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에 사는) 엄마

107. 베테랑...?

by Aloha J

의도하지 않게 주부라는 커리어가 지금껏 살면서 쌓아놓은 다른 커리어보다 더 긴 경력을 갖게 되었다.

막연함으로 시작한 신혼 첫 아침. 다행히 설거지 하나만큼은 굉장히 자신 있던 터라

음식을 하는 건 애를 먹었지만, 그 흔적을 깨끗하게 치우는 작업만큼은 능숙했다.


주부 7년 차, 주부 10년 차라는 표현을 볼 때마다 우와, 내공이 보통이 아니겠구나 하는 감탄이 터져 나왔었는데, 그 길게 느껴졌던 누군가의 내공이 내게는 이미 훌쩍 넘겨 11년 차라니...

집안일이라는 끈기와 세심함과 정교함을 요하는 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아왔다. 육아의 시간 동안은 주부로서의 삶은 오로지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아이의 주변을 치우는 일에 집중했다.


빈 벽을 참아내지 못해 그득그득 채워대던 신혼 1년 차를 지나 뭔가 물건이 쌓이는 걸 견뎌내지 못하는 미니멀라이프를 선택하게 된 것도 주부로서의 안목과 취향의 변화라고 해야 할까...


11년 차 경력이라면 뭐든지 뚝딱 할 것 같은데 주방에서는 여전히 한정적이고 익숙한 것들에만 뚝딱의 법칙이 적용되고 있고,

아이가 이만큼 자란 덕분에 집안일이 한결 수월해졌다는 것 외에는 내게 큰 전문성은 없어 보인다.

11년을 주부로 살다 보니 잘 비우고, 잘 치우는 것은 더 그 기능이 강화되었을 뿐.(좋아하는 분야 한정.)


엄마의 20년(오소희 작가)

어떤 꿈은 끝내 사라지지 않고(정희 작가)

엄마의 꿈은 거실에서 이루어졌다(신은정 작가)

아이를 키우니 팬클럽이 생겼습니다.(정소령 작가)

엄마로서의 삶에 한 스푼 용기를 부어보는 책들을 작년부터 찾아서 읽어보게 되었다.

아이가 학교 입학을 한 후 나는 어떤 엄마로,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


나의 생각과 아이디어는 왠지 트렌디하지 않고, 아날로그스러우며, 시대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아직 생각의 줄기를 계속 뻗어가 보는 중이다. 어릴 적 공부하면서 그렸던 마인드맵처럼.

상황과 시간이 여유롭지 못하지만, 아이의 입학이 나에게도 새로운 인생 입학의 첫 시작이 되고 있다.


주부로서의 경력만큼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할애할만한 베테랑이 될 일을 찾고 있다.

아이를 잘 키우며 조용히 안으로 내 에너지를 품고 사는데만 주력했는데,

아이가 성장한 만큼 엄마의 방향도 조금 변화가 생기고 있다.


우리 모자(母子) 모두 용기를 내는 3월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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