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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Jan 13. 2021

난감한 선물

생일 선물로 뭐 갖고 싶어? 어김없이 올해도 듣는 질문이다. 그처럼 난감한 질문이 없다. 현대 코나 하이브리드 2021년 버전 펄스레드야, 라고 대답할 수도 없다. 갖고 싶은 유일한 것인데도 말이다. 언제나 그랬다. 연애를 할 때 남자 친구가 물어오는 것도 난감했다. 가격대를 책정하는 것도 어렵다. 평소에 갖고 싶다고 생각해둔 것도 딱히 없는 편이다. 원하는 걸 가장 뻔뻔하게(?) 요구할 수 있는 날이야말로 생일이지 싶으면서도 쭈뼛거리게 된다. 그래서 생일을 앞둔 며칠은 늘 곤혹스러웠다.


그 와중에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지극히 가까운 사람들에게 한정되는 것이지만, 실로 내가 가장 달갑게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편지다. 자필 편지. 종이 한 장에 볼펜 하나 있으면 완성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내게 편지란 늘 즐거운 작업이었기에 요구하는 마음 또한 편했다. 그런데 상대에겐 그게 아니었나 보다. 에이포 용지어야 하며 폰트 사이즈는 11이어야한다 농 섞인 말을 건넸더니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매년 그래왔고, 올해는 또? 라고 묻고 싶지만 참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받아보겠나 싶어 졸랐다.


지난해 말이었다. 아버지에게 부담이 되면 안 써도 괜찮다 덧붙이니 그건 또 아니란다. 그래도 꼭 선물은 고르라길래 백팩을 사달라 했다. 대신 편지는 감면해주겠다고 하였다. 흥정도 아니고 거래도 아닌 암묵적인 딜이 형성되었다. 그렇게 오늘을 맞이했다. 받고 싶은 마음보다 해주어야 편한 마음이 있다. 나의 경우 부모에게 그렇고, 부모님 또한 나에게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뻔뻔하게 해 달라, 손 내미는 게 되려 반가울 때가 있다. 출가하면 일 년에 몇 끼 같이할지 모를 꽉 찬 나이의 여식이니 매해 마지막이다 싶을 정도로 엄마를 조른다. 올해는 엄마가 해준 갈비찜이 먹고 싶다고 졸랐다. 엄마는 교하 사거리까지 걸어가 등갈비를 사 왔고, 밤새 절였다는 갈비찜을 푸짐하게 담아 식탁에 내놓았다. 미역국 들이키는 소리와 갈비를 뜯으며 맛있다를 연발하는 추임새로 밥상이 채워졌다. 식사가 끝났다. 잠깐 방으로 들어간 아버지가 노트 한 권을 들고 나타났다.


사실은 지난해 연말, 내게서 손편지 요청이 있었던 날부터 하루에 한 장씩 써온 편지라 하였다. 겉표지에 수능 X-파일이라 쓰여있는 중학교 입시학원에서 받아 몇 장 쓰다 책상에 처박아두었던 갈색 노트. 오랜 시간 묵혀두었던 그 노트는 몇 번의 이사를 거치는 동안에도 용케 버려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낙서로 가득했을 처음 몇 장을 뜯어내고 아버지는 일기를 적어내려 갔다. 맞다. 이건 편지를 빙자한 일기라고 하였다. 편지는 편지인데, 일기 형식이야. 그래서 속마음을 털어놓았기 때문에 마냥 달가운 소리만 있지는 않을 거야.


아버지가 말하는 달가운 소리가 내 귀엔 슬픈 소리라 들렸다. 이 일기를 읽고 기분 좋게 출근할 자신이 없었다. 잠깐 들춰보았을 때 기저귀라는 단어가 얼핏 보였고, 여기서 기저귀란 아버지와 엄마가 매주 일요일마다 찾는 강동구 할머니의 이야기일 것이었다. 기저귀라는 단어 세 글자에 살짝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결국 읽어보지 못하고 출근을 했다.


오늘따라 일복이 터진 나는 9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노트북을 손에 든 채. 원고가 남아있었다. 마무리하고 나니 생일이 13분 남아있었다. 사실 생일, 생일 거리면서 하루 종일 의미를 부여할 만큼 특별하지 않았다. 생일이 아닌 날, 생일처럼 놀았고 생일은 되려 일한 날이 많았다. 왜 생일인데 야근을 하냐, 생일인데 뭐 하고 있냐, 는 연락들에 하나하나 답장을 보내고 나니 자정이 훌쩍 넘어있었고, 느긋하게 반신욕까지 하고 나와 그제야 노트를 집어 들었다. 악필이라 알아보기 힘들 수 있다며 몇 번이고 강조했던 아버지의 말처럼 정말 알아보기 힘든 글씨였지만, 그건 악필이라서가 아니라 가장 허심탄회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긴 거라고. 꾸미지 않고 썼다 지우지 않은 거라고. 최대한 힘주지 않고 읽으니 그런대로 또 잘 읽혔다. 첫 페이지를 장식한 건 크리스마스의 기록이었다.


20201225 (금)

성탄일 저녁 소란스러운 파티.

유승민이 제 생일 선물을 주문한다.

가만히 생각하니 딸아이는 어제도 오늘도 빈손이다.

엄마 아빠는 염치가 없다.

저렇게 허덕이도록 키워왔는가.


20201226 (토)

산책에서 돌아오니 TV 속에 벽난로가 피어 있다.

우리 집 늦둥이 지니와 함께 큰 딸 승민이가 부린 마술이다.

제 엄마 아빠를 위한 마음 씀씀이가 전해온다.

그러는 딸아이는 전원 끄는 걸 엄청 싫어한다.

돈 몇 푼 때문이 아닌데 그게 쪼잔해 보이나 보다.

지구가 지금 많이 아파하고 있는데...

솔직히 우리 집 두 여자는 너무 물건을 많이 사지 싶다.

쇼핑 중독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주위에 배고프고 헐벗은 이들이 많은데...

가끔은 이런 무관심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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