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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이삭금 Jan 04. 2024

그렇게까지 지켜야 했던 비밀

<책 읽어 주는 남자 The Reader>

제목: 책 읽어주는 남자

출판사: 시공사

원서 제목: The Reader

저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Bernhard Schlink)

옮긴이: 김재혁



그렇게까지 지켜야 했던 비밀


이미 영화로도 잘 알려져 있는 <책 읽어주는 남자>를 읽었다. 이걸 뭐에 대한 책이라고 해야 할까. 사랑, 비밀, 범죄, 그리고 인간. 꽤 깊은 주제에 대해 전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간다. 읽으면서 중간중간 책을 덮고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십 대 소년 미하엘은 30대 여성 한나를 보고 반하게 된다. 우연한 만남 끝에 둘은 육체적인 관계를 맺게 되고, 아무도 모를 비밀연애를 하게 된다. 한나는 무엇보다도 미하엘이 책 읽어 주는 걸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직장도 그만두고 사라져 버린다. 한나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미하엘은 허무함 속에 그녀를 그리워만 하는데.


시간이 흘러 미하엘은 법대생이 되고, 나치 전범 재판에 대한 연구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꿈에도 잊지 못할 한나를 다시 만난다.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 있는 그녀를.


피고인이라니. 사랑했던 한나가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들을 감시하고, 그들을 사체 처리장으로 보냈고, 화재가 일어났을 때도 도망치지 못하게 막았던 관리인이었다니.


도대체 헤어져 있던 몇 년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녀는 정말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걸까? 재판에 계속 참관하며 관련 자료를 열람하던 그는 한나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 비밀을 밝혀도 될까. 그녀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지키고 싶었던 비밀을.




출처: 교보문고. 한국어 번역판 표지. 늘 그렇듯 영화화 됐다는 걸 알려 주고 있다.


책의 전반부가 미하엘과 한나의 사랑 이야기라면, 뒤에서는 나치, 전쟁, 범죄, 인간, 그리고 한나의 비밀 등에 대한 복잡하고도 심도 깊은 이야기가 전개된다. 단순히 성인 여성과 소년의 육체적 사랑이야기만은 아니다.

위에서 한국판 책을 봐서 알겠지만, 한국책은 표지만 보면 케이트 윈슬렛의 표정과 욕조 사진을 보여줌으로써 책의 주제에 대해 다소 오해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걸 의도한 걸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오히려 한나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나오는 악의 평범성과 더 어울린다. 그녀는 정확히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위에서 내려온 명령서에 그대로 사인을 했다.


그게 자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건, 상부의 명령에 동의해서건 이유는 상관없다. 어쨌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할 테니.




책을 읽으며 문득문득


책을 읽으며 문득문득 든 생각.

 

독일 문학은 좀 낯설군. 많이 안 읽어봐서 그런가.

비밀이란 뭘까.

법이란 뭘까.

인간의 행동을 법에 의해 판단하고 처벌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분명 법도 필요하고, 처벌도 필요한데. 어떻게 처벌하는 게 피해자에게도 가해자에게도 도움이 되는 걸까.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하시다면, 책을 읽어보시라.


출처: Goodreads. 내가 읽었던 영어판 표지. 제목(Reader)에 걸맞은 표지라 마음에 든다.



나를 깨우는 책 속 몇 줄


1.

Why does what was beautiful suddenly shatter in hindsight because it concealed dark truths? Why does the memory of years of happy marriage turn to gall when our partner is revealed to have had a lover all those years? (p. 37)
감춰 왔던 추악한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어이하여 아름다웠던 추억은 산산이 깨져 버리는가. 배우자가 오래도록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어이하여 그동안 행복했던 사랑의 기억이 쓰라림으로 바뀌는 것인가.


지금 당장 내 눈에 보이진 않더라도 오아시스가 숨어 있기에 사막이 아름다운 거라면. 아무리 아름다웠던 추억이라도 그 안에 고통과 가시가 숨어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부서지는 걸까.


2.

There's no need to talk about it, because the truth of what one says lies in what one does.
말로 할 필요는 없다. 진실은 그 사람의 행동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3. *

Was it sufficient that the ordinances under which the camp guards and enforcers were convicted were already on the statute books at the time they committed their crimes? Or was it a question of how the laws were actually interpreted and enforced at the time they committed their crimes, and that they were not applied to them? What is law? Is it what is on the books, or what is actually enacted and obeyed in a society? Or is law what must be enacted and obeyed, whether or not it is on the books, if things are to go right? (p. 90)
수용소 감시원들과 그 앞잡이들을 처벌할 수 있는 법령이 그들의 범죄 행위가 벌어질 당시에 이미 형법에 규정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그 법령이 그들의 행위가 있던 당시에 실제로 어떻게 해석되고 어떻게 시행되었으며, 또 당시에는 그 조항들이 그들에게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인가? 법이란 무엇인가? 법전에 적혀 있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사회에서 실제로 집행되고 준수되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법이란 법전에 규정되어 있든 규정되어 있지 않든, 어떤 일이 정당하게 이루어진다면 그에 따라 집행되고 준수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4.*

How did I decide that he too was under sentence of shame? But I did. We all condemned our parents to shame, even if the only charge we could bring was that after 1945 they had tolerated the perpetrators in their midst. (p. 92)
내가 어떻게 그분에게까지 수치의 판결을 내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렇게 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부모들에게 수치의 판결을 내렸다. 우리가 그들을 고발한 내용은, 그들이 1945년 이후에도 그들 주변에 있는 범죄자들의 존재를 묵인했다는 것이다.


3, 4번은 김재혁 역자의 번역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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