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베네치아
출근길, 차에 시동을 걸고 라디오를 켠다. 채널 고정 중인 MBC 라디오에선 벌써 한 달 넘게 음악방송만 흘러나온다. 파업 중인 사람들에게는 하루하루가 힘든 날이겠지만 평소 이런 라디오가 있었으면 했던 나로서는 (사회적 현안을 차치하고 방송만을 두고 이야기한다면) 솔직히 이 음악방송이 꽤나 맘에 든다. 누가 선곡하는진 몰라도 내 취향을 저격하는 팝송, 최신가요, 옛날 가요를 듣다 보면 출근에 대한 거부감도 조금은 줄어드는 것만 같다.
오늘도 습관적으로 라디오부터 켜놓고 자유로를 달리던 중 내 입이 귀에 슬쩍 걸린다.
에라 모르겠다_빅뱅
훔치는 너의 눈빛에
입술은 바짝 마르지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런 떨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나
이 밤이 다 가기 전에
난 널 내 품 안에 원해
Real love?
I think I wanna just
고민 고민하지 마 Hey
에라 모르겠다 I Love ya
에라 모르겠다 I Love ya
에라 모르겠다 I Love ya
'에라 모르겠다'라는 대목에선 핸들을 잡은 채 그루브까지 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오해하지 마시라. 내가 이 노래를 들으며 실실 쪼개는 건 내가 변태라서도 아니고, 그루브를 타는 것 또한 나에게 힙합퍼 감성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이 노래는 나에게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에서의 추억 한 줄기와 함께.
각인(刻印) : 마음속 깊이 새겨져 뚜렷하게 기억됨.
트와일라잇 4권에서는 '각인'이라는 현상이 언급된다. 제이콥의 종족인 늑대인간에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현상이다. 어떤 상대에게 각인되면 평생 그 상대만을 위해 살아간다. 그 각인은 언제 그들에게 찾아올지 모르지만 한 번 찾아오면 평생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제이콥 또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대에게 각인되는 바람에 벨라의 심기를 거스르기도 하고.
트와일라잇에서처럼 운명적인 것 까진 아니지만, 노래 한곡에 어떤 사람 또는 어딘가를 떠올려본 경험, 스쳐 지나가는 냄새에 과거의 어떤 순간을 떠올려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나의 경우는 사람에게 각인되기보다는 여행지에서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는 것들에 주로 각인되는 편이다. 베네치아에서 난 빅뱅의 '에라 모르겠다'에 각인되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순간, 그 파스타집에서, 내 취향과 그다지 관련이 없는 빅뱅의 노래에 말이다.
유럽여행 중 하필 나의 베네치아 일정이 진행되는 날 바포레토(수상택시)가 파업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베네치아 본 섬을 도보로만 돌아봤던 1월의 어떤 날이었다. 이탈리아 여행이 두 번째였던 나는 이탈리아 여행이 처음인 동생에게 다양한 파스타의 맛을 보여주겠노라 잘난 척하면서 파스타 맛집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비싼 곳만 맛집이라고 생각하진 않기 때문에 이 날은 테이크아웃 형태의 생면 파스타를 파는 집에서 파스타를 포장해와 숙소에서 먹기로 했다. 구글맵에 미리 찍어놨던 테이크아웃 파스타 맛집으로 향했는데 이런, 공사 중이라 영업을 하지 않았다. 훗, 노련한 여행자인 나는 이미 플랜 B를 준비해뒀다고. 고민할 것 없이 구글맵에 비상용으로 찍어둔 다른 테이크아웃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하루 진종일 걸어 다녀서 지쳤던 탓인지 베네치아의 골목길이 문제였던 건지 내 GPS는 나를 이상한 곳으로 안내하고 만다.
Pasta to go라고 쓰인 곳에 들어가서 파스타 2종류를 테이크 아웃했다. 룰루랄라 구글맵을 보며 숙소로 가려는데 아차 싶다. 여기가 아니었다. 어쩐지 파리 날리더라.... 하지만 이미 내 손에 들려 있는 2인분의 파스타.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은 이미 이탈리아 파스타를 맛볼 생각에 들떠 있다. 이대로 모르는 척하고 숙소에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동생은 실망하겠지. 누나로서의 가오(?)가 무너지더라도 이탈리아까지 와서 동생에게 이상한 파스타를 먹일 순 없다. 자수하고 광명 찾자.
"사실은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이었어, 하지만 지나가는 길이니까 거기에도 가보자!!"
우리는 그렇게 운명의 그 집을 마주하고 만다. 아까 그 집이랑은 분위기 자체가 달랐던 이곳. 좁은 가게였지만 밝은 조명 아래 신나는 음악과 함께 두 명의 이탈리아 청년들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먹고 싶은 면과 파스타 소스를 골라 주문을 하는데 계산해주던 청년이 몇 가지 한국말을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여느 곳과 다른 점은 느끼지 못했다. 요즘은 해외 어딜 가도 상인들이 한국어 몇 마디 정돈 다 하니까.
음식을 기다리면서 의자에 앉아 있는데, 나오던 음악이 갑자기 끊기더니 익숙한 빅뱅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러더니 갑자기 노래를 따라 부르는 그들. 한국인인 우리도 다는 모르던 노래를 한국어로 막힘없이 불러 나간다. 하이라이트 "에라 모르겠다~" 대목에선 요리하다 말고 국자 들고 춤까지 춘다. 후렴구의 "에라 모르겠다"가 반복될 때마다 그들의 퍼포먼스는 화려해져만 갔고 우리는 빵 터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 우리의 반응에 흡족한 청년들은 점점 더 흥부자가 되어갔다. 이것은 우리 둘만을 위한 이탈리아판 난타인가. 둘이서 고작 파스타 1인분 시키고 이렇게 황송한 서비스를 받다니... 숙소 가서 먹으려다 분위기가 너무 좋은 나머지 갓 나온 뜨끈한 파스타를 받아 바 자리에 앉아 먹는데 맛까지 좋다. 그래, 이런 곳이 진짜 맛집이지. 즐겁고 유쾌한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오늘 하루 동안의 고생이 싹 씻겨나간 것만 같다.
음식 하나에 그렇게 즐거워보기는 처음이다. 나름대로의 장사 컨셉이었겠지만 고작 둘 뿐이었던 한국인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다니 단순 장사꾼의 마인드를 넘어 그들이 정말 그 일을 즐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생과 나는 파스타를 싹싹 비우고 쌍 따봉을 연발하며 가게를 나오면서도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이 걸려 있었다.
빅뱅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그 이후 '에라 모르겠다'라는 노래를 들으면 베네치아의 그들 생각 외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각인도 이런 각인이 없다. 한국의 일상을 살아가면서 우연히 저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가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그들은 알까? 자신의 일을 진정 즐기는 그 이탈리안들이 선사해준 추억 덕에 나와 동생의 베네치아는 영원히 '에라 모르겠다'로 기억될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팔순잔치에서 이 노래를 들으며 그루브를 타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즐거움을 감출 수가 없다.
여러분은 어디에 각인되었나요?
안녕하세요?
브런치 신규작가 알맹이입니다. 저는 여행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여행을 자주 다니는 편이지요. 제 여행을 좀 더 예쁘게 다듬어서 담고 싶은 마음에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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