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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도깨비도로

비와 함께 놀러 왔다 홀연히 사라지는 작은 친구


방에서 그림 그리다 보니 문득 생각난 한 장소가 있다. 파란 철문을 열고 들어가, 파란 희망을 품으며 작업하다, 작업이 막히고 더위에 지칠 땐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쉬어가던 그 공간. 나의 하와이 아뜰리에, 미술학과 316호.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소중하고 특별했던 이 공간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기록해두려 한다.

하와이 스타일의 이른 아침 등교길.


3년 동안 한결같이, 아침 7시가 되면 내 스튜디오 (작업실)의 무거운 파란 철문을 열고, 맑고 투명한 옥색 유리벽돌 도어 스토퍼로 문을 고정하면 하루 일과가 시작되었다. 스스로 정했던 하루 작업시간은 8시간이었다. 더위에 약한 생존형 올빼미였던 나는, 시원할 때부터 작업하고 싶어서 이른 아침부터 일과를 시작했다. 나도 사람인지라 아침에 늦장도 부려보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작업시간 채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아침 등굣길에는 무지개, 혹은 야자수와 아침 달을 보는 재미가 솔솔 했다.


스튜디오의 두꺼운 파란 철문은 바람에 의해서든, 실수에 의해서든, 그 어떠한 경우에도 문이 닫히면 바로 자동으로 잠기기 때문에 항상 열쇠를 잘 가지고 다녀야 했다. 아무리 주의한다고 해도 사람인지라, 스튜디오에 열쇠를 두고 문을 닫아버리는 사소한 일상 해프닝들이 여기저기서 종종 나왔기 때문에 학과 사무실과 미대 건물을 관리해주시는 선생님들에겐 항상 여벌의 열쇠가 있었다.


밖에서 나의 스튜디오를 바라보았을 때, 전체 벽 면적의 3/4 혹은 2/3 정도가 유리로 되어 있어서 '어항' 스튜디오라는 애칭이 있었다. 밖에서 보면 작업실의 내부가 보여 신경이 많이 쓰일 것 같지만, 막상 작업실 안으로 들어가면 할 일이 산더미였기에 큰 창문이 딱히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만, 너무 강한 자외선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그림들이 상할까 걱정될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피부가 자외선에 예민하게 된 것도 어항 구조의 스튜디오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지레짐작해본다.

 

어항 스튜디오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그림 작업을 하다 창문을 바라보면 하늘과 대나무들을 보는 것 자체가 큰 힐링이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하와이 새들도 이 스튜디오를 좋아했다. 종종 하와이 새들이 작업실로 '걸어서' '들어'오기도 하고, 작업실 주위를 노닐다가 가곤 했다. 어떤 날은 새들이 유리창에 비치는 나무들을 진짜로 착각하고 바로 날아들어오려다 유리창에 부딪히는 사고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새가 부딪혔다고 호들갑 떨지 않고, 휴식 시간을 충분히 주면, 기운을 차리고 재정비해서 다시 다른 길로 날아가곤 했다. 임시방편으로 내 눈높이만이라도 새 보호용 필름을 붙여주고 (유리창을 다 덮어주고 싶었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종이들로도 창문을 조금 가려주니 이 사고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새들과 함께하는 일상 또한 어항 스튜디오가 가진 소소한 일상의 재미였다.



내 스튜디오 바로 앞에는 나무 벤치가 놓여있었다. 이 벤치의 등받이 부분은 간이 식탁으로 변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는데, 나무 벤치에 앉아 조금 이른 점심을 먹기도 하고, 오후의 쉬는 시간에는 잠시 누워 청량감이 가득한 하와이 바람을 즐겨보기도 했다. 무의식 중의 고민과 걱정들까지 다 가져가 줄 것 같은 청량감이었다. 그 당시의 고민이 무엇이었는가 물어본다면, 나에게 있어서 '하와이'는 무엇인지에 대한 교수님들의 질문의 답을 찾기가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나는 누구이고, 내가 생각하는 하와이, 하와이가 나에게 주는 영향들을 생각해보자면, 간단한 것 같지만 간단하지가 않았다. 단순한 의미의 여행하기 좋은 지상 낙원이 더 이상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스튜디오 앞 벤치. 그리고 모래주머니.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는 법. 더운 열대성 기후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미대 건물에는 몇몇 큰 강의실들, 학과 사무실 및 회의실, 디지털 아카이브실, 갤러리들 같이 필수적으로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야 하는 곳들이 아니면 에어컨이 없었다. 당연히 나의 스튜디오에도 에어컨이 없었다. 전기값이 상상 이상으로 비싼 지역이라 그렇겠거니 짐작했었다. 내가 의지할 곳은 선풍기 밖에 없었다. 선풍기 바람으로 견딜 수가 없는 날들이 있었는데, 그럴 땐 다른 에어컨이 나오는 공간으로 잠시 가거나 스튜디오 밖에 물을 쫙 뿌려두고 가만히 있으면 시원해졌다.


하와이 주립대학교 미대 건물에는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316호 앞에 작은 도깨비도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낭만이 가득한 공간에 재미까지 있는, 그런 매력적인 공간이 나의 스튜디오였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1학년 때의 일이다. 이 동네 하늘에는 울보가 사는가 싶을 정도로 비가 자주 오는 지역이니만큼 배수 구멍들이 옥상에 군데군데 있고, 나의 스튜디오 근처에도 무려 작은 배수 구멍이 양 옆으로 두 개나 있다. 딱 보기에는 정상적으로 빗물이 고일 틈새가 없이 바로 밖으로 잘 나갈 것 같았다. 선배들이 내 작업실로 놀러 와 비가 많이 오는 날에 이 어항 스튜디오에 물이 들어와 작업들과 미술 재료들을 다 날려버렸다는 어마 무시한 작은 도깨비도로에 얽힌 경험담인 듯 괴담인 듯 한 이야기들을 하고 갔다. 설마 했는데 진짜였다. 빗물이 고이기 시작하더니 스튜디오 쪽으로 물이 들어오려는 것이 아닌가. 미세한 각도로 내 스튜디오 근처의 배수 구멍들은 산 정상 위치, 나의 스튜디오는 산 아래 같은 구조로 되어있었고, 당연하게 빗물이 스튜디오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막막했다.


스튜디오를 관리해 주시는 선생님께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여쭤보니, 근본적인 원인인 구조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없지만 대안이 있다고 하셨다. 그 대안은 모래주머니들로 방어선을 만들기였다. 어쩐지...... 왜 모래주머니가 있나 싶었다. 이 모래주머니들은 나에겐 너무나 버거운 무게였다. 스튜디오를 관리해주시는 선생님께서 모래주머니를 옮긴다고 낑낑대는 날 보시더니, 흔쾌히 도와주셨다. 그리곤 왠지 모래주머니가 더 있으면 좋을 것 같다며 새 모래주머니들을 한가득 옆에다 쌓아놓으시기도 했다. 어느 날은, 선생님께서 해가 화창한데도 저녁에 큰 비가 올 것 같다며 퇴근하시기 전에 모래 방어선을 만들어 주시고 퇴근하셨는데, 정말 저녁에 호우주의보 경보가 뜰 정도로 비가 와서 신기했었다. 나의 스튜디오를 나보다 더 살뜰히 챙겨주셨던 선생님이셨다. 아침에 일정한 시간에 오는 학생이 기특하고, 나의 그림을 보면 힘이 나서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었다던, 참 감사했던 그 선생님은 지금 잘 계실까 문득 궁금해진다.



낭만과 재미가 가득했던 나의 하와이 아뜰리에 316호실
이런 날엔 어김없이 작은 도깨비도로가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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