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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죄가 없다

다시 서울, 서울을 탓해서 미안하다

사람들이 서울에서의 생활을 뒤로하고 귀농, 귀촌, 귀향을 할 때에는 항상 서울을 탓하고는 한다. '서울은~' '도시생활은~' '도시인은~'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서울은 처음부터 죄가 없었다. 서울을 변호하고 싶다. 지금의 서울을 만든 것은 이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 아닌가 하고 말이다.  


사람들의 욕망이 서울이라는 도시를 만들어 왔고 이제는 그런 서울을 떠나려고 한다. 이제는 효용가치가 없다고 간단히 버려 버리다니. "서울을 돌보아주고 싶다." 충청남도 홍성에서의 귀농귀촌을 마치고 돌아와 서울을 바라보며 든 생각이었다.  

서울의 숲 길. 서울에 이 숲들이 남아있지 않다면 나는 어떻게 숨 쉴 수 있을까

홍성으로 삶터를 옮겨갈 때 생각한 것이 있었다. 지금은 환경의 힘을 빌려서 자연이 풍부한 농촌에서 지내지만 사는 환경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나답게 살 수 있는 힘을 반드시 키워나가겠다고. 역시 그러했다. 처음에는 산과 논밭 그리고 그곳에 깃들어 사는 동식물들이 주는 건강한 힘을 느끼면서 행복하기도 했지만, 그곳에서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전적으로 나의 몫이었다. (왼손은 거들뿐) 중요한 건 늘 내 자신의 선택이었다.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간단히 그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먼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를 알고, 싫은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힘이었다. 


서울에서의 삶에서 거부하고 싶었던 것, 바꾸고 싶었던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피로사회, 과로사회, 가부장제, 권위주의, 갑질, 갑을병정의 사회관계 등등등 그렇다면 이런 것이 다른 장소, 다른 일에서는 없을까? 

그런데 과거의 거부하고 싶은 상황 속에서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했었나? 




나는 이직이나 귀농귀촌을 할 때마다 그것을 과대평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과소평가보다 더 위험한 것이 과대평가였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해서 환상과 기대만 갖고 접근하는 오류를 저지르며 나는 뼈저린 반성을 해야만 했다. 


도시에서 농촌이라는 무대로 바뀌었을 뿐 사람 사는 사회는 비슷비슷 하였다. 


농사일은 체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함께 일해야 할 때, 높은 강도로 많이 일하는 사람의 노동력이 기준이 되어서 그것에 맞추어 일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농사일은 손이 많이 가는 일이라 적은 면적에서 높은 수익을 올리기란 어려워, 프리미엄이 붙은 브랜드성이 강조되거나, 일손을 돕는 사람들을 단기적으로 고용하거나, 어찌 되었건 규모의 경제로서 특정 규모 이상의 면적에 농사를 짓거나 다양한 투잡을 통해서 생활이 가능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러다 보면 쉴세 없이 일을 하게 된다거나, 다른 사람을 일꾼(소)으로 보고 도구로서 대하는 일도 벌어진다. 농촌에도 토착민, 새로운 귀농귀촌인 등 그 안에서도 다양한 그룹이 형성되어 있으며 자주 어울리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뉘고  땅이나 하우스, 사업 등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다툼이 벌어지고는 한다.  


게다가 도시 사람은 어떻다 라고 낮추어 보지 않고서는 자신의 삶을 설명할 길이 없는 걸까? 


나는 시골에 사는 동안, 순박한 도시인 교육생을 많이 보았다.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자세로 먼저 농촌에 살기 시작한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는 겸손한 자세였다. 그에 반해 오히려 상대를 계몽하려 들고, 자기 말만 늘어놓으며 교육하려 드는 교만한 농부와 귀농귀촌인, 활동가들을 보면서 혹시나 나도 내 친구들에게 그러지 않았나 싶어서 뒤늦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과연 이것이 도시에서의 생활과 무엇이 다른가? 과연 도시와 농촌이라고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생각할 일인가? 자문해 볼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환경은 처음에는 보조바퀴 같은 것이라고. 언젠가는 그 보조바퀴를 떼고서도 자전거를 힘차게 밟으려면 나라는 사람의 중심이 바로 서 있어야 했다. 결국 사회적인 큰 문제에 다 같이 목소리 낼 때뿐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가 있는 곳에서 홀로 내는 목소리와 행동이 더 중요했다.

 

완벽한 환경만 준비되면 나는 다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언제까지이고 지금 용기를 내서 해야 할 일을 미루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용기를 내어 말하고 행동 할리가 없었다. 


지금 여기, 내가 있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에 목소리 내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할 수 없다. 그러니 떠나기 전에 한 번쯤은 싸워야 하는 것 아닐까? 

두리번 두리번 다니다보면 다람쥐, 꿩 심지어 노루(인지 사슴인지)도 볼 수 있는 서울이다. 

 


'그냥 나' 


알바생, 파견직, 계약직, 영리 회사, 비영리 회사, 창업, 농촌생활을 겪고 그냥 나, 보통의 내가 되어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다른 미사여구가 필요 없는 내가 되어 서울의 풍경을 다시 바라보니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걸 바라보는 나라는 사람은 제법 많이 변했다고 느꼈다. 


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오디세우스가 떠오를 만큼 꽤 많은 곳을 휘젓고 돌아다녔고 그 덕분에 내 인생관은 많이 달라졌다. 몸에 약간의 병과 가난을 얻었지만 마음은 묵직했다. 소유할 만한 물질과 공간은 대체로 사라졌고, 대신 감동과 경험은 몸과 마음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 그리고 좋은 친구들도 함께다. 


고백컨데

서울은 죄가 없다. 서울을 탓해서 미안하다. 

영리 회사는 죄가 없다. 영리 회사를 탓해서 미안하다. 

비영리는 죄가 없다. 비영리를 탓해서 미안하다. 

농촌 또한 죄가 없다.  농촌을 탓해서 미안하다. 


서울이 문제가 아니라 그곳에서 사는 나, 나라는 사람이 항상 문제였다. 

잘 싸울 만큼 강하지 못했다. 

나를 지키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세상과 싸우지 않아도 될 곳을 찾아가고 싶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농사꾼을 꿈꾸었지만, 농사꾼은 못되고 약간의 싸움꾼은 되었는지 모르겠다. 

싸움의 기술이 늘어서인지 기운이 딸려서인지 당분간은 어딘가로 떠날 생각은 안 든다. 

이제는 모두가 떠나고 외면할지도 모를 서울이라는 곳에 남아, 나는 자연을 다시 발견해 나가고 싶다.


그냥 그거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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