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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loco Mar 10. 2020

바깥의 감정을 안으로 들여놓지 않는 습관

당신을 당신으로서 온전하게


못된 아들이었다. 어지간한 대답은 “몰라”라는 말로 일관되게 통일했으니까. 밥 먹었니? 몰라. 저녁 먹을래? 몰라- 과일 줄까? 몰라아아! 내일 아침엔 몇 시에 나가니? 모른다고. 아침엔 뭐 먹을래? 아몰라! 그래 좀 쉬어라. 몰라? 의 반복. 대부분의 대답은 머릿속에 있으면서도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오로지 몰라뿐. 엄정화도 아니고 뭘 그렇게 몰라.


이유는 간단했다. 말을 하기 싫어서. 아, 그게 엄마랑 대화하기 싫었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아빠가 물어봤어도 분명 몰라, 모른다고! 하다가 호되게 혼났겠지. 그러고 보면 엄마의 인내심은 참 놀랍도록 대단하다. 어떻게 그 모든 모름을 다 견뎌낼 수 있을까. 그래서 엄마가 늘 나 같은 애 낳으라고 하시나 보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엄마 이야기를 할 때마다 진심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런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싫지 않다. 엄마 좋아하는데 왜. 그게 아니라 그냥 말하기가 싫은 거다. 그저 아무 어떤 말이라도.


“아, 진짜요?” 같은 감정도 논리도 없는 대답을, 말을, 통하지도 않는 이야기를 계속 바깥에서 하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은 나와 다르고 그러니까 그 다른 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민해야 하고 그다음에야 내놓은 말 한마디가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보다도 못한 존재로 흩뿌려져 사라지는 경험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하니까. 어느 순간부터 그토록 좋아하던 라디오를 잘 안 듣게 된 것과 같은 이치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더 이상 듣기도 싫고 나의 말을 아무것도 하기도 싫어지는 순간. 그게 회사, 사회를 벗어난 공간 그리고 시간에서 탈칵, 하고 스위치가 올라오는 거다. 그래서 저녁으론 새우튀김이 먹고 싶지만 모르고, 아침엔 8시에 나갈 건데 모르며, 아침엔 과일 조금만 먹으면 되는 걸 알면서도 모르게 되는 거다.


그것이 과연, 결혼한다고 달라질까. 아빠 엄마랑 살면(우리 아빠는 엄마, 아빠라고 쓰면 아야어여 모음 순서에 안 맞는데 왜 엄마부터 쓰냐고 삐지니까) 내 방에 틀어박혀서 말도 안 하고 방해받지 않을 수도 있지. 단 둘이 사는 집에 누군가 한 명이 다짜고짜 혹은 매일 퇴근하자마자 어느 방에 들어가 저러고 있는다고 생각해 보면, 음. 일단 나의, 당신의 배우자는 엄마만큼의 인내심을 보여줄 수 없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 간에 생기는(혹은 생기면 다행인) 참을성이니까. 그러니까 나의 몰라 공격을 두 번도 견디지 못할 것이고, 또 다른 걱정과 염려를 보일 터다. 그것도 모른다고 대답하면… 아 생각하기 싫다. 더 이상의 설명은 여기서 생략한다.


사실은, 말만 안 해도 다행이다. 성숙하지 못한 우리는 바깥의 감정까지도 상대에게 투여하니까. 의지가 되는, 기대고 싶은, 나의 가족이며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핑계로. 그들이 나에게 수정을 요구하지 않았고 그들이 나에게 반려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나에게 어처구니없는 지시를 하거나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성질을 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의 연장으로 모른다는 말을, 짜증을, 투정을, 화를, 무시를 해버리는 일이 일어난다. 뭐, 꼭 배우자나 가족이 아니더라도 당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도 혹은 반려동물에게도, 그러고 있지 않은가.


아니, 그럼 나는 누구한테 솔직해야 하나. 집에서 내 맘대로 편할 수도 없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이런 거 터놓지도 못하나. 누구한테 기대고 의지하나, 라는 말을 하고 싶다면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그대로 가져갈 계획이라면, 그렇게 하시라. 그리 해도 된다. 인생 한 번뿐인데, 낮 밤 안 가리고 내가 아닌 다른 이의 눈치만 보다 갈 순 없으니까. 그렇게 가족에게 배우자에게 친한 친구에게 화내고 막말하고 무시하고 짜증 내면서 왜 그것도 이해 못해주냐고 따지시라. 아주 정중하게 내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달라 요청하시라. 사랑하니까. 당신은 모르겠고, 내가 사랑하니까. 그래서 그들이 지쳐 나가떨어져도 그때도 부디 관대하게 그러하라 말하시라.


회사에 놀러 온 배우자가 나를 슬슬 긁기 시작했다. 서로 놀리는 재미로 사는 건 알지만 그래도 오늘은 거기서 멈추었으면 좋겠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선을 넘는다. 그렇게 임계점을 지나친 순간, 짜증을 내려하는 찰나, 문득 생각이 났다. 물이 담긴 컵 하나가. 업무의 강도, 클라이언트와의 관계,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 모든 것, 같이 일하는 이들의 말 한마디가 켜켜이 쌓여 분노가, 컵의 물이 거의 가득 찬 이미지가. 그리고 거기에 당신이 살짝 몇 방울을(보다 사실은 조금 더 많이) 더한 거다. 그렇다면 그 화를 온전히 당신에게 쏟아버리는 게 옳은 일인가. 내 컵이 비어 있었다면, 나는 당신에게 화를 낼 것인가. 두 질문의 대답은, 명확했다. 그래서 웃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좀 썩소 같긴 했는데. 그래도 그게 옳은 일이라서. 물론 그러고선 나 스스로 기특하다 여기저기 자랑한 건 안 비밀이지만.


당신을 당신으로서 온전하게 대하는 노력을 한다. 바깥의 감정을 우리 안으로 들여놓지 않는 습관을 만든다. 노력이라는 건, 좋은 습관이라는 건 정말이지 내 마음대로 잘 스며들지 않는다. 넘치는 물에 대한 고찰은 어쩌면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같은 일에 가깝다. 그래 그러니까, 습관이라고 하는 거지, 라는 생각으로 찬찬히 마음의 컵을 만들어 본다. 엄마만 보면 그게 자꾸 소주잔 같아져서 그렇지 …. 뭘 왜 그렇게 몰라.



2020.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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