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듣기 실력 향상 프로젝트
말하기, 읽기, 듣기, 쓰기.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지만, 영어 듣기는 특히나 더 어렵다. 내 귀가 막귀라서 그런 건지, 유학이나 어학연수 경험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10살 전에 원어민 선생님한테 영어회화를 배우지 않아서 그런 건지. 나도 한때 같은 고민을 했던 사람으로서, 듣기 때문에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동지의식을 느끼는 바이다.
지금부터는 대략 3회 정도에 걸쳐 영어 듣기 실력을 키우기 위해 내가 했던 ‘영어 듣기 실력 향상 프로젝트’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거창하게 ‘프로젝트’라고 써놨지만 사실은 막귀를 뚫기 위해 동분서주, 고군분투, 우왕좌왕했던 날들의 결과물이다. 물론 이 글에서 제안하는 프로젝트만이 듣기 실력을 키우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내가 썼던 방법들을 잘 참고해서 본인만의 ‘영어 듣기 실력 향상 프로젝트’를 가동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당연한 말이지만 미국, 영국, 호주 등 지역에 따라 영어 발음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 글에서 말하는 원어민 발음은 ‘미국식 영어 발음’이라는 점을 먼저 밝혀두고 시작하겠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영어가 안 들리는 이유를 차근히 파헤쳐보면 역으로 영어 듣기 실력을 높이는 방법도 알아낼 수 있다. 영어가 안 들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단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아는 단어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유홍준 선생님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셨는데, 영어는 ‘아는 만큼 들린다’라고 할 수 있다.
24시간 내내 CNN을 틀고 있어 봤자 내가 모르는 말을 할 때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기껏해야 Korea, Mr. President처럼 내가 아는 단어만 간간히 내 귀에 캔디처럼 들릴 뿐이다. 그러니 듣기를 잘하려면 일단 독해 실력(단어 실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 되어야 한다. 읽어서 이해를 못 할 내용이라면 들어도 이해를 못 하기 때문이다. 뉴스를 잘 듣고 싶다면 뉴스에 나올만한 단어도 많이 알아야 하고, 시사와 세상 물정에도 밝아야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네 살 꼬마가 우리말 뉴스를 들으면, 들어도 듣는 게 아니고, 내용을 하나도 이해 못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읽어서 이해를 못 할 내용이라면 들어도 이해를 못 한다. 영어는 아는 만큼 들린다.
그럼 아는 단어가 많으면 영어가 잘 들리느냐?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단어도 많이 알고, 독해는 기가 막히게 하는데도 영어 듣기가 잘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이게 바로 영어가 안 들리는 두 번째 이유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영어 발음과 원어민의 영어 발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영어 듣기는 절대 글로 배울 수 없는 영역이다. (아, 지금 글로 영어 듣기에 대해 쓰고 있는 나는 뭐지. 대동강 물 파는 봉이 김선달도 아니고.. )
영어에는 우리말에 없는 f, th, r 등의 발음이 있기 때문에 책만 봐서는 안 되고, 단어의 발음을 직접 들어 봐야 한다. 사실 옛날 옛적 까까머리에 검은 교복 입고 학교 다니던 학력고사 세대라면 몰라도, 요즘엔 다들 영어를 들으면서 공부하니까 발음을 몰라서 듣기가 안 되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겠지만. 영어 듣기를 방해하는 의외의 복병들이 있다.
첫 번째 복병은, 우리말 발음과 영어 발음은 다르다는 거다. 너무 당연한 소리를 해서 순간 졸 뻔했다고? 흔히들 r이나 f처럼 우리말에 없는 발음은 당연히 다르다고 생각하고 신경 써서 발음하지만, L이나 t 발음 같은 건 우리말 ‘ㄹ’이나 ‘ㅌ’ 발음과 같다고 생각하고 그냥 우리말처럼 발음한다. 하지만 L의 발음은 우리말 'ㄹ'의 발음과 엄연히 다르다. L이 단어 첫머리에 올 때의 발음도 다르지만, 특히나 단어 중간이나 끝에 올 때는 [으을-]처럼 좀 더 길게, 밀어주며 발음해야 한다.
두 번째 복병은, 영어단어에는 강세가 있다는 점이다. 영어단어의 발음까지는 신경을 쓰더라도 강세는 무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강세만 제대로 짚어줘도 발음의 반은 먹고 들어갈 수 있다. 단어의 강세에 따라 발음과 뜻이 확연히 달라지기도 할뿐더러, 말할 때는 강세가 있는 부분만 귀에 쏙쏙 들리기 때문에 강세가 다른 단어는 비슷한 뜻이라 할지라도 완전히 다른 단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Desert는 앞에 강세를 줘서 [데젙]라고 읽으면 ‘사막’이 되고, 뒤에 강세를 줘서 [디저-ㅌ]라고 읽으면 ‘버리다’라는 뜻이 된다. ‘사진’이라는 뜻의 photograph는 [포우토그랲]이라고 읽지만 ‘사진작가’라는 뜻의 photographer는 '포토그래퍼'가 아니라 [퍼타그러퍼]가 된다. 앞의 단어는 [포우]가 크게 들리고 뒷단어는 [타]가 크게 들린다.
세 번째 복병은, 우리말에 스며든 영어 단어들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어의 범람에 몸살을 앓았던 우리말이 이제는 영어의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 중에 영어로 된 어휘가 꽤 많이 늘어난 것이다. (나는 영어를 사랑하지만 솔직히 우리말에 영어가 너무 많이 끼어드는 건 속상하다. 그래서 온갖 영어 단어가 난무하는 패션 관련 잡지나 방송은 잘 안 본다. 내가 옷을 잘 못 입는 건 다 그 탓이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영어 단어를 써야 하는 경우도 많다. 고유명사라던가, 그 단어가 이미 우리말에 고착화된 경우가 그렇다. 요새는 '사진기'라는 말 대신 대부분 '카메라'라고 쓰는 것처럼 말이다.
평소에 영어 단어를 마구 섞어서 쓰면 아는 영어 단어가 많이 늘어나니까 영어실력 향상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지만, 듣기 영역에 있어서는 이것이 마이너스가 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영어단어는 ‘우리말화(化)된 발음’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원어민이 실제 사용하는 발음’과는 상당히 차이가 난다. 당연히 영어 발음이 낯설고, 잘 안 들릴 수밖에 없다.
‘우리말화(化)된 발음’과 ‘원어민이 실제 사용하는 발음’은 상당히 다르다.
그럼 영어 듣기 실력을 높이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리가 어려서 외국에서 살았더라면, 혹은 어려서 원어민 선생님한테 영어를 배웠더라면 영어를 듣는 귀가 뚫렸을 것이다. 옆에서 시시때때로 제대로 된 영어 발음을 여러 차례 들려주고, 단어의 뜻도 알려주고, 우리의 틀린 발음도 고쳐줬을 테니까. 하지만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다. 제대로 된 영어 발음을 찾아서 듣고, 단어 뜻을 공부하는 건 굳이 외국에 나가거나 비싼 어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가능하니까 말이다. 내 방 방콕에서도 할 수 있는, 내가 했던 ‘영어 듣기 실력 향상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다.
듣기 실력을 향상시키려면 주야장천 듣기만 해야 할 것 같지만, 듣는 것만큼 중요한 게 그 내용을 공부하는 것이다. 그저 하염없이, 24시간 내내 영어를 듣기만 한다고 듣기 실력이 확 늘지는 않는다. 공부하지 않고 듣는 것은 내 귀에 BGM처럼 흘러갈 뿐이다. 한 마디로 소 귀에 경읽기나 다름없다.
공부를 딱히 하지 않았는데도 영어 채널을 계속 틀어놨더니 어느 순간 영어가 들리더라, 하는 건 이미 영어 공부를 많이 해서 안에 쌓인 실력이 상당한 사람 혹은 영어를 듣지 않는 다른 시간에도 영어 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얘기다. 즉, '듣기'와 '공부'를 동시간에 병행하지 않더라도, 결국은 '듣기'와 '공부'가 연결되는 사람들 얘기라는 거다. 하지만 하루에 기껏해야 한두 시간 정도로 영어 공부하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 시간에 '듣기'와 '공부하기'를 병행해야 한다. 그냥 '듣기'만 해서는 안 된다.
들은 내용을 공부해야 한다는 건 이런 뜻이다. 뉴스가 됐건 드라마나 영화, 혹은 팝송이 됐던 간에 자신이 들은 것을 해석해보고, 단어를 찾아 외우고, 내용을 이해하고, 이해한 걸 바탕으로 다시 또 한번 들어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거다. 그래야 듣기 실력이 쌓인다. 아는 만큼 들리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모르는 단어를 찾아볼 때는 철자나 뜻만 확인하지 말고, 반드시 발음과 강세를 확인한다. 사전을 찾아볼 때는 눈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발음기호는 외계어처럼 생겨서 그걸 봐도 어떻게 소리가 나는지 감이 잘 안 오기 때문이다. 또한 원어민의 발음으로 들어보든 자신이 말해보든 간에, 직접 발음을 들어서 자신의 귀에 그 단어를 익숙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능하면 꼭 단어 발음을 들어보고 본인이 직접 말해보는 과정까지 거치는 게 좋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전자사전이나 인터넷 사전은 발음까지 들려주는 기능이 있다.)
자신이 이미 아는 단어라도 한국식 발음만 알고 있다거나 그 단어의 강세를 모른다면 반드시 사전을 찾아보는 습관을 기르자. 사전을 찾아보는 작은 습관이 내 막귀를 뚫는 강력한 드릴이 될 수 있다. 내 발음이 원어민 발음처럼 바뀌는 건 어렵겠지만, 듣기 실력은 확실히 향상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