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에 사는) 엄마

53. 냄새

by Aloha J

냄:새 사람이나 동물의 코를 자극하여 어떤 감각을 일으키는, 물질의 독특한 성질.

향기. 꽃이나 향수, 향 같은 데서 나는 좋은 냄새.

냄새로 기억하는 장면과 장소가 많다. 어릴 적 집 주변 공사장에서 나던 목재 더미 냄새, 덜 마른 시멘트 냄새가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그와 비슷한 냄새가 나면 문득 6살, 그 동네가 생각난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내가 어릴 적에는 설악산 국립공원, 지리산 국립공원 같은 곳에 놀러 가면 '향나무 연필' 12자루를 세트로 팔았다. 그 연필의 필기감이 좋았냐 하면, 기억은 없다. 더 예쁜 연필을 골라 쓰느라 바빴으니까. 열심히 사용하지도 않았지만, 그 연필의 나무향은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산에 놀러 갔던 그때를 떠오르게 한다.

나무 태우는 연기의 매캐한 냄새가 연하게 차가운 공기 속에 퍼지는 향은 대학교 1학년 겨울 방학, 산골 놀이학교 교사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두 달간 꽉꽉 채워 맡은 냄새다. 스무 살의 패기로 견뎌낸 고된 시간이지만, 깜깜한 산속에서 쏟아져 내릴 것 같은 그 밤하늘의 별들을 떠올리게 한다. 지나가다 맡게 된 향수 냄새에서 예전 그 향수를 사용하던 사람이 떠오를 때도 있다. 이름도 생각나지 않지만 그 향만은 생생하다. 외국인들이 사용하는 향수 중에서 어떤 특정향은 두바이 공항을 오갈 때마다 코를 꽉 채웠던 냄새라서 그 시절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초등학교 시절, 짧은 전학으로 머물렀던 학교의 오래된 교실의 쿰쿰한 나무냄새며, 중고등학교 시절 냄새. 여행지에서 맡았던 냄새.

초가을 살짝 서늘해지면서 여름이 지나가는 냄새. 겨울 찬 공기 속에서만 내 후각을 자극하는 겨울 냄새. 봄이 되면 느껴지는 봄 냄새... 내게는 냄새로 추억하는 것들이 많다.


좋은 기억만 있지는 않다. 아이가 열이 나면 나는 열냄새를 맡는다. 아이가 아플 때 나는 냄새는 엄마의 마음을 녹게 한다. 그런 아픈 냄새도 다 내 것이다.

역한 미세먼지 냄새도 지독해서, 사계절 뿌옇게 고담도시처럼 변하는 날이면 그 미세먼지 냄새에 온 몸이 아플 지경이다.


아이도 나의 코를 닮았다. 사흘 전 첫눈이 내리고 다음 날, 등원 길에 아이가 차가운 공기 속에 눈 냄새를 맡았다. "우와~엄마~겨울 냄새가 나요. 아, 겨울 냄새 너무 좋아요."

정확히 겨울 냄새였다. 차갑지만 상쾌하고, 한숨 깊게 마시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겨울 냄새였다.

"맞네! 진짜 겨울 냄새네! 너무 좋다~"

고 짧은 등원길에 아이와 둘이 손을 꼭 잡고 본격적으로 만끽하는 겨울 냄새를 흠뻑 즐겼다.


요즘은 추운 날이라서 아침에 따뜻한 수프를 자주 만든다. 엄마의 사랑을 듬뿍 담은 온기를 채워서 아이의 하루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랄까... 뼈건강에 좋은 토마토를 듬뿍 넣어 만든 토마토 수프, 아이의 든든한 하루를 위해 만드는 들깨버섯수프, 간단하지만 영양을 꽉 채운 계란 야채 수프를 번갈아가며 아침을 준비한다.

토마토 수프를 끓이고 있으면 아이가 일어난다. "엄마아....." 나를 부른다.

"일어났어? 울 애기. 좋은 아침이야." 하고 안아주면 "엄마아~토마토 수프다... 맞죠?" 하며 냄새로 그날의 수프를 알아맞힌다. 아이도 이 음식 냄새로 유년시절을 기억할 것 같다.


엄마 품에 꼭 안겨서 "흐음~엄마 냄새 좋아." 하면서 고개를 파묻는다. 내 코를 내 피부 냄새를 맡으면 아무 냄새가 안 나는데, 아이는 엄마의 냄새가 난단다. 엄마 냄새라. 아이가 좋아하는 엄마 냄새도 내 아이의 추억에 스며들어서 사라지지 않으면 좋겠다.


아이는 바다에 가면 바다 냄새를 좋아하고, 산에 가면 산 냄새를 좋아한다. 건너편 아파트에 근사하고 우아한 향기를 발하는 꽃나무가 있는데, 그 꽃이 피는 계절이면 우리는 그 꽃나무 앞을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봄과 여름 사이 라일락 꽃 향기도 함께 맡고 장미가 피면 아이는 호흡을 깊게 들이마시며 장미 향을 즐긴다. 아이는 꽃을 보면 향을 먼저 맡는 낭만적인 꼬마가 되었다.


해당화 향기를 아는가. 해당화는 우리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18번 곡, 섬마을 선생님에서나 들어봤던 이름인데, 그 해당화를 처음 만난 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동남아 리조트 어디에선가 맡아봄직한 은은한 이국의 향기가 그 안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노래 속 해당화 피고 지는 (남쪽 어딘가의) 섬 마을이었구나....

그 향기를 한강 공원에서 만난 이후로 매년 해당화 향기를 맡으려고 한강 공원을 갈 때마다 그 길을 일부러 찾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그 향기를 내 아이에게도 소개해줬다.


겨울이다. 집에 귤이 떨어지지 않는 포근한 겨울. 귤을 먹을 때는 껍질을 까서 향기가 그득그득 담겨있는 그 껍질에 코를 댄다. 아이와 함께 잠깐 상큼한 겨울 행복을 누린다.

아침 차가운 공기를 덥혀줄 보리차를 끓이면서 따뜻한 겨울 냄새로 하루를 시작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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