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류준열을 좋아하는 이유
우리 약국은 비닐봉지가 50원이다. 싸다고 생각하면 싼 가격이고, 비닐 따위가 왜 이리 비싸냐 하시면 비싼 가격일지도 모르겠다. 50원은 봉투를 팔아 마진을 남기겠다는 건 아니다. 유상으로 판매하면 사용 전에 한 번은 고민할 테고, 그러면 비닐 사용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책정한 금액이다. 약국에 봉투를 납품하는 업체가 있는데 쌍화탕 1박스 들어가는 비닐은 20원이 조금 넘고 쌍화탕 2개가 들어가는 비닐은 30원 정도 한다.(물론 인터넷 최저가를 샅샅이 뒤지고 대량 구매를 하면 더 싸질 수도 있겠지만.)
땅속의 미생물에 의해 180일이면 분해된다는 ‘생분해 비닐’이라는 게 있다. 생분해 비닐봉지는 쌍화탕 1박스 들어가는 크기가 60원 가까이한다. 60원짜리를 50원 받아서 손해라고 변명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어야 마땅한 비닐봉지가 쌍화탕 박스를 넣다가 두 갈래로 분해가 돼버리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한 번은 손님이 집에 가는 도중에 생분해 비닐이 찢어져 음료까지 새제품으로 바꿔드린 적도 있다. 물론 쌍화탕이 무겁고 모서리가 뾰족하기 때문에 생분해 비닐이 찢어진 거 맞다. 어쨋튼 찢어질지도 모를 봉지에 넣어드리는 건 손님도 나도 마음이 너무나 불안하다.
약국에서 결제 전에 “봉투는 유상인데 필요하신 가요?”라고 물어본다. 실장님께도 계산 전에 꼭 물어봐달라고 말씀드렸다. 마음먹은 것과 달리 나도 실장님도 가끔 잊어버릴 때가 있고, 타이밍을 놓쳐서 말을 못 꺼낼 때도 있고, 이 정도는 비닐이 안 필요하겠지 하고 겉 넘는 경우도 있다. 결제가 다 끝났는데 손님이 비닐봉지가 필요하다고 하시면 그제야 “저희가.. 봉투는 유상인데…”라고 말끝을 흐리고, 손님은 50원을 카드로 긁어 말아하시다가 두 팔로 물건을 한 아름 감싸서 약국을 나선다. 아무튼 봉투를 유상으로 제공하는 것은 서로에게 약간은 껄끄러운 일인가 보다.
“동네 장사하는 데 이딴 식으로 하는 거 아냐!!!”
쩌렁쩌렁 들려오는 고함소리.
이 소리의 근원지는 바로 우리 약국이다.
사건은 작년 1월 설 연휴가 끝난 바로 다음날 일어났다. 설 연휴 전, 우한 폐렴이라는 게 유행하고 있으니 중국 여행을 삼가라는 뉴스를 보았다. 그때까지 우한 폐렴은 남의 나라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연휴 동안 코로나 바이러스 관련 뉴스가 점점 더 많아졌다. 그리고 연휴 끝나고 약국 문을 연 첫날, 마스크와 손소독제는 불티나게 팔렸다.
문제의 그 남자 역시 손소독제를 사러 온 손님이었다.
"손소독제 있는 거 다 주세요."
그 남자는 다짜고짜 손소독제를 있는 대로 다 내놓으라고 했다. 수량을 제한해서 판매하던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약국에 남은 손소독제를 다 드릴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손소독제를 다 계산한 그 남자는 당당하게 비닐봉지를 요구했다.
“봉투는 50원인데 같이 결제해드릴까요?”
“무슨 비닐봉지가 50원이나 해!!”
“환경부담금 목적으로 50원 받고 있습니다.”
“비닐봉지 제약회사에서 갖다 주는 걸 돈 받고 팔아?!”
“저희가 구매한 비닐봉...”
“비닐 쪼가리 10원도 안 하겠구먼. 이걸로 돈 벌려는 거 아니야? 동네 장사하는데 이딴 식으로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조제실에서 약을 조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남자의 화는 실장님에게로 향했다. 말을 툭 자르고, 본인 할 말만 하신다. 부당이익으로 소비자보호원에 신고하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비닐 쪼가리 10원이 훌쩍 넘고, 제약회사에서도 이제 비닐봉지는 주지 않으며, 봉투값을 받는 것이 아니라 봉투값을 안 받는 것이 신고 대상이라고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다.(대신 제약회사에서는 쇼핑백이나 각대 봉투, 생분해 비닐을 주신다. 이 아이들은 환경부담금을 받지 않고 드린다.) 아니 설명하지 못했다. 이성적으로 또박또박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감정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아저씨는 우리 약국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가 나를 제일 화나게 했다. 대형마트에 가서도 비닐봉지를 내놓으라고 했을까?
그날 이후 실장님은 비닐봉지가 유상이라는 말을 꺼내는 걸 겁내신다. 그래서 우리는 봉투는 유상이라는 말을 최대한 덜 하고, 그러면서도 유상으로 판매하는 비닐봉지를 주지 않을 대안을 마련해야 했다.
서울에 ‘object’라는 유명한 재활용 소품샵이 있는데, 한때 그곳에서 물건을 구매하면 ‘object’ 스티커를 붙인 재활용 쇼핑백에 담아주었다. 손님들이 안 쓰는 쇼핑백을 가져다주고, 그걸 재활용하는 것이다. 상호 스티커가 붙어 있긴 하지만 옷가게 쇼핑백일 때가 있고, 화장품점 쇼핑백일 때도 있었다. 신선했다. ‘object’는 두고두고 생각나는 가게가 되었다. 홍대의 트렌디한 소품샵에서 하는 방법이라니 멋있어 보이고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약국에 택배업체를 거치지 않고 자체배송을 해주는 도매업체가 몇 군데 있는데, 이 업체들이 직배송을 하기 때문에 택배 상자처럼 꽁꽁 싸매서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대신 재활용 상자 뚜껑을 테이프 없이 엇갈려 포개어 가져다주시거나 비닐봉지에 넣어서 배달해주신다. 우리는 약 배달 올 때 쓰이는 비닐봉지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님들이 비닐봉지가 필요한 상황이면
“재활용 비닐봉지에 넣어드릴까요? 약 배달 올 때 사용한 비닐이에요.”
라고 설명드린 후 담아드리곤 한다. 대안이 마련된 것이다!
나는 류준열을 좋아한다. 연기를 잘해서, 패셔너블해서, 훈남이라서 배우로서의 이유 말고, 환경운동가로서의 류준열을 좋아한다. 류준열은 5년째 그린피스 후원자이고, 플라스틱 제로 캠페인에도 동참했다. “북극곰을 지켜주세요” 북극곰 보호 캠페인 광고에 나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인 데다, 재능 기부를 했다고 한다. 영향력 있는 배우가 환경 운동을 하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고 캠페인에 동참하기도 하고 긍정적인 효과가 생기는 것 같다. 내가 ‘object’를 따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비닐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나도 완벽하지 않다. 오늘도 약국에서 피로회복제 세트를 opp봉투에 야무지게 포장하다 왔으니까 말이다. 나는 앞뒤가 다른 사람일까?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건가? 고민이 들었다.
그린피스에서 류준열 배우 인터뷰한 걸 본 적이 있다. 공개적으로 환경보호를 실천하는 것이 알려졌는데, 어쩔 수 없이 일회용품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에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이냐는 질문이 있었다.
"그런 순간에 무엇을 쓰고 안 쓰는지 얽매이기보다는 스스로 환경 문제를 대하는 태도를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실 저는 죄책감을 가지고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환경 보호를 하고 싶지 않거든요. 어쩔 수 없이 플라스틱 병에 든 물을 마셔야 하는 상황에서 죄책감을 가지게 되면 너무 스트레스가 되잖아요."
류배우는 내 고민을 단박에 정리해 주었다. 환경 보호를 실천할 수 있는 부분은 실천하고, 그렇지 못한 부분은 대안을 생각해보면서 스트레스받지 말 것. (opp봉투도 적당한 대안을 찾아봐야겠다.)
우리의 지구가 비닐봉지를 없애려면 적어도 100년은 걸린다고 한다. 100년이라는 시간에 대한 부담금이 50원이라면 지나치게 저렴한 것이 아닐까?
비닐봉지 유상판매를 가격이 아니라 환경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아니 돈을 지불하고 미안해하는 것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래 오늘은 비닐봉지 안 써야겠다.’로 마침표를 찍는 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