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에 사는) 엄마

12. 미디어 중독자가 책 육아 선택한 이유

by Aloha J

스크린 타임,

오늘 12월 28일

7시간 4분.

분명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

이 모든 엉망의 원인은 어제저녁에 겁 없이 마신 커피라고

나 스스로에게 변명을 늘어놓는다.


7시간?

하루에 딱 7시간 만이라도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던 그 7시간.

이렇게 허망하게 흘려버렸다.

무기력하게, 무의미하게, 유해하게.

항상 후회한다.

아.. 이 시간에 차라리 책이라도 읽었으면...


난 미디어 중독자다.

어릴 때부터 텔레비전을 그렇게 봤다.

방학이면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느라

머리가 멍해지고, 눈이 아프고, 구역감이 들 정도로

그렇게 미디어에 빠져 살았다.

그리고 어김없이 느꼈던 후회와 패배감.

어릴 때는 친구랑 노는 것보다

나를 즐겁게 하는 만화가 가득한 화면을 좋아했고.

청소년기도, 대학 입학 후에도

나는 틈만 나면 텔레비전 앞으로 습관적으로 도망쳤다.

도망이었다. 어색한 인간관계에 대한 피로와 두려움,

나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을 텔레비전으로 잊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또 아이러니하게 뭔가 읽는 걸 동경했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과 나누는 대화의 여유를 동경하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의 책에 대한 열정을 동경한다.

이런 동경만큼은 내 의지로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한다.


국민학교 4학년, 아버지의 일로 인해 지방으로 이사를 갔다.

대문 말고, 집 보일러실 쪽에 난 작은 문을 지나

큰길 오른쪽으로 걸어간다.

아삭한 숙주와 함께 먹으면 참 맛있는,

하지만 언제나 아귀가 부족하다 느꼈던

아귀찜 가게를 지나 베이징덕 가게 앞으로 건넌다.

언제나 낮에 문이 잠겨있던 정체불명의

이 가게를 지나면 큰 사거리가 나왔다.

그곳에서 왼쪽길을 따 라가다보면

이창호 기사의 아버지가 한다는 시계방이 나왔고,

조금 더 올라가면 제법 큰 규모의 '홍지서림'이 있었다.

(어릴 적이라 그 서점이 커 보였다.)


혼자 서점에 가는 건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11살의 나를 있어 보이고

멋져 보이게 만들어주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책 한 권을 진득하게 읽지는 못했다.

이 책, 저 책 표지와 제목을 훑다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초콜릿 공장의 비밀'

같은 책들을 읽어보기도 했다.


서점에서 좋아하게 된 책은 의학스릴물 소설이었다.

로빈 쿡이라는 작가가 쓴 '바이러스'를 처음 골라서 사 온 날.

나는 이층 내 방에서 흥미진진하게 그 책을 읽었었다.

브레인, 메스, 감염, 6번 염색체... 그 뒤에 읽은 책들은

바이러스만큼이나 몰입도 있게 읽지 못했기 때문에

내용은 기억이 잘 안 난다.


불안, 걱정 따위를 잊으려고 선택한

텔레비전, 스마트폰, 인터넷은 후회만 더했지만

적어도 책을 읽는 시간은

나를 좀 더 희망적인 상황으로 이끌어줄 것 같았다.


살면서 힘든 하루를 단순한

도파민덩어리로 보상하는데 익숙해지느라

책을 놔버리고 꽤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마음 한편에는 책에 대한 의무감과 미련을

꾸역꾸역 쌓아 올린 채..


태교를 위해 펼친 책들 사이에서

두텁고 단단한 만족감을 경험했다.

사랑하는 아이의 인생에 이런 감정이

풍성하게 넘치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자라는 아이와 함께 엄마의 책 읽기도

키워가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강남(에 사는)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