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가방


올해의 버킷리스트를 하나 이뤘다. 바로 명품가방 사기다. 버킷리스트라는 순수한 영역에 명품가방 사기라는 욕망이 가득 낀 버킷리스트를 넣었다. 버킷이 순수하다, 그리고 명품가방이 욕망이라고 생각하는 이 기준은 순전히 내가 정한 것이다.


작년부터 100개의 버킷리스트를 적었다. 사실 작년엔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해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참여했던 프로젝트였는데 막상 1년을 하면서 워크숍도 하고 같이 쓴 사람들과 함께 리스트를 지워가면서 성찰했던 시간이 꽤 나에게 괜찮은 기억이라 올해도 버킷리스트 100개 만들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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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버킷리스트에 적어 내린 것들을 단어로 표현하자면 순수함에 가까웠다. 정말 사소하지만 하고 싶었던 일들을 버킷리스트에 적었다.(100개나 적어야 된다는 마음에 사소해진 거 같다. 인생의 버킷이었다면 더 대단한 걸 적었을 거다.) 예를 들면 하고 싶지만 아이들을 재우느라 시도하지 못했던 드라마 시리즈 정주행 같은.… 일명 소박하지만 잊고 지냈던 소소한 것들, 혹은 하루의 일탈을 끄집어내는 그런 버킷이 많다. 일생의 버킷이 아니라 1년 동안이라는 유한한 기간이라 어쩌면 더 현실 가능한 소박함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의 버킷은 소녀답고 순수한 마음의 나를 드러내는 것에 더 가깝다. 그러나 그곳에 명품가방 사기라니!!! 욕망이 가득한 느낌의 버킷을 올해는 살포시 적어 놓았다. 같이 버킷을 만드는 워크숍에서는 다른 사람의 버킷 중 눈에 띄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질문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의 버킷에 명품가방 사기가 귀엽다 하셨다. ㅎㅎㅎ 반면 나는 나의 욕망의 민낯을 들킨 것 같아서 얼굴이 살짝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사실 명품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명품이 가진 스토리와 가치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내 인생을 명품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큰 관심이 없었다. 굳이 취향을 이야기하자면 명품보다는 신진 디자이너의 톡톡 튀는 개성을 더 사랑하고 합리성을 추구하는 나였다.


명품가방은 사실 미리 선약된 선물이다. 결혼 10주년, 생일 선물, 등등…. 갖가지 타이틀을 알콩달콩 모았다. 손 안 대고 코푸는 마음으로 버킷 하나를 손쉽게 해결할 마음이었다.


“명품가방 사기”가 적혀있는 버킷리스트를 보면서 나의 순수한(?) 욕망에 귀를 기울여 봤다. 사실 이 전에도 몇 개의 명품가방을 산 적은 있었지만 그때를 뒤돌아보니 내가 좋아서 구입했다기보다는 남들의 시선에 더 비중을 두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의 시선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지나 보면 나도 모르게 그런 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나를 발견한다.


결혼하면서 명품가방 하나는 받아야지!
직장 다니면서 명품가방 하나 없는 건 이상하잖아??


이런 이유가 더 컸던 것 같다. 그들이 사주는 명품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심지어 그렇게 보기에 좋아 산 명품가방은 실용성 측면에서 떨어져서 그런지, 박스에 그대로 모셔져 있다. 빛도 못 본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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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올해의 버킷을 바라보면서 명품가방이 주는 의미를 생각했다. 박스에서 빛도 못 본채 10년째 담겨있는 명품가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명품가방을 적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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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10주년, 사실 누구에게나 의미 있는 시간인 만큼 나에게도 큰 의미로 다가왔다. 결혼을 한다는 것,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에 대해서 결혼할 때는 그리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사랑하는 감정만으로 그 외의 것들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전혀 모를 만큼 나는 철이 없었다.

이런 철없고 자기중심적인 나에게 결혼 생활은 고난의 허들이었다. 남편의 언어는 때로는 외계어 같다고 느꼈고, 나에게 기본이 누군가에게는 기본이 아니었고, 상대의 기본은 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기준이었다.


더구나 육아는 철인경기보다 더했다. 나의 인내력의 한계를 느끼게 했고, 자기중심적인 나에게 너무나 고달프고 어려운 숙제였다. 작고 어린 존재이기에 더더욱 찍소리 못하는 상황이 숨도 못 쉬게 힘들었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의미 있는 사람이 된다는 그 책임감은 나를 괴롭히기까지 했다.(네가 선택한 결혼과 육아잖아??라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만큼 나는 미성숙하고 자기중심적인 나였다는 고백이기에 딴지는 걸지 마시라~~)


언제나 남편은 바빴고, 시댁과 친정은 지방에 있어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꾸역꾸역 결혼생활을 하고 육아를 하는 것이 참 버거웠던 시간이다. 때로는 정말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싶었던 날들도 많다. 그렇게 10년의 결혼 생활…. (그렇다고 불행했다는 것은 아니다)


신랑은 승진이라는 사회적 조건을 통과하면 더욱 안정적인 생활로 안착할 수 있다고 믿었고, 나는 순간의 행복을 함께 하지 못하는 이 상황이 그저 승진이라는 결승점에 도달되어서 끝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결과는 한마디로 날벼락이었다. 집에 빨간딱지가 붙는 것 같은 대사건으로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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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의 결혼생활, 꾹꾹 눌러 담아 찰랑거리다 못해 넘치기 일보 진전의 나는 허탈감에 멘털이 나가버렸다. 나의 노력과 기다림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신랑이 원하는 지점까지 가면 이 극도의 피로감이 끝날 줄 알고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나는 필라멘트가 나간 전구가 되었다.


결혼 10주년엔 하와이로 여행을 떠나자고 했던 우리의 계획과는 무관하게, 남보다 더하게 우리는 서로에게 바닥을 드러내며 미친 듯이 싸웠고, 치열하게 부대꼈다.


이 치열한 1년의 시간이 지나가고, 어느 정도 사고가 수습 중이고(?), 나는 조금씩 단단해졌다. 자기중심적이고 철없기는 여전하지만 그전보다는 내가 조금은 더 자란 것 같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지금의 내가 더 좋아졌다.(이놈의 에고이스트…)......


올해 적은 버킷의 명품가방 사기는 10년의 치열하고 어려운 시간들을 잘 견뎌준 나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기만 나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물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면의 성숙과 완성도를 높여가면서 나 자신을 명품처럼 만들어가고 싶었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샀던 명품들은 빛을 보지 못한 채 여전히 박스 안에 있다. 한 번씩 꺼내보지만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여전히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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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이 더 명품스러워지는 것은 저렇게 박스에 모셔 놓을 때가 아니라 손때가 묻게 이용하고 귀하게 관리하고 수시로 만지면서 자신만의 역사를 쓸 때 그 명품은 빈티지가 되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명품이 대를 이어 대물림되는 가치를 가지는 것처럼, 나 역시도 나를 그렇게 가꾸고 바꿔가면서 존재만으로도 의미 있고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독보적인 빈티지로…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대물림될 수 있는 그런 존재와 가치를 전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우뚝 서고 싶다.


명품가방 하나 사면서 무슨 사족이 이리 많나 싶지만, 버킷에 왜 나는 명품가방 사기를 적었을까? 나의 내면의 욕망과 방향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본다. 박웅현의 여덟 단어에 박웅현이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아이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는 답변에 딱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자존을 선택하겠어. 이 세상에 중요한 가치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자존이 제일 기본이라고 생각해.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 이게 있으면 어떤 상황에 처해도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명품을 소유한다고 자존이 서는 것은 아니지만 명품이 가진 자존을 벤치마킹하는 삶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스스로를 존중하면서 가꿔나가면 매번 행복을 찾아가는 힘을 갖게 될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빈티지가 되어가는 내가 더 좋아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