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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맹이 Oct 28. 2017

고요함에 둘러쌓이고 싶을 땐 혼자 북극권으로 떠나라

내향성 인간의 나 홀로 여행 

  나에게는 하루마다 정해진 '말 할당량'이 있다. 일정량의 말을 쏟아내고 나면, 즉 말의 할당량을 채우고 나면 방전되어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진다. 그 후엔 고요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그 무기력감이 회복되는 나는 전형적인 내향성(introversion) 인간이다. 이런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업무시간의 대부분을 끊임없이 떠들어햐만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이 하루에 8시간가량은 여러 사람들 틈에 녹아들어 가 하루 말 할당량의 대부분을 채운 후 집에 가면 그대로 뻗어버리기 일쑤. 이제 나에게 필요한 건? 고요함 속의 휴식!  


  작년 겨울, 오로라 하나 보겠다고 한 달 동안 혼자서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흔히 (자발적으로)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은 성격이 활발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할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올시다. 나 같은 사람도 혼자 여행한다. 맛집에 가서 겨우 한 가지 음식만 맛봐야 하는 게 아쉽고, 내가 나온 사진이 별로 없다는 단점은 있어도 일단 혼자 여행하면 마음이 편하다. 친구나 가족과의 여행이 싫은 건 결코 아니다. 다만 혼자면 심리적으로 편하다는 것이다.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을 때는 함께 하고, 혼자 있고 싶을 때는 언제고 그럴 수 있는 게 나 같은 내향성 인간에게 큰 장점으로 다가왔다.


  그 장점을 백번 활용해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철저하게 혼자가 되기도 했던 만족스러운 영국 여행을 마치고 핀란드 헬싱키로 넘어갔다. 38L 백팩을 메고 삼각대, 핫팩이 잔뜩 든 24인치 캐리어를  끙끙대며 들어 올려 야간열차를 타고 북극권의 시작점인 로바니에미까지 12시간, 로바니에미에서 최종 목적지인 핀란드 북단의 킬로파(Kiilopaa)까지 3시간의 여정이었다. 이렇게 고생해서 온 것에 비해 이제부터 할 것이라고는 이 곳에서 5일간 조용히 잠복해 있다가 밤이면 오로라를 사냥하러 숙소 옆 국립공원을 어슬렁거리는 것뿐이었다. 


영국 기념품 헨지곰과 함께 방에서 잠복 중

  위도 68도에 위치한 이 작은 마을엔 어딘가를 가고 싶어도 갈 곳이 없었으며, 뭔가를 먹으러 가고 싶어도 식당이 없었다. 극야 현상으로 인해 오후 3시면 깜깜한 어둠이 찾아와 길고 긴 밤을 보내야 한다. 그저 눈 앞에 펼쳐진 설경을 즐기며 영하 10~30도의 추위와 친구가 되었다가 밤엔 맥주 한 잔 홀짝이며 오로라를 기다리면 될 뿐이다. 어디 콕 박혀 있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이런 고립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방에만 있기엔 바깥의 설경이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강추위와 귀찮음을 뚫고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하이킹 장비를 빌려서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눈으로는 그 끝을 확인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이 국립공원은 눈 덮인 침엽수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걷고 있는 이 하이킹 코스는 명색이 하이킹 코스임에도 불구하고, 흐릿한 크로스컨트리 자국 외에는 사람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코스 밖으로 조금만 벗어나 발을 헛디디면 허벅지까지 눈에 푹 빠지는, 눈과 침엽수림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곳. 지금 이 곳에 있을 수 있는 게 너무 감사했다.


   신기한 건 눈과 나무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길을 걷다 보니 시각 외에 다른 감각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는 게 느껴졌다. 그다음으로는 걷고 있는 내 발이 눈 덮인 바닥에 닿으며 내는 뽀득뽀득 소리가 들렸다. 음, 그런데 뭔가 어색했다. 뽀득거리는 소리 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의 소리에 좀 더 집중해보기로 했다. 조용히 소리에 귀 기울인 순간, 나는 완벽한 진공상태에 둘러싸였다. 자동차 소리, 사람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 풀벌레 소리,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심지어 바람이 웅웅 거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완벽한 무음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내 생애 이렇게 완전한 고요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비행기조차 뜨지 않는다는 수능 영어 듣기 평가를 볼 때도 사각사각 연필 소리, 코 훌쩍이는 소리는 나기 마련이고, 집에 혼자 있더라도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 밖의 차소리, 생명체의 소리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그런데 난 지금 이렇게 바깥 한가운데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소리로부터 해방되어 있는 것이다. 이 곳에서 소리를 만들어내는 존재는 오직 나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소리를 만들지 않기로 결심했다. 처음 겪는 자연 속의 이 고요함, 세상의 모든 소리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짜릿함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었다. 한없이 조용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눈 앞엔 끝이 보이지 않는 설경이 펼쳐져 있고 그 한가운데서 아무 존재감 없이 녹아들어 있는 게 너무나 행복하고 평온하다. 난 정말 뼛속까지 내향적인 사람임을 새삼 인정해야만 했다.


  이 경험 이후로는 여행 계획을 짤 때 이런 내 성향을 좀 더 적극적으로 고려하게 되었다. 지금도 바쁘고 힘든 일에 시달릴 때면 핀란드의 북극권 마을에서 마주한 그 고요함을 떠올리곤 한다. 내 생애 가장 완벽한 고요함을 느꼈던 곳.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꼭 한 번 가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단, 방한 준비는 든든하게 해야 할 것이다. 


아, 보려고 했던 오로라는 보고 왔냐고?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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