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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loco Jan 08. 2020

서른아홉 번째 편지

2020년 1월, 호아빈의 리본 


저희 집엔 선풍기 하나가 있습니다. 높이가 낮고, 크기가 크고, 팬은 쇠로 되어 무겁기까지 합니다. 리모컨은 당연히, 없습니다. 전압도 맞지 않아 110v로 변환해주는 ‘도란스’가 있어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특별히 고장난 적이 없어, 아니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어서 매년 여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더 좋은 선풍기를 사도 에어컨을 장만해도 몇 번의 이사를 가도 굳건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래왔다고 합니다.


함께, 자라왔습니다. 매년 더위가 찾아올 때면 엄마를 도와 선풍기부터 꺼냈습니다. 겁이 많아 손을 넣어볼 생각은 못 했지만, 으레 보통의 아이들처럼 그 앞에서 아-하고 소리를 지르곤 했습니다. 시원한 바람을 더 많이 차지하겠다고 누나랑 자리싸움을 벌이는 것도 일상이었습니다. 그렇게 공들여 쟁취한 선풍기를 틀어놓고 할머니와 함께 수박을 먹는 게 여름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종종 묻곤 했습니다. “할머니, 이 선풍기는 몇 살이에요?” 할머니의 대답은 늘 같았습니다. “너보다 열 살-이 뭐야. 훨씬 더 많지. 그거 다 너희 할아버지가 월남 가서 사 오신 거야. 일제가 튼튼해. 고장이 없어”


그렇게, 자라왔습니다. ‘일제’가 튼튼한 줄 알았고 할아버지는 월남전까지 다녀오신 ‘용사’라고 믿었습니다. 계급이 높을 때 가서 총 한 번 안 쏘고 막사에만 있다가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월남전에 파병 갔다 온 덕분에 너희 아빠 삼 형제 모두 대학에 보낼 수 있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알았습니다. 월남전은 우리에게 ‘고마운 전쟁’이었다고. 가난한 나라에서 군인을 보내 목숨으로 돈을 벌어온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그게 또 다른 수많은 목숨을 빼앗아 간 일인 줄도 몰랐고, 우리가 아닌 누구에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한참 뒤에 일입니다.


매년 여름이 되면 선풍기는 돌아갑니다. 그래 왔고, 그럴 것입니다. 무릎을 내어주시던 할머니는 더 이상 뵐 수 없지만, 할아버지는 여전히 선풍기 앞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실 겁니다. 그리고 저는 그 옆에서 손을 잡고 역시나 여름에 인사할 터입니다. 한 번도 묻지 않았습니다. 깨닫고 난 다음에도 차마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몇 번의 여름이 지나갈 동안에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저는 대신, 갚아 나아가려고 합니다. 선풍기가 늘 시원한 바람을 내어주었듯이, 저는 조금이나마 ‘따뜻한 바람’이 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그게 마음이든 후원이든 우리가 매년 모았던 학용품이든, 어느 무엇이 되었든 말입니다. ‘호아빈의 리본’을 통해 천천히 그리고 오래 갚고, 나아갈 예정입니다.


2020년이 되었습니다. 호아빈의 리본 모두에게는 ‘건강하고 좋은 바람’이 부는, 이루어지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2019. 01. 07.

김정우



*

후원하고 참여하는 단체가 있습니다. 1년에 한 번 평화 캠프도 열고, 몇몇은 베트남에 직접 가기도 하며, 송년회를 개최하기도 합니다. 매달 회원 모두에게 편지로 인사를 나누는 일을 돌아가며 하는데 2020년 1월 서른아홉 번째를 맡았습니다. 왜 여기에 마음을 두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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