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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Dec 10. 2020

모르는 번호, 낯선 목소리

전화가 걸려왔다. 010으로 시작하는 걸로 보아 보이스피싱은 아닌 것 같았다. 한국말이 영 서툴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받았다.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없어 작은 소리로 대답하니 그쪽이 되려 목청을 높인다.


"유쑹민 씨 맞아요? 방송 좔 봤어요!"


방송을 잘 봤다는 연락을 받는 건 상당히 드문 일이다. 고발성 프로그램이다 보니 어느 한쪽은 마음이 상하기 마련이다. 제보자의 기대치에 부응하는 것도 쉽지 않다. 할 말은 많았을 테고, 정해진 분량은 그에 비해 너무 짧았을 테니. 그런데 이 사람은 달랐다.


"나 김하종 신부예요!"




새벽 세 시. 서소문의 한 골목길에 긴 줄이 생겨나는 시간. 동이 트려면 아직 한참 남은 시각. 암흑 속, 묵묵히 걸어오는 검은 그림자들이 긴 행렬을 만든다. 그들은 아침밥을 먹기 위해 가깝게는 한 시간 멀게는 몇 시간을 들여 하염없이 걸어온다. 노숙인들이다.


원래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노숙인의 인권을 대변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고, 누군가는 열심히 보도자료를 만들어 언론에 알리려 힘썼다. 제 삶도 빠듯한 사람들이 새벽같이 나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을 끓이고, 밥을 지어 그들을 대접해왔다. 하지만 코로나는 모든 걸 바꿔버렸다.


민간이 운영하는 무료급식소가 차례로 문을 닫고, 시에서 운영하는 급식소도 경영난에 휘청거렸다. 코로나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하루 한 끼 먹으면 잘 먹었구나, 버티는 그네들의 삶에 생존권이란 글자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서울역에서 두시 반쯤 서서히 일어나 깔고 누웠던 상자며 자질구레한 간이 살림도구를 챙겨 터벅터벅 걸어온 이들이 서소문에 도착하면 세 시 조금 넘어가는 시각. 배식은 다섯 시인데, 두 시간이나 먼저 도착하는 건 나눌 수 있는 식량이 한정되어있기 때문이다.


내려간 셔터 앞에 걸터앉고, 전봇대 사이에 몸을 기대고, 앉지도 서지도 못해 서성이는 이들에게 작은 식권 한 장이 쥐어진다. 200명. 그들이 아침식사를 비정상적인 시간에 해치워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곱지 못한 시선을 보내는 주변의 민원 때문이다. 한 노숙자는 말한다. 노숙인 무료급식시설은 쓰레기 매립장 같은 거죠. 말하자면. 주민들이 싫어하겠죠, 당연히.


남들이 보기 전에, 해가 뜨기 전에, 없었던 일처럼 흔적마저 지워야 하는 무료급식처럼 그들은 우리가 잠든 시각 소리 없이 걷고 소리 없이 식사를 마치고 다시 소리 없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런 그들이니까 더 보살펴야 한다는 사람이 있다. 30년 동안 묵묵히 한자리에서. 제나라가 아닌 타지로 건너와 노숙인들을 보살피는 이다. 1957년생, 이탈리아 사람 김하종 신부다.


푸른 눈의 성자, 안나의 집 대표, 국민훈장 동백장. 그는 이런 네이밍들을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처음 취재를 시작하면서 촬영 요청 전화를 걸었을 때 미안합니다만, 촬영은 당분간 안 하게 되었습니다, 사무국장이 조심스레 말을 건네 왔었다. 코로나 시국이니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이유라도 알자 싶어 여쭈니 인물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걸 신부님이 부담스러워하신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내 대답은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겠으니 협조를 부탁드립니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촬영이 무산되는 걸 막기 위해서 어떻게든 방향을 틀어 설득해볼 생각이었다. 인터뷰 하나 정도는 해주시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다행히 취지를 설명드리니 허가가 떨어졌고, 약속한 시간에 취재진이 찾아갔다.


오래된 곳이기도 하지만, 워낙 민원이 많은 데다 주변에서 위생, 청결, 코로나 확산 방지를 명분으로 안나의 집 폐쇄 문의가 쇄도한다고 들었다. 먹을 곳을 찾아 헤매는 노숙자들이 인근 지하철역에 들어가 구석에 자리를 잡고 허겁지겁 한 끼를 해치우는 것도 한몫했다. 역장도 지나가는 시민도 취재진과 노숙자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대부분은 더럽다, 비위생적이다, 성당 놈들이 착한 척하는 거다, 라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안나의 집은 평소보다 100인분 더 많은 식사를 준비했다. 경기도에서 경기도로 서울에서 경기도로. 몇 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고 온 한 노숙인에겐 사흘 만에 먹는 첫끼였다. 가방에 꾸역꾸역 도시락을 넣길래 여기서 안 드시냐 묻는 취재진에게 그래도 마지막 자존심이 있다, 며 얼버무린 노숙인에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한 끼였다.


전화를 걸어온 신부님은 오늘도 민원을 받아버렸지 뭐예요? 허허. 소탈한 웃음을 뱉어내며 넋두리를 건넸지만, 그가 겪어온 고충은 내가 감히 가늠할 수 있는 깊이는 아니었으며 그런 고충을 넘어서게 만든 가치가 그에겐 굳은 심지로 자리 잡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하하호호 웃으며 주고받은 통화가 끝날 무렵 마음은 먹먹해져 왔고, 또다시 어둠 속에 긴 행렬을 만들던 그림자들이 떠올라 웃을 수가 없게 되었다.


노숙인 가운데엔 20대도 30대도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불과 몇 년 전까지 정장을 차려 입고 거리를 활보했던 직장인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장애와 치매, 소외감으로 이 사회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거리로 내몰린다. 지하철 역 앞에 서서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빨간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있다. 90도로 허리를 숙여가며 시민들에게 인사하며 빅이슈라는 잡지를 판매하는 그들은 거리에서 정말 힘들게 자립해온 노숙인들이다.


안나의 집 앞 성당 주차장. 아스팔트 바닥에 2미터씩 떨어져 앉은 노숙인들이 차례로 도시락을 받으러 나오면 신부님과 자원봉사자들은 끊임없이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하트를 만들어가며 인사한다. 그들이 거리가 아닌 지붕 아래 살고 있었다면 가족들과 주고받았을 평범한 언어들이다. 어서 와요, 사랑해요, 맛있게 드세요. 왜 그런 인사를 나누게 되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조금 어리숙한 단어들의 조합이 신부님의 마음을 오롯이 대변해주었던 것 같다.

"우리가 잘났기 때문에 이 사람들에게 밥 주는 것이 아니고 같은 인간이라 인사드리는 것입니다. 음식보다 이게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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