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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Jan 11. 2021

30분 동안 벌어지는 일

움직이는 것들이 생각보다 없다. 아침 7시 40분은 늘 그렇다. 파주라 그런 걸 수도 있고, 우리 동네라 그런 걸지도 모른다. 새해를 맞고 단조롭던 일상에 변화 한 가지를 더해보았다. 아침 산책이다. 출근 시간이 남들보다 늦은 편이라 가능한 일이다. 직장인들에게 7시 40분은 한창 준비하기 바쁘거나 이미 도로 한복판에서 운전대를 잡거나 지하철 한 칸에 몸을 맡기고 회사에 향할 시간이다.


나의 루틴은 조금 다르다. 불규칙한 퇴근시간과 언제 어디서 엎어질지 모르는 현장을 담보로 출근시간에 여유가 생겼다. 7시 반에 일어나 끓인 물이 담긴 텀블러를 들고 40분에 현관을 나선다. 아침 식사를 준비해야 하니 8시 20분까지는 집에 돌아와야 한다. 30분 남짓한 황금 같은 아침 시간을 산책에 투자하게 된 건 뚜벅이 신세임에도 하루 만 보 채우는 게 어렵다는 걸 절감했던 까닭이다.


저 멀리 동화의 언덕이라 불리는 근린공원에 다녀올까도 생각했지만, 새로운 루트를 발견하고 싶었다. 지나가다 언뜻 본 비밀의 숲처럼 겨울나무가 울창한 저쪽 도로로 나가볼까 했으나 돌아오는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아 미루었다. 북카페가 많은 거리로 발걸음을 옮겨보고 싶어도 이른 시간이라 문 여는 곳이 없다. 잠에서 깬 부스스한 몰골로 나서는 산책길이라 사람들이 출근하거나 거주하는 곳을 피하고 싶다. 겨울이라 해가 늦게 뜨니 불그스름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동쪽으로 걷는다. 다행히 고층 건물이 없는 우리 동네라 해가 뜨는 걸 탁 트인 곳에서 감상할 수 있다.


며칠 같은 코스로 지나다니다 보니 그간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됐다. 동네 유명 맛집으로 소문난 어죽 집은 매일 7시 50분부터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는 것. 오픈 시간이 10시 반인 걸 감안하면 이른 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 부지런한 분들은 아침부터 창문을 열고, 청소기를 돌린다. 눈이 쌓여 제설 작업하러 나갔던 날도 어죽 집만큼은 마당은 물론 그 앞 도로까지 말끔히 쓸어놓았더랬다. 잘 되는 가게는 역시 비결이 있구나. 왠지 모를 뿌듯함에 감탄하며 지나간다.


마을 어귀 작은 버스정류장에 도착한다. 맞은편에 개성 만두집이 보인다. 파주라는 지명에 걸맞게 장단콩 전문점인데 만두는 개성식이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할 때쯤이면 개성 만두집에도 불이 들어와 있다. 장단콩 칼국수는 특별히 번쩍거리는 전광판으로 홍보한다. 이곳도 열 시 반부터 손님을 맞는다. 어죽 집 못지않게 동네에서 아주 오래된 맛집이다.


집집마다 지붕에 달린 난로 연통에서 모락모락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다들 집에서 한창 옷을 찾고 아침을 차리고 아이를 깨우며 분주한 모습이겠구나 멋대로 상상해본다. 고개를 돌려 논밭에 고개를 처박고 먹이 찾는 철새들을 눈에 담는다. 철새들은 아주 예민하다. 백 미터도 더 떨어져 서있는 내가 조금 다가가 보겠다고 한발 내딛어 발에 밟힌 지푸라기가 바시락 소리를 내면 소리를 들은 철새들은 동작멈춤 상태가 된다. 조금 전까지 땅에 푹 처박고 있던 고개를 빳빳이 든 채 미동도 않는다.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있지만 옆에서 다가올 적을 감시하는 태세다. 그 모양새가 귀여워 한참을 바라본다. 며칠 전 사진 찍겠다고 먹이 찾던 철새 수십 마리를 날려 보낸 경험이 있어 조용히 뒷걸음질 친다. 이내 안심하고 고개를 드는 철새들은 다시 먹이 찾기에 집중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가엔 작은 어린이집이 있다. 8시. 검은색 승합차가 멈춰 선다. 차 옆쪽 몸통엔 저쪽 아랫마을에 있는 한식집 이름이 박혀있다. 그 집 딸내민가보다. 앙증맞은 양갈래 머리를 한 작은 여자아이가 아빠 품에 안겨 내린다. 아빠는 아이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 선생님과 만날 때까지 딸아이를 내려놓은 자리에 서서 가만히 뒷모습을 쫓는다. 이쯤 되면 나는 조금씩 부끄러워진다. 저 아이는 한참 전에 졸린 눈 비비며 일어나 아침을 먹고 양치를 하고 머리를 빗고 옷을 입고 그 과정에 부모와 작은 실랑이도 있었을 거고, 신발을 신었을 거고 반쯤 감긴 눈으로 이곳까지 왔을 터인데. 나는 돈을 번다는 사람이 씻지도 않고 나와 산책을 하고 있는 것이니. 저 아이가 나보다 훨씬 부지런하다는 걸 실감한다. 그러니 오늘도 아침을 맛있게 먹고, 신명 나게 일을 해보아야지, 최면을 걸며 식사준비를 시작한다. 작은 아이로 하여금 시작되었던 오늘 하루도 잘 마누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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