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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Dec 04. 2020

15년 만에 건넨 사과

중학교 2학년 때 학원을 다녔다. 곤두박질치는 수학 점수를 끌어올리기 위한 엄마의 발버둥이었다. 나는 공부를 꽤 열심히 하는 편이었는데, 이상하게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요령이 없거나 공부하는 법을 모르거나 둘 중 하나였겠지만, 사실 성적이 안 나오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은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내 딴엔 공부를 꽤 좋아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앉아있는 게 좋았다. 학원 가기 전 친구들과 동전 모아 사 먹던 떡꼬치가 좋았고, 조용한 강당에서 몽둥이 들고 왔다 갔다 거리는 실장님 눈치를 보며 몰래 주고받는 쪽지가 좋았다. 두 계단씩 뛰어올라 2층에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뒤따라 올라오는 친구를 놀라게 하기 바빴고, 옥상에 올라가 학원 정문에 서 있는 친구들에게 물 뿌리기 바빴다. 만날 때마다 주고받는 교환일기가 소중했고, 한쪽 귀에 이어폰 꽂고 이 노래 좋지 않니, 끄적거리는 짝꿍과의 낙서가 소중했다. 그러니까 사실은 공부가 좋았던 게 아니라 학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좋았던 거다.


학원은 일산 학원가에 있었다. 학원이 너무 많아서 학원가라는 이름이 붙었다. 집은 파주 산골이었다. 맞벌이 부모 밑에서 자랐기에 이따금씩 마중 나오는 엄마가 아닌 이상 대부분은 학원차를 타고 다녔다. 단연 우리 집이 가장 멀었다. 아이들을 다 내려주고 항상 가장 마지막에 가로등도 없는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려야 우리 집이 나왔으니까. 문을 닫으며 안녕히 가세요, 인사하면 실장님의 봉고차는 서서히 멀어졌고 현관에 도착하기까지의 30미터 남짓한 길을 지켜주는 건 귀뚜라미 소리와 샛노란 달덩이뿐이었으니까. 그렇게 1년 반을 다니고 졸업했지만 나는 그 학원에서의 추억이 꽤 많다.


몽둥이 들고 왔다 갔다 거리던 실장님은 학원 마치는 시간에 봉고차 운전석에 앉아있던 그 실장님과 동일인물이다. 다른 친구들에겐 늘 엄격했지만, 내게는 따뜻한 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꽤나 장난을 많이 치고 다니던 아이였는데, 그런 나를 혼낸 적이 없었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선 그랬다.


퇴근하고 돌아와 방에서 끄적끄적 낙서질을 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다. 밤 시간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다는 건 오랜만에 연락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누굴까.


아이고, 오랜만이다. 나 OOO 실장이야. 나 기억하니?


작년 말, 거의 20년 만에 중학교 때 은사님께 연락을 드렸었는데 은사님과 절친한 사이였던 실장님에게 내 번호가 전달된 모양이다. 실장님은 살짝 술기운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XXX(은사님)이랑 이야기하다가 네가 생각나서 말이지. 참 미안하더라고. 네가 참 예뻤는데 말이야. 기억하지? 내가 너 예뻐했던 거. 지금은 어떻게 변했나 궁금하네. 나는 흰머리가 많이 늘었어. 근데 오늘은 사과하려고 전화했어. 그때 네가 항상 늦게 나오는 거야. 수업 마치고 빨리 안 나오고. 나는 너 파주까지 데려다주고 얼른 퇴근해야 되는데. 집 가서 마누라도 보고 싶고 해서 그렇게 빨리 나오라고 늦게 오면 화내고 짜증내고했잖아. 그게 요즘 갑자기 생각나는 거야. 내가 뭐라고 애한테 짜증을 냈을까. 그 쪼끄만한 애한테. 중학생한테 말이야. 지금 생각하니까 너무 부끄럽고, 미안하고. 그래서 전화했어. 언제 한 번 막걸리 한 잔 하자, XXX랑.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러니 괜찮다고 말했다. 실장님은 시간이 지나 용서한 줄 오해한 채 거듭 사과를 해온다.


아니야, 뭘 기억이 안 나. 미안했다. 정말. 그때는 나도 뭘 몰랐던 거지. 왜 그랬을까 싶네.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학원 다녔던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나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거다. 실장님이 기다리는 걸 뻔히 알면서도 친구랑 한 마디 더 하고, 장난 한 번 더 치려고 뭉그적 뭉그적 댔겠지. 지난날의 나와 오늘날 사과해오는 실장님에게 내가 더 미안해졌다. 아마도 지금 내 나이였을 실장님이니까. 아마 나라도 짜증 섞인 화쯤은 냈을 거다.


훈훈하게 통화를 마무리짓고도 입가에 미소가 가시지 않는다. 그게 뭐라고 기나긴 세월이 지나 전화를 걸어 사과했을까. 그 고운 마음이 진하게 와 닿아서 휴대폰만 만지작만지작 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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