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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Oct 10. 2020

녹슨 자전거로

둘째 날 아침, 알람도 맞추지 않았는데 눈이 절로 떠졌다. 전 날밤, 자기 전에 일출시간을 검색하는 사이 몸이 기억해줬나 보다. 일출시각 6시 28분보다도 빠른 5시 50분에 눈을 떠버렸다. 게스트하우스라 알람을 맞출 수 없어서 놓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해가 뜨기까지 30분이나 남았지만 누워있다간 다시 잠들 것 같아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자고 있던 방에서 다섯 걸음만 걸어 나오면 눈앞에 바다가 펼쳐진다. 온통 어두운 세상일 줄 알았는데, 곧 모습을 드러낼 태양이 빛을 조금씩 내뿜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신기하다. 암흑 같은 세상 속에 유일무이한 빛줄기가 짠 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조금씩 제모습을 드러내면서 서서히 등장한다는 게. 이과생이라면 '지구가 자전하는데 당연한 거 아니야?' 할 것 같다. 자연의 변화가 떡 잘라내듯 쑥덕쑥덕 끊어지지 않으니 바라보는 재미가 있어 좋다. 바닷가엔 이미 파도를 보러 나온 잠옷 차림의 서퍼들과 모닝 뜀박질을 하러 나온 런닝맨들이 몇 보인다. 팔을 쭉쭉 다리를 쫙쫙 피며 스트레칭에 한창이다. 먼 길 달려 해변가에 차를 세워놓고 해 뜨길 기다리는 차박족들(자동차에서 잠을 자며 여행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모래사장에 낚싯대 서너 대를 꽂아놓고 입질을 기다리는 낚시꾼도 있다. 잠이 덜 깬 부스스한 머리로 검은색 패딩을 걸친 나도 합류했다. 일면식 없는 사람들이 각기 다른 복장을 하고 똑같은 곳을 바라보는 시간. 수평선 너머를 향한 간절함.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는 그 시간은 긴 듯 짧은 듯 고요하다.


일출 구경이 성황리에 끝났다. 흐린 날씨라 군데군데 먹구름이 가득 꼈지만 그 사이사이로 쨍한 빛줄기가 강렬하게 쏟아져내렸다. 장관이었다. 일찍 일어났으니 아침식사는 뜨끈뜨끈한 국물이 먹고 싶었다. 사람 없는 한적함이 장점인 이 마을엔 마땅한 음식점이 없다는 단점이 있다. 드문드문 자리한 식당들은 오후 네 시에 영업을 마감하거나 주인장 마음 내킬 때 여는 식이다.


해안 따라 쭉 이어진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금진항이 나온다는 걸 지도로 알아냈다. 항구에 가면 먹거리가 좀 있을 것 같은데 걸어가려니 한 시간은 족히 넘는 거리다. 숙소에서 자전거를 빌리기로 했다. 사륜차 운전은 서툴러도 이륜차 경력은 20년이 족히 넘는다. 어떤 자전거도 커버가 가능하다는 마음이었다. (빌려주면서 이거 바퀴가 괜찮을까?라는 소리를 들었을 땐 식겁했지만)


까치발을 들어야 발이 땅에 겨우 닿는 높은 안장. 브레이크 역할을 해주는 중요한 부분에 녹이 슬어있다. 안장을 조이는 버튼에도 녹이 슬어 꿈쩍을 안 한다. 영락없이 까치발 신세다. 1단부터 5단까지 기아 조절도 가능한데, 부품이 떨어져 나갔다. 뭐 하나 정상인 게 없어 보인다. 조금 달려봤다. 바퀴는 탱탱하고 브레이크는 잘 든다. 그래. 이거면 됐다. 발이 생긴 걸로도 충분히 기쁘다.  


강릉엔 헌화로가 있다. 2.4km밖에 안 되는 짧은 길이지만 대한민국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이에 난 도로라 달리는 내내 눈이 즐겁다. '선배님!'과 '쏠 수 있어!'라는 명대사를 유행시켰던 드라마 [시그널] 엔딩 장면도 금진의 헌화로에서 드론으로 촬영했다. 그 외에도 각종 드라마와 영화에 등장했다. 이제는 내 차례다. 내가 등장해야 진짜 드라마다. 하늘을 가득 메웠던 먹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햇살 따라 바닷길 따라 쭉 달리기 시작했다.


혼자 하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두 부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혼자인 게 편한 사람, 같이 있는 것도 좋아하지만 혼자인 것 또한 즐기는 사람. 나는 후자에 속한다. 그것은 때로 혼자여도 즐길 수 있다고 세뇌시켜야할 필요가 있다. 이것 봐, 재밌잖아. 누군가랑 함께였다면 이건 불가능했을 거야. 끊임없이 되새김질을 하고 있다.


한껏 달리다 예쁜 풍경이 있을 때 급브레이크를 밟고 사진을 찍는 것. 정해놨던 목적지가 있지만, 샛길에 호기심이 생기면 샛길로 빠져버리는 것. 상의하지 않고 먹고 싶은 메뉴를 결정하는 것. 온 감각을 집중시켜 그 맛을 음미하는 것. 지나가는 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말을 거는 것. 내키면 주저앉아 한참 수다를 떨기도 하는 것. 갔던 길을 또 가기도 하고, 집에 가려다가도 다시 돌아와 재차 탐방하기도 하는 것. 그 모든 순간에 나는 혼자 있음을 실감하면서도 혼자 있기에 가능함을 만끽했다. 그건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었다.


아침 8시 40분에 숙소를 출발했다. 맛집을 찾아가면 사람이 많을 날씨다. 지나가는 길에 마음에 드는 식당에 들어가기로 했다. 난생처음 홍합 해장국이란 걸 먹었다. 8000원이라는 돈이 아깝지 않게 반찬 그릇에 남아있는 깨 한 알까지 깡그리 먹어치웠다. 아침을 먹으니 정직하게도 곧바로 신호가 오길래 화장실과 조우하는 시간도 가졌다.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될 것 같아 보이는 커피숍에 들어가 충전하는 사이 진정한 '멍 때리기'에 도전했다. 부채길을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을 뒤로하고 산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간판 없는 식당을 발견했다. 옹심이칼국수집이었다. 난생처음 혼동동주를 해봤다. 옹심이 국물이 맛있어 국물만 더 달라고 했다가 처음 시켰을 때처럼 옹심이를 가득 담아주신 인심에 감격했다. 결국 두 그릇을 비워냈다. 덕분에 저녁은 생략했다.


헌화로를 달리는 기분이 너무나 상쾌해 경사를 오르락내리락하다 낚시꾼들이 몰려있는 선착장에 들렀다. 낚시꾼들이 모여있는 곳은 월척이다!라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릴 줄 알았는데 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 내리쬐는 햇살에 반짝이는 바닷물과 고요함만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한 시간을 머물렀다. 아무리 봐도 배 주인이 아닌데, 배 주인처럼 정박해놓은 어선에 올라 낚싯대를 놓고 있는 사람들이 궁금해서였다. (사실 취재 아이템으로 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 사람들은 참 친절해. 참 좋아요."

"왜요?"

"요 위(어선)에 올라가서 낚시 좀 해도 됩니까 하면 어이구 하세요 하세요. 그냥 깨끗이만 치워주세요. 하더라고요. 그런 인심이 어디 있어요. 여기 분들 참 좋아요."


의심의 눈초리를 품었던 내 민낯을 거뒀다. 취재는 미담으로 해야겠다.


뭐 잡으러 오셨냐 물었다. 고등어 잡으러 왔는데 저 양반이 오늘은 학꽁치날이래서 학꽁치 삼백 마리 잡았단다. 삼백 마리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빵 터졌다. 에엥? 안 믿으시네, 자 봐요. 아이스박스를 열어 보여준다. (실로 삼백 마리 정도 되어 보였다) 감탄하는 나를 뒤로 하고 아이고, 나는 막걸리나 한 잔 해야겠네. 한 잔 드릴까요? 하시길래 텀블러에 한 잔 받아먹었다. 친구들과 여행 가면 종종 마을 분들로부터 술을 얻어먹곤 했다. 밥집을 물어보는데 한 잔 받아, 알려줄게 한다던지. 이거 무슨 물고기예요? 했다가 여행왔으면 한 잔해야지, 팩소주 하나를 받는다던지. 친구들은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 아이들이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장단 맞추며 이야기도 잘 섞는 성격들이라 그 순간만큼은 친구들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산책로가 보이면 고민하지 않고 올라갔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깐. 대피소가 보이면 여기 대피소는 어떻게 생겼을까 표지판을 따라갔다. 마당 빨랫줄에 늘어놓은 오징어들이 예뻐 한참 서서 사진을 찍기도 했고, 몇 시간 탔더니 자전거도 손에 익어 경사로를 신나게 달려내려오기도 했다. 네이버 포털 사이트를 한 번도 열어보지 않은 하루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걸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삼천리 자전거 (이제보니 이름 참 잘 지었다)
나의 하루를 부탁하는 기념으로 단독샷
헌화로는 차도와 자전거도로 인도가 공존한다
옹심이집에서 기념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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