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름이 희망이 아닌 이유

다양한 움직임과 마음들에 대하여 [다행다심] #2

by yeedle


맞아. 수영금지라는 말이 있었어...(그린이 이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내가 어릴 땐 동네마다 대중목욕탕이 두 세 개쯤은 있었다. 동네에서 가장 크고 넓은 목욕탕은 친구들과 나의 주말 단골 모임 장소였다. 이곳에서 늘 우리만의 수영 레이스가 펼쳐지곤 했다. 참가 인원은 주로 네다섯, 많을 땐 일고여덟. 없는 건 없고, 있을 건 있던 우리만의 리그였다. 올림픽 수영 종목 규정에 한참 못 미치는 짧은 길이에 코스 로프도 없었지만, 심판과 기록원이 있었고(방수 기능이 있는 돌핀 손목시계는 우리만의 공식 기록 장치였다), 관중들이 있었다(우릴 보며 혀를 끌끌 차시거나 간혹 얌전히 있으라고 소리를 치시는 동네 아저씨, 할아버지들. 그래도 대부분 눈 감고 넘어가 주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에게 특별한 기술이랄 건 없었다. 물 안과 밖의 경계에서 대차게 팔을 휘젓는 정도였으니까. 사실 이기고 지는 것보다는 여럿이 함께 모였다는 사실이 마냥 좋던 시절이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래도 나름 치열하긴 했다. 내가 흥미를 가진 시합은 사실 따로 있었는데, 번외경기, ‘물속에서 숨 오래 참기’였다. 레이스는 덩치가 커서 힘이 좋거나, 팔다리가 길거나, 동작이 날쌘 친구들이 대부분 상위권이었다. 하지만 숨 오래 참기는 달랐다. 겉모습만으로는 승자를 가늠할 수 없었다. 호흡을 관장하는 폐, 죽어도 이기겠다는 정신력을 담당하는 뇌 같은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멋진 프리다이빙(그린이 이들)

숨을 참는 건 힘든 일이다. 오래 지속되면 큰일(?)이 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살면서 숨을 참아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의 물속 숨 참기 시합 이라든지(나름 치열했다니까), 딸꾹질이 나올 때라든지... 그런데 어떤 이들은 숨을 참는 일을 업業으로 두고 있기도 하다. 프리다이버들이다.


대한민국에서 맨몸으로 바닷속에 가장 깊이 내려갈 수 있다는 국내 프리다이빙 1세대 김선영 씨의 공식 기록은 83m. 그녀는 바닷속으로 내려갈수록 바다에 안기는 느낌,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지는 느낌이 좋다고 했다. 얼마나 좋은지 고등학교 음악교사에서 프리 다이버로 전향했다고 할 정도니 뭐. 그녀뿐만 아니라 많은 프리 다이버들은, 마스크, 스노클, 핀, 그리고 부력을 상쇄할 무게추만을 달고 깊은 바다를 향해 거침없이 뛰어드는 프리다이빙에는 다른 데서는 경험할 수 없는 자연의 풍경과 그 신비로움, 자유를 맛보는 특권이 있다고 말한다. 이 특권을 누리기 위해 프리다이버들은 호흡을 멈추고 느리게 움직인다. 그래야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이니까.


현대사회의 눈부신 변화 속도를 보고 있자면 오늘날 우리들의 ‘빨리빨리’ 외침이 응당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 속에서도 멈추고, 그래서 느려지고 불편해지지만 이를 감내하는 용기(勇氣)들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래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까. 프리다이버들이 숨을 참는 억압을 견뎌내고 진정한 자유의 가치를 가질 수 있던 것처럼 말이다. 경쟁이나 위기에서는 빠름을 고수하는 것이 곧 승리와 안전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 경쟁이나 위기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빠름을 고수하는 것만이 희망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때로는 불편하지만 느리게, 나아가 멈출 줄 알아야 한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것에는 치유가 없다.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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