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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아는 한 가지 마음속 단어_3

뿌듯하다

by 맑은날의 무지개

두, 세 달 사이에 체중이 점점 늘더니 가지고 있는 바지로는 단추를 못 채우는 것은 물론

허리까지 올라오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렸다.

무슨 자신감인지, 다시 살을 뺄 수 있다는 확신으로 허리 치수가 더 큰 바지는 하나만

더 샀다.

한 달 전, 그 바지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확신은 이미 낙엽에 감탄하는 가을이 "아~ 곱다."라는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사라진 것처럼

내 마음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바지를 하나 더 사는 것이 경제적이겠지만, 지나갔다고 생각한 가을이 다시 찾아왔는지

살을 조금 더 빼보기로 했고, 사라졌던 확신은 슬쩍 꺼내어 전보다는 크지만 지금보다는 적은

허리 사이즈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 저녁, 가지고 있는 바지 중 가장 넉넉한 바지를 입고 벨트를 했다.

2시간 후

가장 넉넉한 바지 단추를 풀었고 벨트 역시 주먹 하나 들어갈 정도로 늘렸다.


화장실도 안 가서 먹고 또 먹었다.

대화가 끊어진 시간이 중간 중간 너무 많아서 어색해서 투덜 되긴 했지만

부지런히 요리를 내주었다면

바지 단추를 푸를 것이 아니라 바지를 벗어야 할 상황까지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그건 내가 상상만 해도 너무 이상한 일 같지만 그만 먹으면 될 일을 왜 바지를 벗어야 한다고 생각한 건지.


이 자리는 내 입으로 이런 말 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지만

나의 송별회 자리로 공식적인 명칭이 붙은 자리였다.

물론 그건 단지 공식적인 이름이고 그냥 아저씨들의 타당한 회식 술자리로 명하는 것이

더 정확한 자리였다.


다음 주면 6개월이다.

퇴직금은 물론 실업급여도 신청할 수 없는 반년 동안 근무가 끝이 나고

다시 구직자가 되어야 한다.

24년, 끝나는 날이 다가올수록 나는 매우 불안했고,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을 당해야 하는 것에 불만스럽기도 했다.

무기력한 마음에 다른 이가 봐도 괜찮다 싶은 변명으로 포기도 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나를 확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나는 [뿌듯했다.]

내가 일하는 곳, 시설에서 생활하시는 분들은 매일이 모자라도록

나의 계약 마감을 안탔가워 하였고, 심지어 직장을 찾아봐 주기도 하였다.

직원분들은 그 말의 진심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지만

자리가 나기를 바라기만 하셨고, 나의 마감 시간이 가는 것을 더욱 아쉬워하기도 하셨다.

그 전 직장에서도 다시 같이 일하자며 원장님까지 같이 찾아오시는 일을

오늘 하루에 다 겪고 나니

바지 단추를 풀어야 하는 것은 단지 많이 먹어서만이 아니라

어디서나 나는 잘하고 있는 것인지?

이 일을 하고 있는 내가 맞는 것인지?

밥 값은 하고 있는 것인지, 다들 말을 못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물음이 같이 삼켜져서 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적은 나이도 아니고, 나이에 비해 이룬 것 하나 없는 내가

누군가에게 나를 인정받는 일이 이처럼 나를 [뿌듯하게] 만드는 일인지는 몰랐다.


사실 달라지는 것은 별것 없을 것이다.

그저 지금처럼 자랑이나 한 번 더 할 수 있는 것이지

여전히 이력서는 여전히 가볍고 자기소개서는 비어있는 부분이 더 많다.

그렇지만

절대 많은 나이도 아니고, 내가 감당한다면 이룰 것이 없는 나도 아니다

2024년이 시작되기 전,

23년 겨울에는 오랜 기간 나를 무너뜨린 병으로 다시금 입원을 했었다.

새해가 되어도 그 깊이는 나를 잡고 있어서 새해라는 명분아래 다시 시작하는

것이 엄두도 안 났던 시간이었다.

바닥으로만 내려갈 줄 알았던 한 해가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며

그 끝에는 한껏 올려주고 끝나갈 줄은 상상도 못 했던 한 해.


사실 달라지는 것은 별것 없을 것이다.

뭐 내 마음가짐이나 회복탄력성을 좀 높이는 정도겠지.

그렇지만

[뿌듯하다] 말할 수 있는 하루 때문에 나는 한 번 더 실패해도 괜찮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끝에는 뿌듯하게 나를 바라볼 나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으니.







#뿌듯하다_기쁨이나 감격이 마음에 가득차서 벅찬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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