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덴탈 유니버스> Accidental Universe
한국어판 제목: 엑시덴탈 유니버스
영어 원서 제목: Accidental Universe - the world you thought you knew
저자: 앨런 라이트먼 (Alan Lightman)
영어 원서 난이도: 중상
제목부터가 도발적이다. ‘우연히 만들어진 우주(Accidental Universe)'라니. 부제는 또 어떤가. ‘당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상(The world you thought you knew)’. 우연히 만들어진 우주는 뭐고,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 세상에는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다는 말일까. 그리고, 그 우주와 우리의 삶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걸까?
이 책의 저자 앨런 라이트먼은 소설가이자 이론물리학자로, MIT에서 과학과 인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과학 서적을 낸 것은 물론이고, 여섯 권의 소설, 두 편의 수필집과 한 편의 시집도 낸 문인이다. 과학과 인문학. 얼핏 서로 너무 다른 분야인 것 같지만, 앨런에게는 이 두 개가 모두 익숙한 분야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다른 과학자들과 사뭇 다른 방식으로 과학에 접근했다. 과학의 발전을 인문학자의 눈으로 본 것이다. 이 책은 여타의 과학 교양서적처럼 과학의 발전이나 새로운 이론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것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함께 고민하며 얘기하고 있다.
일단 이 책에 대해 말하려면 ‘과학’ 얘기를 해야 한다. ‘과학’이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도 있겠지만, 책의 내용을 인용하여 가능한 쉽게 ‘과학’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나는 과학에 대해서 잘 모르는 '과알못'이다. 끽해야 대학 때 교양과목 하나 들은 거, 과학서적 두어 권 읽은 게 전부다. 그렇기에 제대로 설명을 못 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수박 겉핥기식으로나마 최대한 내가 이해한 선에서 책의 내용을 풀어보겠다.
과학자들은 모든 자연현상의 뒤에 놓여 있는 기본 법칙을 찾으려는 사람들이다. 그 법칙만 알아내면 신비로워 보이는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하늘이 파란지, 비가 온 후에는 왜 무지개가 뜨는지, 눈송이는 왜 육각형인지 과학자들은 몇몇의 기본 법칙들에 입각해서 설명할 수 있다. (심지어 그들은 각종 호르몬 이름까지 거들먹거리며 사랑의 감정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우리 우주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원자에서부터 우주의 블랙홀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에 대한 법칙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헌데, 공은 예상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현대의 많은 저명한 물리학자들은 이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우주가 있으며, 우리 우주는 그중 하나일 뿐이라는 ‘다중우주이론(multiverse)’을 주장한다. 여러 실험과 이론 검증을 거쳐서 다중우주이론이 맞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 이론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 여러 우주가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중 어떤 우주는 무한하고, 어떤 우주는 유한하며, 어떤 우주는 5차원이고, 어떤 우주는 17차원이다. 어떤 우주는 생명체가 살 수 없고, 어떤 우주는 고등동물이 살 수 있다. 공상과학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런 우주가 수 천억 개나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는 그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우주 중에서 우리는 왜 하필 ‘지금 이 우주’에 살고 있는가. 과학자들은 그 이유를 설명해내는데 실패했다. 1)
수없이 많은 우주들 중에서 우리가 바로 이 우주에 살게 된 건 명확한 인과관계에 의한 것도 아니었고, 당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순전히 ‘우연한 사고’다. 다중우주이론으로 인해 (물론 다른 요인들도 있겠지만), 이제 우주의 다양한 속성들을 기본적인 법칙과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사라졌다. 우리는 정말 우연히 지금 이 우주에 살고 있는 것이지, 거기에 어떤 과학적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이 더 이상 ‘과학적’이지 않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과학적인 것과 비과학적인 것, 논리적인 것과 비논리적인 것, 과학과 종교를 대척점에 놓고, 이 두 부류는 절대 서로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현대 물리학은 과학이 끝내 (겉보기에)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세상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현대 물리학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내가 학창 시절에 배웠던 건 왼쪽 그림이었다. 일정한 궤도를 그리며 핵 주변을 돌고 있는 전자. 하지만 사실은 오른쪽 그림처럼 생겼다고 한다. 일명 electron cloud. 전자가 발견될 확률이 높은 곳은 색이 더 진하고 아닌 곳은 흐리지만, 색이 연한 곳이라고 해서 전자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색이 진한 곳이라고 해서 전자가 반드시 그 궤도로 이동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형태.)
그 선봉에 서 있는 것은 바로 ‘양자역학’이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를 예로 들어보자. 이 원리에 의하면 우리는 어떤 ‘입자의 정확한 속도와 위치를 동시에 알 수 없다’. 즉, 어떤 입자가 ‘이런 속도를 가지고 이런 위치에 있다’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는 거다. 게다가, 그 입자의 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하면 할수록 위치는 더 부정확하게 되고,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면 할수록 속도는 더 알 수가 없게 된다. 내가 중고등학교 때 배웠던 원자의 모형은 이런 것이었다. 가운데에는 핵이 있고, 그 주위를 전자가 일정한 궤도로 빙글빙글 도는 것. 마치 행성들이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에 의하면 이런 하나의 궤도는 없다. 전자는 어디에나 다 있을 수 있다. 다만 전자가 어느 위치에서 발견될 ‘확률(probability)’만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전자가 어떤 위치에서 어떤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으므로. 전자가 발견될 확률이 더 높은 곳이 있고, 확률이 낮은 곳이 있겠지만, 전자가 이러이러한 궤도를 따라 핵을 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주의 모든 것이 계산되고 예측되며, 이해 가능하다고 믿는 과학자들에게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 것이다.
그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또 어떤가. 어려운 거 다 걸러내고 그냥 쉽게 요약해보자. 닫힌 상자 안에 고양이가 들어 있다. 이 상자에는 독가스 관이 연결되어 있는데, 그 관을 여는 밸브는 복잡한 원자들의 활동으로 작동된다. 1시간 후에 이 고양이가 살아 있을 확률은 50%이다. 1시간 후, 복잡한 원자들의 활동으로 밸브가 열렸다면 고양이는 죽었을 거고, 열리지 않았다면 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1시간 후에 상자를 열지 않고 이 고양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가. 상자를 열어보면 확실하다. 고양이는 죽었거나, 살았거나 둘 중 하나다. 하나의 현실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는 고양이가 살아있는 현실과 죽어 있는 현실 두 개가 공존한다. 상자를 열어서 ‘관찰자’가 존재하기 전까지는 어느 것이 현실인지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건 너무 ‘비과학적’ 이지 않은가. 아인슈타인조차도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로 ‘확률’에 대해 얘기하는 양자역학을 인정하지 않았었다.
과학 얘기가 어렵다면 잠시 분위기도 전환할 겸 <태양의 후예>에 나왔던 유시진 대위 얘기를 해보자. 유시진 대위가 커다란 과녁을 향해 총을 쏘고 있다.
캬~, 멋지다. 물론 우리의 유시진 대위라면 총알을 모두 가운데에 있는 10에 적중시키겠지만, 알파팀 팀장인 특전사 대위에게 그건 너무 쉬운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조금 어렵게 만들려고 유 대위와 과녁 사이를 벽으로 가로막았다. 그 벽에는 가늘고 세로로 기다란 구멍이 뚫려 있어서, 유시진 대위가 과녁을 맞히려면 그 구멍을 통과시켜야만 한다. 유 대위는 총알을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쐈다. 그가 쏜 총알들은 모두 세로로 기다란 구멍을 통과해서 과녁에 한 줄 세로로 박혔다. 서 상사도 없고, 강모연 의사도 없고. 혼자라서 심심해진 유 대위는 원래 있던 벽의 구멍 옆에 또 하나의 구멍을 뚫었다. 벽에 세로로 기다란 구멍이 두 개가 된 것이다. 이제 유 대위가 쏜 총알은 첫 번째 구멍을 통과해서 과녁에 맞거나, 두 번째 구멍을 통과해서 과녁에 맞게 될 것이다. 즉, 나중에 과녁을 살펴보면 총알들이 세로로 길게 두 줄로 박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 대위가 살펴보니 희한하게도 과녁에는 총알들이 여러 줄 세로로 박혀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그는 절대로 총쏘는 위치를 바꾸지 않았다)
어리둥절해하는 유 대위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한 물리학자가 이렇게 설명해준다. 유시진 대위가 쏜 총알이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통과해서 과녁에 맞았기 때문에 그렇게 여러 개의 세로줄이 생긴 거라고. 또한 하나의 총알이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통과할 뿐만 아니라, 총에서 나온 총알은 과녁에 도달하기까지 모든 경로를 동시에 다 거친다고 말한다. 그 말 뜻은 이렇다. 그가 쏜 총알이 오른쪽 구멍 쪽으로 가다가 방향을 바꿔 다시 왼쪽 구멍을 통과해서 과녁에 맞았는데, 그 같은 총알은 동시에 왼쪽 오른쪽 계속 갈팡질팡하다가 오른쪽 구멍을 통과해 과녁에 맞았으며, 심지어는 그 같은 총알이 저 멀리 안드로메다까지 날아갔다가, 아, 나는 ‘개념’이 아니라 한낱 총알이지, 하며 다시 돌아와서 왼쪽 구멍을 통과해 과녁에 맞았다는 것이다. 2) 이건 말이 안 된다. 전자입자가 분신술을 쓰는 홍길동도 아니고 말이다. 이건 귀신이 ‘곡성’할 노릇 아닌가? 그런데 양자역학에서는, 이게 말이 된다.
(전구에서 전자 하나(딱 하나)를 쏜다. 그 전자는 가느다란 슬릿을 통과해서 뒤에 있는 스크린에 닿는다. 이걸 계속 반복하면 스크린에는 한 줄의 흔적이 남게 된다. 그런데, 슬릿을 두 개로 만들면? 우리 생각에는 전자가 왼쪽이나 오른쪽 두 슬릿 중 하나를 통과해서 뒤에 있는 스크린에 닿으므로 당연히 두 줄의 흔적이 생길 것 같지만, 실제로 실험을 해보면 뒤에 있는 스크린에는 여러 줄의 흔적이 생긴다. 이 현상에 대한 설명이 바로 '하나의 전자가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한다'는 것이다.)
눈치채셨겠지만 유시진 대위 얘기는 책에 없다. 이건 양자역학에서 아주 유명한 ‘이중 슬릿 실험’을 재미나게 설명해보려고, 아주 작은 전자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세계에 접목시켜서 내가 쓴 것이다. 3) 이중 슬릿 실험은 다음과 같다. 일단 전자 입자 하나를 쏴서 가늘고 기다란 슬릿을 통과시켜 그 뒤에 놓인 스크린에 남는 흔적을 연구한다. 전자입자를 하나 쏘고, 잠시 후에 또 하나를 쏘고. 마치 유시진 대위가 총을 한발 한발 쏘듯 전자 입자를 하나씩 쏘는 걸 반복한다.(충분한 시차를 두고 입자를 쏘기 때문에 발사된 전자입자끼리의 간섭은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슬릿 뒤에 있는 스크린에는 당연히 한 줄의 흔적이 생긴다. 이번에는 두 개의 슬릿을 만들어놓고 전자 입자 아까와 똑같이 하나씩 쏜다.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스크린에 두 줄의 흔적이 생길 것 같지만(왼쪽 슬릿을 통과하던가, 아니면 오른쪽 슬릿을 통과하던가 해서), 막상 스크린에는 여러 줄의 흔적이 생기게 된다. 말도 안 되는 일 같겠지만, 이건 ‘과학적’인 사실이다. 몇 백번, 몇 천 번을 실험해도, 누가 실험해도, 어디에서 실험해도 늘 같은 결과가 나온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전자 입자 하나가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며, 전자가 ‘입자’가 아니라 마치 물처럼 ‘파동’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잘 알다시피 파동은 높이 솟아오른 ‘마루(crest)’가 있고, 가장 낮은 ‘골(trough)’이 있다. 두 개의 파동이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떤 부분에서는 마루와 골이 만나 서로를 상쇄시켜 파도가 없는 잔잔한 평지가 된다. 하지만 마루와 마루가 만나는 곳은 더 높은 마루가 되고, 골과 골이 만나는 곳은 더 낮은 골이 된다. 마찬가지로 왼쪽과 오른쪽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한 파동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골과 골이 만나 더 낮은 골이 된 부분은 스크린에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지만, 마루와 마루가 만나서 더 높은 마루가 된 부분은 스크린에 흔적을 남기게 된다. 그래서 여러 줄의 자국이 남는 것이다. 이 ‘이중 슬릿’ 실험은 모든 물질이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라는 것을 밝혀낸 단초가 된다.
입자가 당구공이나 총알과 같은 ‘입자’이면서 동시에 물이나 빛 같은 ‘파동’이라니. 한 개의 전자 입자가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한다니. 이런 ‘비논리적’인 말들을 믿을 수 있겠는가. 4)
(왼쪽 그림에서, a에서 출발한 하나의 전자가 b와 c를 동시에 통과한다. 그러면 둘이 서로 영향을 끼쳐서 뒤에 있는 스크린에는 여러 줄의 무늬가 생기게 된다.)
종교에서 ‘믿는 자들’은 증거가 없어도 믿는다.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되도다”라는 성경 말씀처럼 말이다. 하지만 과학은 다르다. 과학자들은 직접 보고, 만지고, 실험하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증명이 돼야 믿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불확정성 원리’나 ‘이중 슬릿 실험’과 같은 양자역학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과학자들이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처럼, 마치 ‘믿는 자들’처럼 얘기하는 것 같다. 사실 보통의 사람들은 ‘이중 슬릿’ 실험이니 뭐니 하며 증거를 들이밀어도 “말도 안 돼. 어떻게 입자가 파동이 되니? 어떻게 두 개를 동시에 통과하니?”라며 안 믿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실험 결과만 있으면 안 믿기는 일들도 믿는다. “내 말이 안 믿기겠지. 하지만 이건 진짜야. 내가 직접 (실험해) 봤어.”하며 말이다. 마치 어떻게 죽은 사람이 부활하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 앞에서 “내 말이 안 믿기겠지. 하지만 이건 진짜야. 내가 직접 (예수님을 만나) 봤어.”하고 말하는 예수님의 제자처럼. 과학과 종교는 전혀 다른 분야인 것 같지만, 이럴 때면 서로 상통하는 면이 있지 않나 하고 느껴진다.
어쩌면 과학자들이 ‘믿는 자들’ 이기 때문에 ‘힉스 입자’도 찾아낸 게 아닌가 싶다. 예전 과학자들은 왜 어떤 입자는 질량이 있고, 빛과 같은 어떤 입자는 질량이 없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모든 입자에 질량을 부여하는 신의 입자 ‘힉스’가 존재할 것이라는 결론(가설)에 도달했다. 이 힉스 입자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과학자들은 그 입자를 찾아 반지 원정대에 버금가는 대여정을 시작했다.
힉스 입자를 발견하는 과정은 이렇다. 입자 가속기에서 두 개의 입자를 굉장히 빠른 속도로 충돌시킨다. 그러면 마치 폭발이 일어나듯이, 커다란 에너지가 생기고, 작고 새로운 입자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마치 분자를 깨뜨려서 그 안에 있던 원자를 찾아내고, 원자를 깨뜨려서 그 안에 있던 핵과 전자를 찾아내듯이. 하지만 입자를 충돌시켜서 깨뜨리는 게 쉬울 리 없다. 전자-양전자를 충돌시키는 그 입자 가속기는 둘레가 무려 26.7km이다. 트랙을 빠르게 달리는 레이스 카 두 대를 충돌시키듯, 이 어마어마한 가속기 안에서 입자를 충돌시키며 힉스 입자를 찾는 것이다. 두 입자가 충돌할 때마다 힉스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충돌을 수십 억 번 반복하면 그중에 한 번은 어쩌다가, 힉스 입자가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바로 그 순간 힉스 입자를 캐치해내야 한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 힉스 입자를 감지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힉스 입자는 질량이 크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생겨난 지 1조(兆) 분의 십억 분의 1초 만에 더 가벼운 질량을 가진 다른 입자로 붕괴해버린다. 힉스 입자를 바로 감지해내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렵다. 그래서 그 입자가 붕괴돼서 만들어진 다른 입자들을 통해 흔적을 찾아내기도 한다. 저렇게 커다란 입자 가속기에서 입자들을 충돌시키면서, 엄청난 비용과 어마어마한 노력을 쏟아부으면서도 과학자들은 언제 힉스 입자를 발견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힉스 입자를 찾아 나선 지 20여 년이 지난 후인 2012년, 드디어 힉스 입자를 발견해내고야 만다.
커다란 입자 가속기, 20여 년이 넘는 시간, 수십 억, 수천 억 번을 넘는 입자들의 충돌. 이 기나긴 여정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건 그들이 ‘믿었기’ 때문이다. 힉스 입자가 존재한다는 걸,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걸 (어찌 보면 종교적일 정도로) ‘믿었기’ 때문에 결국은 힉스 입자를 발견해낸 것이다.
이렇듯 현대 물리학은 발전을 거듭하면 할수록 점점 더 (겉보기에)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인 세상과 맞닥뜨리게 됐고, 철학과 종교와 만나는 접점이 넓어졌다. 과학적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해온 사람들(특히 서구인들)은 이런 과학의 발견들이 당황스럽기만 하다. 천동설을 믿고 있다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닌 한낱 티끌 같은 작은 행성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두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땅이 사실은 엄청난 속도로 우주를 돌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자신이 신봉하던 모든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렸을 때 그들은 어땠을까. (우리 몸을 포함한) 모든 물질이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고, 현대 기술로서는 아무것도 (입자의 위치와 속도마저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없고, 우리가 왜 '지금 이 우주'에 살고 있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때, 우리가 믿고 쌓아 올렸던 이성의 탑이 위태로울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과학, 철학, 인문학, 종교, 예술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때야 하는가. 이 책은 그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내가 과학이 재미있다고 느꼈던 건 대학 때 들었던 <현대 물리학과 인간 사고의 변혁>이라는 교양과목 덕분이었다. 수업은 정말 재미있게 들었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아서 스티븐 호킹의 <호두 껍질 속의 우주>를 읽었다. 몇 년 후에는 같은 책의 원서인 <The Universe in a Nutshell>을 읽었는데, 비록 영어로 되어 있었지만 같은 책을 두 번이나 읽으니 대학 때 들었던 수업 내용도 새록새록 기억나면서 이해가 더 잘 됐었다. 작년에는 역시 스티븐 호킹이 저술한 <A Brief History of Time – from the big bang to blackhole>을 읽었다. <엑시덴탈 유니버스>를 읽으면서 좋았던 점은 과학을 설명해주기만 하는 여타의 다른 과학 서적들과 달리, 과학 수업을 듣고 몇 권의 과학서적을 읽으면서 내 머리 속에 생겼던 과학과 철학, 종교에 대한 질문들을 이 책이 다루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질문만 다루고 있지, 명확한 해답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해답은 각자 찾아가는 걸로.)
이 책의 주목적이 ‘인류의 과학 발견과 이론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과학 이론을 시간과 정성을 들여 충분히 설명해주지는 않고 있다. 평소에 과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읽는 데 별 무리가 없겠으나, 과학과 담을 쌓고 산 사람이거나 학교에서 배웠던 내용이 기억 너머로 아스라이 사라져 버린 사람들이라면 진도가 팍팍 나가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나 같은 과학 문외한도 이 책을 읽었으니까. 위에서 언급했듯이 내가 알고 있는 과학 지식은 옛날 옛적 대학 때 들었던 교양과목 수업과 두세 권의 과학 서적을 읽은 게 전부다. 이 정도 배경지식만으로도 이 책을 읽고, 이 독후감을 쓰는 데 큰 지장이 없었다. 그러니 혹시라도 과학과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아서 이 책을 잘 읽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면, 먼저 쉽고 재미있게 설명되어 있는 과학교양서적을 한 두 권쯤 읽은 후 이 책을 읽는 것도 좋을 듯싶다.
영어는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영어 원서 난이도를 중상으로 표기한 이유는 단어들 때문이다. 우리말로는 다 잘 알고 있는 '전자, 원자, 핵, 양성자, 중성자, 입자, 궤도' 등 과학과 관련된 단어들이 난무하는데 그 단어들을 영어로 모르면 단어 찾느라 진도를 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 전공자가 아니라면 (혹은 영어를 너무너무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영어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잠을 깨우는 모닝커피처럼
무지에서, 편협한 사고에서, 무기력한 일상에서 나를 일깨우는 말들.
1.
We are an accident. From the cosmic lottery hat containing zillions of universes, we happened to draw a universe that allowed life. But then again, if we had not drawn such a ticket, we would not be here to ponder the odds. (p. 18)
우리의 존재 자체는 ‘사고’나 다름없다. 수 천억 개에 달하는 우주들이 들어있는 뽑기 모자에서 우리가 뽑은 우주는 아주 우연히도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우주였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만일 우리가 이 우주를 뽑지 못하고 다른 우주를 뽑았다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른 우주에서는 생명체가 살 수 없었을 테니까)
로또를 그렇게 사도 당첨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이미 ‘사람이 살 수 있는 우주’라는 로또에 당첨됐으니까. 로또에 두 번 당첨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2.
We scientists are taught from an early stage of our apprenticeship not to waste time on questions that do not have clear and definite answers.
But artists and humanists often don’t care what the answer is because definite answers don’t exist to all interesting and important questions. Ideas in a novel or emotion in a symphony are complicated with the intrinsic ambiguity of human nature. That is why we can never fully understand why the highly sensitive Raskolnikov brutally murdered the old pawnbroker in Crime and Punishment, whether Plato’s ideal form of government could ever be realized in human society, whether we would be happier if we lived to be a thousand years old. For many artists and humanists, the question is more important than the answer. (p. 46)
우리 과학자들은 초짜 연구생일 때부터 명확한 해답이 없는 질문에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배운다.
하지만 예술가들과 인문주의자들은 종종 답이 뭔지 신경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재미있고 중요한 질문에는 명확한 해답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아이디어나 심포니에서의 감정은 인간 본성에 내재된 불확실성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것은 우리가 소설 <죄와 벌>에서 그토록 감성적인 라스콜니코프가 왜 고리대금업자 노인을 잔인하게 살해했는지, 플라톤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정부 형태는 인간 사회에서 실현될 수 있는 건지, 인간이 천년을 살게 되면 과연 더 행복해지는지 절대로 알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많은 예술가와 인문주의자들에게는 질문이 답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3.
It turns out that the Higgs particle is a shy little fellow. It takes roughly a trillion collisions between protons to coax one Higgs into existence, and, once created, the particle hangs around for less than a billionth of a trillionth of a second before changing into other subatomic particles. Clearly, a particle with such a fleeting acquaintance cannot be spotted directly. (p. 69)
힉스 입자는 굉장히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녀석이다. 두 양성자를 대략 1조(兆) 번 가까이 충돌시켜야만 겨우 힉스 입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 힉스는 1조(兆) 분의 십억 분의 1초가 채 지나기도 전에 다른 입자로 붕괴되어 사라진다. 이러니 힉스 입자를 직접 감지하고 관찰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가끔 인생이 덧없다 느껴질 때가 있다. 이룬 것도 하나 없고, 잘 하는 것도 하나 없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나는 그냥 이렇게 살다 가는 것인가. 내가 태어난 의미는 무엇일까. 길고 긴 우주의 역사에 비하자면 한낱 점에 불과할, 겨우 백 년을 살다 가는 인생. 나 하나의 존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데 힉스 입자를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네 인생도 한낱 점에 불과하다 하지만, 백 년 사람 인생에 비하자면 1조(兆) 분의 십억 분의 1초만 살다 가는 힉스 입자는 그 점에 붙은 티끌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힉스 입자를 찾기 위해 수십 년간 애를 태웠다. 힉스 입자가 그저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과학자들은 열광했다. 힉스 입자는 스스로 ‘길고 긴 우주의 역사에 비하자면 한낱 점에 불과한 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아는 사람들은 안다. 그 존재 자체가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어쩌면 우리도 모두 힉스 입자와 같을지 모른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도.
4.
I can imagine a futuristic “mind-body” experiment: An intelligent person is placed in a soundproof and sealed room, with minimal sensory input from the external world, and asked a series of questions concerning emotional, aesthetic, and ethical issues. Difficult questions. Suppose also that before entering the room, our test subject’s brain is completely examined so that the chemical and electrical state of each neuron is measured and recorded, something that in principle could be done. Then, the puzzle is: Given a very large computer and the known laws of nature, can we predict the person’s answer to each of the questions?
Although I am a scientist myself, I would hope not. I cannot explain exactly why. I do believe that the physical universe is governed completely by rational laws, and I also do believe that the body and mind are purely physical. Furthermore, I don’t believe in miracles or the supernatural. But, like Dostoevsky’s character, I cannot bear the thought that I am simply a piano key, thinking and doing what I must when I’m struck. I want some kind of unpredictability in my behavior. I want freedom. I want some kind of “I-ness”in my brain that is more than the sum of neurons and sodium gates and acetylcholine molecules, a captain who can make decisions on the spot – good or bad decisions, it doesn’t matter. Finally, I believe in the power of the mysterious. Einstein once wrote, “The most beautiful experience we can have is the mysterious. It is the fundamental emotion which stands at the cradle of true art and true science.” (p. 123)
미래에 생길지도 모를 “두뇌와 몸” 실험을 상상해보자. 지적인 사람 하나를 외부 세계와는 단절된, 방음이 된 밀실에 들어가게 한다. 그리고 그에게 감정적, 미적, 도덕적인 일련의 질문들을 던진다. 어려운 질문들 말이다. 여기에서 하나 더 가정을 해보자. 그 실험대상이 방에 들어가기 전에 그의 두뇌를 완전하게 검사해서,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모든 뉴런의 화학 물질과 전기상태를 측정하고 기록했다고. 그렇다면 문제는 이거다. 우리에게 이걸 계산해낼 만큼 굉장히 큰 컴퓨터가 있다면, 우리는 이미 알려진 자연법칙들을 이용해서 그 사람이 각각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지 예측해낼 수 있는가?
비록 나 자신이 과학자이지만, 그리고 왜 그런지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르겠지만, 나는 컴퓨터가 그의 대답을 예측하지 못하길 바란다. 나는 물리적인 세상은 이성적인 법칙에 의해 운용된다고 확고히 믿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몸과 생각이(두뇌가) 물리적이라는 것도 온전히 믿고 있다. 게다가 나는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책 속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나는 우리가 두드리면 거기에 해당하는 음을 반드시 내야만 하는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해야만 하는) 피아노 키와 같다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내 행동에 예측 불가능한 지점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자유를 원한다. 나는 내 두뇌가 단지 뉴런과 나트륨과 아세틸콜린의 집합체가 아니라, 그 안에 “나 다움”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 바로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기장처럼 말이다. 그 결정이 좋건 나쁘건 그건 상관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신비의 힘을 믿는다. 아인슈타인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로 아름다운 경험은 신비이다. 신비야말로 진정한 예술과 진정한 과학의 요람에 서 있는 가장 근본적인 감정이다.”
5.
Experiments in the first half of the twentieth century conclusively showed that all matter has a “wave-particle duality,” sometimes acting like a particle and sometimes acting as a wave. (p. 135)
20세기 초중반에 이루어졌던 실험들은 모든 물질이 “파동-입자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보여줬다. 즉, 모든 물질이 어떤 때는 ‘입자’처럼 행동하고, 어떤 때는 ‘파동’처럼 행동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는 ‘이중성’이라는 말도 중요하지만, ‘모든 물질’이라는 말도 중요하다. 이 말은 곧,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컴퓨터도, 핸드폰도, 그리고 심지어는 당신의 몸도 모두 때로는 ‘입자’처럼 움직이지만 때로는 빛이나 물처럼 ‘파동’으로 움직이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니까.
6.
Why should we drive an hour to visit a friend when we can make a Skype call without leaving our house? Or, even more convenient, send a text message? Why should we stare closely at the stippled skin of a snake when we can take a high-resolution digital photograph and magnify the image by ten? (p. 141)
우리가 집을 나서지 않고도 ‘스카이프’를 이용해서 통화를 할 수 있는데, 아니, 더 편리하게는 그저 문자를 보낼 수도 있는데, 우리는 왜 한 시간이나 운전을 해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걸까? 뱀 피부의 무늬를 관찰하려면 고해상도의 디지털 사진을 찍어서, 그 이미지를 열 배로 확대하면 되는데, 우리는 왜 뱀을 직접 가까이서 관찰하는 걸까?
7.
딸과 딸의 친구들을 만나서 같이 식사를 하는 자리. 음식이 나오기까지 딸과 딸의 친구들은 모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This disembodied existence is their reality. (p. 142)
이 형체가 없는 존재가 그들에게는 현실이었다.
현실과 가상의 차이는 무엇일까. 눈으로 직접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것만이 진짜인가. 특수한 안경을 써야만 경험할 수 있는 가상현실은 가짜인가. 직접 만나지 않고 카톡으로 대화하는 것은 진짜 대화일까, 가짜 대화일까. 목소리만 들리는 전화는? 얼굴까지 보이는 화상통화는 어떤가. 내가 운용하고 있는 이 브런치 블로그는 가상현실일까, 진짜 현실일까. 내 글들은 모두 인터넷이라는 형체가 없는 공간에, 형체가 없는 매거진 안에 있다. 내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나의 브런치. 그것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자칫 직접적인 경험만이 진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의 눈과 귀로 직접 경험하는 것들은 굉장히 제한적이다. X-ray나 적외선, 자외선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빛들, 너무 높거나 낮아서 사람의 귀로는 듣지 못하는 소리들, 너무 작아서 육안으로는 안 보이는 원자들, 너무 멀어서 보이지 않는 우주와 천체.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이것들은, 특수한 안경과 현미경, 망원경을 써야만 보이는 이것들은 모두 가짜인가.
양자역학은 우리가 생활하는 현실에서는 만질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원자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다룬다. 하지만 그것을 가짜라고 부르지 못하는 이유는 이 양자역학이 아주 작은 원자들의 세계에서는 현실 그 자체인 ‘진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질 수도 없고 실체도 없는 인터넷 공간 역시 패러다임을 바꿔 들여다보면 그 나름대로 ‘진짜’ 세계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 인터넷 공간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것도 아니면 가상현실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브런치라는 블로그가 주는 소통의 경험은 굉장히 ‘인간적’이고 ‘직접적’이라는 것이다.
* 여기에 있는 한글 해석은 직접 번역한 것이다. 한국에 출간된 번역본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린다.
1)
다중우주를 설명하는 이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류학적 원리’라는 이론으로 설명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그 이론은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이 우주가 아니라 다른 우주였다면 ‘왜 우리는 다른 우주가 아니라 이 우주에 살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고등 생명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지금 이 우주’ 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설명을 찜찜하게 여기는 과학자들도 많다. 마치 “왜 우리 엄마는 아빠와 결혼했는가”라는 질문에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면 지금 그 질문을 하고 있는 네가 태어나지 못했을 테니까.”라고 답하는 것과 비슷하다.
2)
유시진 대위 옆에서 설명해주던 저 물리학자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이자, 아인슈타인과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라고 일컬어지는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이다. 총알이 안드로메다까지 날아갔다 오는 설정은 너무 과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분들을 위해 <Elegant universe>라는 책에 나온 한 대목을 그대로 옮겨보겠다. (Elegant universe는 읽다가 너무 어려워서 포기한 책이다. 중간까지는 잘 따라갔는데 '초끈이론(string theory)'이 나오는 부분부터 어려워졌다. 역시 난 과알못인가...)
Feynman proclaimed that each electron that makes it through to the phosphorescent screen actually goes through both slits. It sounds crazy, but hang on: Things get even more wild. Feynman argued that in traveling from the source to a given point on the phosphorescent screen each individual electron actually traverses every possible trajectory simultaneously. It goes in a nice orderly way through the left slit. It simultaneously also goes in a nice orderly way through the right slit. It heads toward the left slit, but suddenly changes course and heads through the right. It meanders back and forth, finally passing through the left slit. It goes on a long journey to the Andromeda galaxy before turning back and passing through the left slit on its way to the screen. And on and on it goes – the electron, according to Feynman, simultaneously “sniffs” out every possible path connecting its starting location with its final destination.
파인만은 스크린에 도달하는 전자들이 사실은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한다고 주장했다.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이건 약과다. 파인만은 전자가 출발해서 스크린에 도달하기까지 가능한 모든 경로를 동시에 통과한다고 주장했다. 전자는 부드럽게 날아가서 왼쪽 슬릿을 통과한다. 그 전자는 동시에 오른쪽 슬릿도 통과한다. 이번에는 왼쪽 슬릿으로 향하던 같은 전자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서 오른쪽으로 간다. 오른쪽, 왼쪽 갈팡질팡하더니 마침내 왼쪽 슬릿을 통과한다. 이번에는 바로 그 같은 전자가 안드로메다까지 멀리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왼쪽 슬릿을 통과해 스크린에 도달한다. 이런 경로를 끝도 없이 더 나열할 수도 있다. 파인만에 의하면 전자는 이렇게 출발점에서 도착점까지 ‘가능한 모든 경로를 동시에 통과한다’ 는 것이다.
3)
이 책 <엑시덴탈 유니버스>에서는 ‘이중 슬릿 실험’에 대해서 자세히 나와있지 않다. 이 책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이 독후감에 인용했다.
4)
혹시나 과학책을 읽거나, 양자역학에 대해서 공부하다가 이해가 안 간다면 너무 자신을 탓하지 말기 바란다. 그건 우리 잘못이 아니라 양자역학이 이상한(?) 학문이라서 그렇다. 양자역학의 거장인 리처드 파인만조차도 “양자 이론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미친 거다.(Anyone who claims to understand quantum theory is either lying or crazy)”, “어느 누구도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I think I can safely say that nobody understands quantum mechanics)”라고 말했을 정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