서 피아스코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있습니다. 1275년 토스카나에서 탑으로 유명한 마을 산지미냐노 당국은 장인 케로니모에게 유리병 생산용 용광로를 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이후로 와인 명산지 토스카나에서 개발된 피아스코는 곧 와인병으로 널리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지난날 와인 용기로 사용된 증거는 옛 그림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작가, 시인 그리고 예술가들은 피아스코의 쓰임새를 전승했습니다. 르네상스를 온몸으로 살았던 길란다이오, 미켈란젤로, 다빈치, 보티첼리의 작품에서 피아스코가 등장하고요. 갈릴레이도 서신에 쓴 적이 있어요. 그는 "당신 앞에 있는 저 피아스코를 보세요. 아주 훌륭한 포도주가 그 속에 가득 차 있어요"라고 기록했죠. 르네상스 후기와 바로크 시대에도 그리고 계속해서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서도 피아스코는 그림의 소재로 쓰였어요.
문학에 등장하는 피아스코는 보카치오가 처음입니다. 보카치오(1313년 피렌체 출생)는 <데카메론>에서 피아스코가 주홍 빛깔 와인을 담기에 이상적이라고 서술했던 것 이외에도 여러 차례 이 피아스코를 언급했어요. 이를 통해 당시 피아스코는 식생활 소품으로 자리 잡았을 거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1401년에는 한 중세 상인이 지인으로부터 피아스코에 담긴 와인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의 서신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발간된 한 도서가 있죠. 그 책은 서울뿐 아니라 전 세계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 책에도 피아스코가 등장하죠. 책 이름은 <프라토의 중세 상인>입니다.
그 상인은 이보다 삼 년 전인 1398년에 키안티 와인의 거래를 성사하여 이를 공증인으로 하여금 기록하게 했습니다. 그 와인은 오랫동안 피렌체 와인이라고 불렸던,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입니다. (당시 기록에는 키안티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때가 키안티 와인이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한 때입니다. 그 와인은 바로 모나리자의 고향집 부근 그레베 마을에 있는 역사적인 성 몬테피오랄레에서 양조한 것이죠. 최초의 키안티는 배럴에 담겨 거래되었고, 이후 피아스코로도 거래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 책에서도 입증되었습니다.
입으로 불어서 둥근 모양으로 마치 풍선 불듯이 만들어지던 피아스코는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는 용기가 되었습니다. 피아스코 제조 기술은 기술자들에 의해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중세인들은 피아스코의 단점을 발견했어요. 피아스코는 유리로 만듭니다. 이 유리병은 햇빛에 약하고, 깨지기 쉬워서 뭔가를 둘러서 이를 보호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주변 습지에 널리 분포하는 갈대나 고리버들을 꺾어서 피아스코를 감싸기 시작했어요. 옷을 입히는 셈이었죠. 병 전체를 빼곡하게 덧입히다가 시간이 많이 흐르면서 절반 정도만 옷을 입히는 걸로 모양이 변모되었죠.
피아스코에 일종의 보호대 내지 '드레스'를 입히는 작업은 여성이 맡았습니다. 빠듯한 형편에 처한 부녀자에게 이만한 일감은 없었을 겁니다. 해서 매일 유리 공장으로 가서 오십여 개의 피아스코를 받아와, 하나씩 일일이 옷을 입히고 다음날 다시 유리 공장으로 가서 납품 완료하는 과정을 당시에는 '여행'이라고 불렀답니다. 이 피아스코 작업 여성을 피아스카이아'라고 부릅니다. 그녀들의 노동과 애환에 대한 글도 준비하고 있어요.
메디치 왕조에서도 피아스코를 애용했어요.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1477년 위대한 로렌조'라 칭하는 로렌조 일 마니피코와 그의 어머니 루크레치아의 서신에는 괜찮은 피아스코를 몇 병 보낸다는 대목이 나오죠.
피아스코는 점점 더 많이 생산되었고, 그 표면을 장식하는 방법도 조금씩 변해갔습니다. 와인 거래의 기본이 된 피아스코에는 좋은 와인을 담았죠. 하지만 어디든 한몫 챙기려는 이기심이 싹트기 마련입니다. 용량을 속이거나 품질이 떨어지는 와인을 파는 사기 거래가 등장하고 점점 그게 더 심해졌어요. 그래서 피렌체 정부에서는 1574년 용량을 2.28리터로 정해서 용량의 표준화를 도모했고, 또 이후에는 병에 피렌체 상징인 백합 문양을 찍어서 와인 병의 품질까지 인증을 했습니다.
피아스코는 토스카나에서 태동했지만, 토스카나에서만 생산된 것은 아닙니다. 토스카나의 발명품 피아스코는 주변 지역으로 수출되어 볼로냐, 트레비조 등의 주요 도시로도 전해졌습니다. 19세기말에는 피아스코의 약점이 개선되었습니다. 병 주둥이가 더 두꺼워지고, 또 코르크를 끼우고 빼기 쉽게 하기 위하여 주둥이를 직선으로 길게 뽑는 등 디자인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전에는 주둥이가 벌어져 있어서 마개로 막아도 누출되기 십상이었었기에.
또한 피아스코를 더 이상 입으로 불지 않고, 틀에 부어서 만드는 공정이 개발되어 다량 생산이 가능해졌습니다. 피아스코는 코르크가 단단히 박힌 상태에서 더욱 튼튼한 모양을 갖춰 수출에도 문제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국제 박람회에서 특유의 디자인 감성과 수준 높은 키안티의 품질로 인해 크게 각광을 받아 주변 국가들에게도 많이 팔려 나갔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상황이 많이 변하고 말았어요. 피아스코를 예쁘게 치장했던 저임금의 노동력은 더 이상 구하기 힘들어져, 피아스코의 완제품은 채산성이 확 떨어져 버렸습니다. 한편 보르도 스타일의 각진 모양의 와인병이 세계 표준으로 자리 잡아서 피아스코는 더 이상 경쟁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탈리아의 대규모 와인 브랜드들도 앞다투어 이 보르도 와인병을 사용함으로써 피아스코는 설 자리를 잃어버렸지 뭡니까. 더욱 안타까운 것은 따로 있습니다. 과거에는 피아스코에는 좋은 와인이 담겼죠. 맛도 좋고, 모양도 좋았던 겁니다. 그러나 이를 달리 해석한 이들도 많았어요. 예쁘장한 피아스코에 싸구려 와인이나 헐값의 가짜 와인을 담아 판매하는 사기 행각들이 넘쳐나고 말았죠. 그래서 시장에서는 피아스코를 더 이상 신뢰하지도 않게 되어버렸죠.
한때 토스카나의 와인 문화를 대변했던 피아스코, 다 마셔버린 빈 병은 로맨틱한 촛대로 큰 인기였던 피아스코, 르네상스 예술가들도 애용했던 피아스코는 명맥이 거의 끊어져 버렸습니다. 아름다웠던 피렌체의 예술적 아우라를 근사하게 그리고 실용적으로 잘 표현했던 피아스코는 그 쓰임새가 확 줄어들었습니다. 물론 피아스코 와인을 생산하는 소수의 와인 회사들이 있어요. 재료는 갈대 대신 합성수지로 바뀌었습니다. 피아스코가 멸종되지 않아 다행이긴 합니다.
오늘날 피아스코는 로마, 밀라노, 피렌체 등 대도시 일부 식당의 테이블 위에서 향수를 자극하고 있습니다만, 왕성하고 화려했던 지난날 토스카나 와인 문화의 아이콘 피아스코는 쓸쓸하게 사라져 버린 지 오래입니다.
회화 작품에 표현된 피아스코 스토리는 다음 편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