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홀짝이는 레몬차 한 잔의 위로

by 알룰로스

나 혼자만의 시간은 레몬차 한 잔과 같다.

시면서도 상큼하고 달달한 레몬청이

우러나는 따뜻한 레몬차 한 잔 같다.


여느 카페 메뉴판 가장 아래쪽에서

조용하고 차분하게,

언제나 날 기다리고 있었다며

싱긋 미소 지어 보이는 레몬차.


우리가 그런 레몬차를 매일처럼

시켜서 마시는 일은 거의 없다.


그저 가끔 여유가 나서,

내 시선이 메뉴판을 천천히 훑어내려가다

얼떨결에 발견한 레몬차를 마시게 된다.


다양한 원두와 향, 맛을 지닌

수많은 종류의 커피.

상큼한 과일주스 혹은 청량한 에이드.

그 많고 많은 마실 것들 아래에 위치한

레몬차의 이름을 보면

나는 가끔 안도한다.


누구에게나 가장 기본적이고

호불호 없이 선택될 수 있어서

카페 메뉴판에 으레 작게 쓰여있는 레몬차.


아주 작디작은 동네 카페에서도

사장님이 직접 만든 레몬청으로

만들어주는 레몬차 한 잔 정도는 늘상 있다.


레몬차 한 잔은 내게

작지만 큰 위로의 시간을 내어준다.


북적하고 떠들썩한 바깥의 관계와

여러 현실적인 일들이 오가는 사이에서

나 혼자만의 시간은 그렇게

흔하지 않고 희소하게,

그러나 어쩌다 발견하고

가끔 마시는 레몬차 한 잔의 시간처럼

내게 커다란 위로가 된다.


레몬차에게서 위로를 받는다는 건

그저 그럴듯한 비유가 아니다.

나에게는 정말로 레몬차 한 잔 덕분에

눈물을 쏟을 뻔한 것을 참고

다시 나 자신을 부여잡을 수 있었던 순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친구들은 대부분 취업을 해서

직장으로 출퇴근을 할 때

나는 석사 학위를 받기 위해

대학원으로 등하교를 했다.

스스로 선택한 대학원 생활이었지만

생각보다 힘들고 어려웠다.


나는 부모님께 등록금이나 생활비로

심려 끼치고 싶지 않아서

대학원 생활 내내 조교로 일했다.


덕분에 경제적으로 부모님을

힘들게 하진 않았지만,

마음속에는 언제나 친구들처럼

빨리 제대로 된 직장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늘 내 마음을 괴롭혔다.

내가 더 공부하고 싶어서 한 선택인데

정작 마음은 딴 데 가 있던 시절이었다.


조교 일과 공부를 병행하고

주말에도 쉼 없이 논문을 쓰다 보니

언젠가 한 번 번아웃이 크게 왔던 것 같다.


성실하게 지내고는 있는데

성과는 눈에 잘 보이지 않았고

내가 최악의 상황에 처한 것처럼 느껴진 날.

심지어 연애도 내 맘대로 되지 않았던 날.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을 여유조차 없고

그럴 힘조차 없던 고단한 날.


그때 나는 집으로 곧장 들어가려다

잠시 방향을 돌렸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아파트에는

일층에 꽤 규모가 큰 카페 한 곳이 있었다.

한두 번은 가서 커피를 마시긴 했지만

주로 지나가면서 흘긋 쳐다보기만 할 뿐

자주 가지는 않던 카페였다.


나는 집 밑의 그 커다란 카페에 들어갔다.

터벅터벅 힘 없이 걷는 발걸음과

생기 없는 눈빛과 표정으로

카페 메뉴판을 훑었던 것 같다.

늦은 저녁 시간이라 커피 메뉴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쭉 내려간 시선 끝에는

레몬차가 보였다.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구석자리에

주문한 레몬차 한 잔과 함께

숨어들 듯이 앉았다.


지금의 내 감정 그대로 집에 들어가면

엄마 아빠가 나를 보고 금방 알아챌 거야.

내 고단함과 우울을 알아볼 거야.


그런 생각으로 숨어든 구석자리였다.


그날은 게다가 무척 추웠는데

레몬차는 너무 뜨거워서

찻잔 위로 김이 모락모락 났다.

멍하니 레몬차를 바라보는데

상큼하고 달달한 향이 느껴졌다.


입김을 후 몇 번 불고 한번 홀짝 마시자

달콤한 레몬청이 우러난 그 찻물의 맛에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 커졌던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한동안

후후 입김을 불어가며

따뜻한 레몬차가 미지근해질 때까지

천천히 상큼 달달한 맛을 음미했었다.


밑도 끝도 없이 추락 중이던

우울한 마음이 우연히 마신 레몬차 한 잔에

천천히,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던 그 순간.


레몬차는 내게 말 한마디 걸지 않고

조용하고 차분하게

차근차근 온기를 주며 위로했다.


그때부터 나는 한동안 힘들 때마다

집 밑 커다란 그 카페의 구석자리에

숨어 앉아서 레몬차를 마셨다.


그러고 나면 집으로 올라갈 용기가 생겼다.

내 감정을 치유하고 정화하고

다시 내일을 살아갈 의욕이 생겼다.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스스로의 마음을 챙길 수 있었다.


레몬차 한 잔을 올려놓은 테이블 위에는

나와 나 자신만이 일대일로 존재한다.

다른 누구와의 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상큼 달달한 위로가 필요한

나와 내가 일대일로 마주할 뿐인 시간이다.


나는 그런 레몬차 한 잔의 시간을

가지면서 조금씩 조금씩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갔던 것 같다.


앞이 어두컴컴해서 잘 보이지 않아

바로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조차 안되던 젊고 힘들었던 그때를

조용히 차분하게 스쳐 지나갈 수 있었다.


레몬차의 위로를 처음 접했던

지난날의 나에 비해

지금의 나는 조금 더 단단해져 있다.


이제는 커피를 마시러 들른

어떤 카페의 진열장에서

레몬청이 가득 담긴 유리병이 보이면

싱긋 미소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레몬차의 위로가 절실했던

과거의 나를 떠올리며

홀로 홀짝이는 레몬차 한 잔에서

상큼 달달한 여유를 만끽할 수 있게 됐다.


혼자만의 시간은 언제 어디에나 있다.


스스로 메뉴판 속 레몬차를 찾기만 하면 된다.


떠들썩하지 않고 고요하고

차분한 레몬차 한 잔의 시간.


다시금 추운 겨울날에

잔뜩 추락 중인 내 마음을 발견하면

나는 언제든지 마음속

집 밑 커다란 그 카페의

따뜻한 레몬차 한 잔의 시간을 느낄 수 있다.


당신 역시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만의 레몬차 한 잔을 경험하면 좋겠다.


뜨거운 레몬차 한 잔을 시켜놓고

당신의 마음이 괜찮아질 때까지,

레몬차의 온도가 미지근해질 때까지

차분하고 차근차근하게

조용하지만 커다란 위로를 받기를 바란다.


상큼하고 달달한 레몬청이 우러난 찻물의 맛에

당신도 나처럼 눈이 휘둥그레 해져서

세상 다른 일들이나 괴로운 마음 같은 건

잠시 잊고 마음껏 달콤해졌으면 한다.


나는 지친 내 하루가 위로를 기다릴 때,

혹은 혼자만의 작은 여유가 필요할 때,

언제 어디서든 내 마음속에서

홀로 홀짝이는 레몬차 한 잔의 시간을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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