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하지 않으면 버려라

by 알룰로스

얼마 전 옷장 속 가득 차있었던

옷가지들을 한꺼번에 정리했다.

빼곡히 걸려있고 채워져 있고 쌓여있던 옷더미들.

옷장 문을 열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오곤 했다.

그럼에도 바쁘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옷장 안을 정리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그 덕분에 옷장 속에 내내 갇혀서

옷걸이에 걸린 옷들은 자리싸움을 하듯

낑낑대며 숨 쉴 틈을 찾아

서로를 밀고 밀어내면서도

계속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였다.


내가 옷장 문을 오랜만에 열고

그들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자,

제발 이 좁은 공간을 탈출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앞에 서서 고민해 보았다.

과연 나는 이 옷들을 일 년 동안

몇 번이나 꺼내어 입었을까.


‘언젠가는 때가 되면 꺼내 입겠지.’


그런 생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옷장 안에 가두어뒀던 수많은 옷들은

그 ‘때’가 오긴 오는 것이냐고,

존재하지도 않는 ‘때’를 위해

여기 계속 갇혀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냐고.

내게 도리어 존재의 의미에 대해

철학적인 질문마저 건넨다.


옷장이라는 어두컴컴하고 좁은 공간에

오래 갇혀서 하염없이 탈출을 기다리다 보면

아무래도 방구석 철학자가 아니라

옷장 구석 철학자로 거듭나기 마련이다.


바깥세상과 단절되자 울며 겨자 먹기식 철학자가

되어버린 내 옷가지들을, 일말의 죄책감을 갖고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게 제각각 목소리를 내어

하나씩 존재의 이유를 그럴듯하게 늘어놓았다.


‘그래도 전 나름 비싸게 주고 샀잖아요.’


‘저와 함께 했던 추억을 잊은 건 아니죠?’


‘여기선 조금 부담스러워도,

여행지 가서 입기에 딱이잖아요.‘


옷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니

사연 하나, 감정 하나 내비치지 않는 옷들이 없었다.

색깔과 패턴으로 나를 유혹하는 옷들도 있었다.

나 역시 유행이 지난 원피스를 매만지며

이렇게도 생각했다.


‘지금은 유행이 지났어도… 유행이 또 돌아올 테니

갖고 있어 볼까?’


그러나 옷장 밖의 현실 세상은 냉정하다.

언젠가 바깥세상의 빛을 다시 보겠거니

기대하는 옷들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이다.

이미 몇 년 동안 꺼내지 않은 옷은

다시는 입지 않게 되리라.


나는 갖가지 추억이 깃든 옷가지들을

측은하게

그러나 조금은 단호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결심하듯 말을 건넸다.


그동안 방치해 둬서 미안.

그렇지만 널 다시 입게 될 일은 없어.

계절이 한 번씩, 혹은 두 번씩 바뀌고

다시 돌아오는 동안에도

나는 너를 한 번도 꺼내본 적이 없는 걸.


아니,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너의 존재를 떠올리지도 못했던 것 같아.

넌 마치 나의 과거 속에서

흑백사진이 되어버린

옛 연인들처럼 색을 바랜 것 같아.


넌 내게 더 이상 달콤하지 않아.


나는 마주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옷들에게

드디어 이별 사유를 밝혔다.

달콤하지 않다는 당당한 이별 사유다.


헌옷수거 업체를 불러서

이십 킬로가 넘는 옷더미들을 정리했다.


옷장 안에 여유가 생겨났다.

내 마음 안에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든다.

남아있는 옷들은 내게 달콤한 윙크를 한다.


’달콤하지 않으면 버려라.‘


그날부터 내게는 하나의 정리 공식이 되었다.

한때 전 세계를 휩쓸었던 일본의 정리전문가

곤도 마리에의 유명한 문장,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를

나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다.


옷장 정리를 시작으로

나는 더욱 과감한 정리에도 성공했다.

한때는 너무 달콤하게 느껴졌지만

어느덧 텁텁하고 묵직한 부담스러움에

잘 쓸 수 없게 되어버린 물건을 정리한 것이다.


그 물건은 명품 브랜드에서 구입한 캡모자였다.

구입할 당시에는 캡모자에 박혀있는

브랜드 로고가 얼마나 예뻐 보였던지.

일반적인 캡모자의 가격보다

이십 배 이상은 비싼 가격임에도 덜컥 사버렸다.


그때 난 아기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았고,

당시 나의 외출은 늘 모자와 함께였다.

모자는 내 정돈되지 않은 머리를 가려주고

아무것도 찍어 바르지 못한 초췌한 얼굴을

숨겨주는 고마운 외출 친구였다.

갑자기 바깥바람이 쐬고 싶어지면

모자 하나만 푸욱 눌러쓰고

유모차를 끌며 동네 몇 바퀴를 돌고는 했다.


그러다 우연히 마주친 거울에 비친

모자를 쓴 내 모습이 썩 초라해 보였다.

어차피 모자로 날 누르고 가릴 거라면

좀 더 예쁘게 감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 끝에 들른 백화점 일층 매장에서 써본 모자는,

역시나 나를 더 돋보이게 가려주었다.


한동안 모자를 잘 쓰긴 했지만

과분하게 비싼 가격이 부담스러워

이전처럼 아무렇게나 푹 눌러쓰고

동네를 누비기에 전혀 편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먼지나 얼룩이 묻지 않도록

노심초사하며 조심스럽게 다루다가

결국 내 장식장 선반 위에 고이 모셔두는 신세가 되었다.


편안한 외출 친구였던 모자를

백화점에서 값비싸게 모셔와서는

정말로 사모님처럼 모시게 되었던 것이다.


장식장 선반에서 부잣집 사모님처럼 고고하게

나를 내려다보는 모자와 드디어 똑바로 마주 본 날.

감정이 쌓일 대로 쌓인 연인들의

갑작스러운 이별 순간처럼

결심하듯 마음속으로 단호히 얘기했다.


더 이상 넌 내게 달콤한 존재가 아니야.


한때는 내게 너무도 달콤했지만

이제는 그 어떤 단맛도 느껴지지 않는 존재.

오히려 텁텁한 뒷맛이 부담스러워진 존재.

달콤하지 않으니 쿨하게 이별해야 했다.


모자를 중고 거래 앱에 올려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 구입한 가격의

절반도 되지 않는 가격에야 팔렸다.


내 장식장 선반 위를 고고하게

모셔두던 사모님 모자가 사라지니

역시 시원한 바람이 잔잔히 드나든다.

지나가며 모자를 볼 때마다

꽉 막혀있듯 묵직하고 무겁던

부담스러운 마음도 훌훌 날아갔다.


내가 비싸게 구입한 물건은

그 절반도 안 되는 값에 팔려서,

새로운 주인에게는 그 절반만큼이나

가볍고 예쁘고 편안한 달콤함을 선사할 것이다.


그리고 절반이 넘는 나머지의 금액만큼

나는 공간과 마음에 시원한 잔바람의 여유를 얻었다.


이제는 없어진 내 모자처럼

한때 달콤하기만 할 것 같았던 물건이

지나고 보니 내 하루와 일상, 삶 전체에

더 이상 달콤하지 않아 져서,

색이 바랜 흑백사진처럼 되어버릴 때가 있다.


흑백사진은 그 나름의 추억과 정취를 간직하며

나를 때때로 미소 짓게 할지 몰라도

너무 많이, 오래 보관하면

내 공간과 마음의 여유를 빼앗는다.


그러니 언제든 시원한 잔바람이 솔솔 드나들어

여유를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빈 공간과 여백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때 아무리 애틋했더라도

쿨하게 이별하고 보내줘야 한다.


물건도 사람 관계처럼

결국 시절인연일 테니까.


달콤했던 시절을 떠난 물건에 집착할수록

그 주인인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는 줄어들 테니까.


그 물건의 달콤함에 이끌려

내 공간과 마음에 들였던 적이 있어도

그때의 나 자신을 미워하거나 자책하지는 않으련다.

그저 그땐 그게 달콤했던 이유가 있었으려니,

하고 지금 쿨하게 이별하면 된다.


이제 내 공간에는 오롯이

나를 위한 달콤한 것들로만 채울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또 달콤하지 않게 느껴지면

다시 쿨하게 이별할 것이다.


시원하고 잔잔한 바람을 솔솔 느끼며

나 자신에게 좀 더 집중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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