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를 하려고 세탁기 옆 큰 서랍을 열면 언제나 섬유연제와 세제가 가득하다. 쓰다만 것 위에 새로운 것, 비닐도 뜯지 않은 것. 뭐가 썼던 거고 뭐가 새 거인지 알 수가 없어 이것저것 다 열어 써버리기도 했다. 가루세제와 액체세제들은 부피도 크지만 또 어찌나 무거운지 다리를 쫙 벌리고 허리까지 숙여 돌덩이라도 당기듯 낑낑대야 겨우 끌려나왔다. 서랍장이 버벅거릴 때마다 엄마에게 핀잔이 갔다. "엄마, 왜 이렇게 세제가 많아? 다 쓰고 사지. 왜 있는데 또 사?"
엄마는 별다른 대꾸도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딱히 이유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세제는 소모품이고, 할인행사에 단골로 등장하는 생필품이다. 빨랫감의 향에 유독 민감한 내가 따로 쓰겠다며 쟁여둔 섬유연제들도 한몫했다. 표백제부터 흰옷 전용세제, 울 빨래용 세제, 섬유연제와 혼합용 세제, 가루비누, 효모 비누. 엄마의 '쟁여둠'이 탐탁진 않았지만, 장 볼 때 차 가지고 간 김에 한 번에 사와야 수고를 안 하니까. 실효성을 생각했을 때 부족한 것보단 쟁여두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을 엄마의 마음도 이해는 갔다. 그럼에도 빨래할 때면 "아우 엄마!" 를 몇 번이나 외쳤는지 모른다.
비가 오기도 했고 연일 코로나 확진 소식으로 외출할 맛도 안 나던 날이었다. 오랜만에 방정리 좀 해볼까 싶어 차례로 서랍을 열어 안에 있는 물건들을 바닥에 쏟아냈다. 비닐포장도 뜯지 않은 미용품들이다. 샴푸, 헤어팩, 클렌징 폼, 모공 비누, 마스크팩, 눈가용 마스크팩, 클렌징 오일, 각질제거제... 언제 다 샀나 싶은 이 물건들. 유독 일본 출장이 잦았던 해에 사두고 고이 모셔놓은 것들이었다. 국내와 현지 가격차이만 서너 배는 족히 뛰어넘는다. 현지에선 3000원도 안 하는 폼 플렌징을 국내 드럭스토어에선 만 이천 원에 판다. 무조건 사 오는 게 이득이라 생각했었다. 사두면 언젠가 쓸 거고, 가성비는 뛰어나니까. 쟁여둬서 손해볼 건 없었다. 저번에 뭘 사갔는지, 집에 뭐가 남아있는지, 꼭 필요한 건 뭔지. 파악조차 하지 않은 채 그저 쟁여놨다. 출장 갈 때마다 한 두개씩 사오던 버릇이었다.
숱한 날, 빨래를 하겠다며 서랍을 열었었다. 뭐가 세제고 뭐가 섬유연제인지 너무 많아서 모르겠다며 타령을 해댔다. 정작 내 방 서랍장 사정은 생각도 안 했다. 세안제가 떨어지면 금 나와라 뚝딱 하고 언제든 꺼내쓸 수 있었던 건 나의 '쟁여둔' 버릇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자각은 못했다. 부엌의 서랍장과 내 방 서랍장을 별반 차이가 없다는 걸.
신기하다. 나라면 저러지 않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모습들을 종종 가족들에게서 보곤 한다. 그 뿌리를 캐고 또 캐다보면 나에게서 똑같은 모습을 보게 된다. 한두 가지가 아니다. 씁쓸하게 웃으며 "알겠어, 그만 살게" 라던 엄마의 얼굴이 생각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