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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Jan 05. 2021

두 시간 동안 걸려온 전화 수백 통

올해도 승민 씨가 레슨 총무 맡아준다며? 고생이 많네. 이왕 하는 거 운영위원도 같이 해주면 어때?


지난 연말 걸려온 전화. 차기 운영위원을 섭외하려는 신임 총무의 발버둥이었다. 아닙니다. 저는 그릇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단칼에 거절했다. 운영위원을 하느니 차라리 클럽을 탈퇴하겠습니다,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최대한 냉정하고 확고한 말투로 거절만 해놓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해주길 바라는 눈치다. 해가 바뀐 오늘날까지도.


배드민턴 클럽 회원수는 100명. 소규모가 아니다 보니 나름 체계적으로 돌아간다. 클럽을 이끄는 회장이 있다. 회장을 조력하는 부회장이 약간 명 존재한다. 회원들의 경조사를 비롯해 공지사항, 행사 안내까지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총무. 총무의 조력자 부총무는 남녀 각 1명. 회비와 진행비를 관리하는 재무. 소소한 클럽 운영 잡무를 담당하는 게 운영위원이다. 이 모든 클럽 운영을 매의 눈으로 일 년 내내 감시하는 감사를 마지막으로 운영진이 완성된다.


회장에겐 막중한 책임감이 얹어진다. 책임감을 명분으로 월 10만 원씩 수고비가 지급된다. 총무단도 마찬가지다. 연락을 돌리고 전화를 받고 시설관리공단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아 전화통에 불이 난다. 수고비 10만 원과 월 회비가 면제된다. 총무는 가장 고생하는 사람이니까.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화근은 코로나였다. 역대급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배드민턴장은 문을 닫았다. 지자체가 관리하는 시설이다 보니 철저하게 정부지침을 따라야 했다. 회원들이 매달 2만 원씩 지불하는 월 회비도 면제되었다. 확진자수가 줄어들면 슬금슬금 눈치 보며 문을 열었다가 운동 좀 할만하면 다시 문을 닫는 그런 나날이 이어졌다. 365일 동안 문을 연 날이 두 달도 채 안 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다가왔다. 12월 둘째 주. 클럽의 연례행사인 마지막 임원회의가 열렸다. 클럽의 재산이 얼마나 모였고, 어떤 곳에 지출했으며 신입은 누가 들어왔고, 탈퇴는 얼마나 했는지. 1년 동안 클럽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 시간. 딱히 행사라 할 것도 없고, 막대한 지출도 없으며 조용조용하게 지내온 1년이었기에 고생했네 코로나가 큰일이네 서로 덕담만 주고받고 있었다. 화기애애 하던 장을 한순간에 깨뜨린 건 감사의 한마디였다.


코로나다 뭐다 하면서 일 년 내내 클럽 문을 닫았는데 총무님 회비 면제, 타당하다고 보십니까.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으리라. 클럽 은 배드민턴이라는 연결고리 하나로 연령대도 성별도 성향도 모든 게 다른 백 명이 모인 곳이다. 내일까지 해주세요, 하면 모레는 안 되나요? 묻는 사람이 있다. 계좌이체 부탁드립니다, 하면 저 멀리서 꼬깃꼬깃 접은 지폐 들고 달려오는 어르신이 있다. 코로나로 문 닫습니다, 단체문자를 돌리면 언제부터요? 언제까지요? 얼마나요? 궁금한 게 많다. 레슨만 담당했던 나만 해도 코로나로 골머리를 앓았다. 운영시간이 9시로 단축되면 레슨비 환불되나요? 레슨 시간 줄어드나요? 레슨 이월하면 안 되나요? 2회 치 빼고 일부 환불해주세요. 지금 막 설명하려고 문자를 작성하는데 그새를 못 참고 전화가 밀려온다. 하물며 총무는 어떻겠는가. 내일 날씨도 현정권에 대한 불만도 배드민턴 라켓 수리도 모든 대소사를 총무에게 물어오는 사람이 허다한데 말이다.


정적을 깨뜨린 건 회장이었다. 모두의 분노를 대신하면서도 회장직에 걸맞은 달변을 토해냈다. 감사는 말꼬리를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제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건 아니고요, 어필해달라는 몇몇 분들이 계셔서 대변하는 거지요.


난 어느 쪽에도 설 수 없었다. 좋은 게 좋은 거고, 화목을 깨뜨리는 사람은 불순분자가 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총무의 노고를 모르는 바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감사의 역할을 다 했을 뿐이다. 조금 밉보이더라도 충분히 의문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이다. 같은 식구끼리 왜이래~ 라는 풍토에 휘둘리지 말라고 만들어놓은 직함인데, 말 한마디 꺼내는 순간 그는 역적이 되고만다.


내가 하는 게 마음에 안 들면 자기가 하라 그래, 팔은 안으로 굽는 건데 왜 트집을 잡나 몰라. 결국은 감사를 옹호하는 회원들에게도 화살이 돌아간다. 총무를 격려하는 집단은 주도권을 쥐게 된다. 두 그룹은 분리되어 담을 쌓고 지낸다. 해가 바뀌어 감사였던 회원은 총무가 됐다. 아군이 많이 필요한 보직인데, 총무 곁을 지키며 발 벗고 조력해줄 이가 없다. 그래서 나한테까지 전화가 돌아온 것이었으리라.


오늘은 검찰개혁에 대한 토론이 있던 날이다. 매일 하는 업무가 아닌 조금은 색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 시청자들과 전화 연결하는 업무를 자원했다. 정해진 질문에 대한 찬반을 묻는 역할이었는데, 적지 않은 시청자들이 입을 모아 되려 내게 질문을 던져왔다. 공수처는 누가 견제하나요? 견제를 할 수는 있나요?


이건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한편으론 정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조직의 정치, 내 사람의 정치. 그러니까 정치라는 건 비단 번듯하게 정장 차려입고 의석에 앉아 주고받는 안건만을 뜻하는 건 아니겠다. 카메라 앞에서 고성을 지르며 싸워대는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뜻이다. 내가 다니는 배드민턴 클럽, 고작 회원수 100명을 둔 동호회에서조차도 정치는 어렵고, 견제는 더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꼭 필요한 것. 그럼에도 어려워 좀처럼 타협점을 찾아내기 힘든 것. 어쩌면 그 불협화음이 자연스러운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와는 별개로 나에겐 오늘 하루가 꽤 따뜻하게 기억될 것이다. 정작 시청자 연결이 가능할 만큼 조리 있게 의견을 피력한 사람은 드물었지만, 분노도 격려도, 울화통이 치밀어 수십 번 전화연결 끝에 드디어 받았다며 반갑습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라던 누군가의 목소리도. 모두 싫지만은 않았던 그런 시간이었다. 내가 사는 이 나라에 대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애정이 묻어나와 조금 힘들어도 수화기를 잡고 버틸만 했고, 일할 맛 났다.


단 한 번이라도 티브이 화면에 뜨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본 적이 있던가. 불편한 목소리에 들어보려는 귀를 가졌던 적이 있던가. 새삼 부끄럽기도 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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