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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맛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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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로하메이 Oct 07. 2018

문득 떠오르는 유년의 맛

01. 계란 프라이와 무 된장국


어렴풋한 지난 기억도

순식간에 되살아나게 만드는 맛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경험한 기억의 레시피

오늘의 메뉴는

문득 떠오르는 기억의 맛입니다.



자의 반 타의 반이었던 긴 휴가를 마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게 되었다. 첫 출근을 앞두고 회사에 입고 갈 옷과 구두를 맞춰 봤다. 생각해보니 지난 일 년 동안 구두(힐 or 펌프스)를 신은 기억이 없었다. 따뜻한 나라에서 물놀이가 일상이었으니, 모래가 묻어도 툭툭 털어내면 그만인 플리플랍(flip-flop, 한국에선 보통 조리라고 부른다.)이 내겐 최고의 신발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겨울을 나면서는 어그부츠와 운동화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구두를 신다 무심코 본 발바닥에는 작은 물집이 티눈이라는 다른 형태로 변해 있었다. 이 녀석이 언제 생겼더라. 얇은 슬리퍼로 걷고 또 걸었던 여행지에서 생긴 것이었을까? 제주 앞바다에서 성게 가시가 박혔던 자국이 남은 것일까? 그 기억의 출처도 정확하지 않았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티눈 치료에 대한 여러 의견이 온라인을 떠다니고 있었다. 약국에서 티눈 밴드를 사서 붙이면 뿌리까지 뽑힌다,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렇게 해도 또 발생한다, 레이저 치료가 답이다. 등...  


순간 고민이 됐다. 그냥 두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텐데...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지내다가 갑자기 티눈 타령이라니, 정말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싶었다. 어쨌든 나의 건강염려증은 병원 문을 두드리게 했다. 발바닥을 세밀하게 들여다본 의사 선생님의 말씀. "이 정도는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고,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연고를 바르고 살이 부드러워지면, 손톱깎이로 살짝 도려내면 된다." 병원을 찾아간 게 무색해지는 치료 제안에 순간 머쓱해졌다. 어쨌든 약국에 들러 연고와 밴드를 사서 붙였다. 그동안은 아프지도 않았고, 티눈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지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갑자기 콕콕 쑤시며 통증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불현듯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모든 순간이 놀이었던 어린 시절


아프지 않았지만 아팠던 내 유년의 기억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작은 가겟집이었다. 집은 아빠의 일터이자, 엄마의 살림터이자, 우리 삼 남매의 보금자리였다. 당연히 엄마와 아빠는 항상 집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하루 종일 밖에서 놀다 들어왔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었는지 어둑해져야만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도 다른 날과 다름없이 신나게 놀고 있었다. 그런데 같이 놀던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갑자기 머리에서 피가 난다는 것이다. 우리가 놀고 있던 곳은 아파트 상가 계단. 거기서 나는 굴러떨어지지도, 친구들과 격렬한 몸싸움을 하지도 않았다. 옹기종기 앉아 얌전히 놀고 있었는데. 피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더구나 넘어졌을 때 피가 난 것처럼 뜨끈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다른 꼬맹이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는지 빨리 가라고 재촉했다. 더 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집의 현관이랄 수 있는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다 괜히 멋쩍어 머리에 손을 한 번 댔다. 순간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금세 손바닥은 새빨간 피로 범벅이 되었다. 그 손을 쭉 내밀고 당당하게 걸어갔다.



손을 심하게 다친 줄 알고 아빠는 내 손을 살피기 시작했다. 말괄량이이기는 해도 기껏해야 예닐곱 먹은 딸이 피로 물든 손을 내밀었으니 놀랄 수밖에.


머리


그제야 손이 아니라 머리가 다친 걸 안 아빠는 길 건너의 동네 의원으로 나를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참 나도 웃기는 꼬맹이였던 게 바로 머리를 다쳤다고 하면 될 것을, 왜 머리를 나중에 말한 것인지 어른이 된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병원으로 향하는 순간에도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가득한 진료실에서 손에 묻은 피를 보자 울음이 터져 버렸다. 병원에서도 어떻게 다친 거냐고 물었지만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실 다친 기억이 없는데 피가 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집으로 갔다가 병원에 옮겨졌을 뿐이다. 결국, 나는 손에 있는 피를 닦아내고 머리를 꿰매는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아빠 등에 업힌 채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머리를 빡빡 깎을 일이 없어서 잊고 지냈지만, 아직도 내 뒤통수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흉터가(흔히 땜빵이라고 표현하는) 내 머릿속의 비밀처럼 간직되고 있다.


망아지처럼 뛰놀았던 나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방 안 가득 된장 냄새와 기름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개코였던 나는 냄새로 먼저 메뉴를 맞췄다. 엄마는 무 된장국과 계란 프라이가 놓인 밥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간단하긴 했지만 나름 봉합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병원에서 처방받아 온 약을 먹어야 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할 새도 없이, 바로 약을 먹일 수 있도록 엄마는 딸의 밥상을 준비해야만 했다. 망아지처럼 동네를 쏘다니던 딸을 병원에 보내 놓고 종종거리며 불 앞에 섰을 것이다.


없는 살림의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엄마가 갖고 있었을 재료는 눈에 보이듯 뻔하다. 그래도 따뜻한 국물을 먹여야겠단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빠르게 멸치육수를 내어 된장을 풀고, 무를 채 썰어 국을 끓인다. 거기다 많이 씹지 않고 후루룩 넘어가는 계란을 부쳐냈다. 후딱 차려낸 엄마의 밥상 앞에서, 밥그릇을 비운 딸은 바로 잠이 들었다.  


문득 떠오르는 유년의 맛


특별하지도 않고 흔하디흔한 이 음식들이 백반집에서 나오면 나는 유년의 내가 무심코 떠오른다. 사고뭉치 딸내미는 그날의 아픔이 여전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병원으로 다친 딸을 들고 전력 질주를 한 아빠와 보글거리는 된장국을 끓이며 마음 졸였을 엄마의 모습이, 내 부모의 젊은 한때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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