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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Jan 15. 2021

잃어버린 말

사실은 아버지의 편지를 이곳에 옮겨 적을 요량이었다. 그럴싸한 글은 써내지 못하더라도 이곳 사이트의 창을 켜놓고 키보드를 조금이라도 만지작거려야 그날의 할 일을 다 끝낸 기분이 들었다. 아무와도 약속한 적 없는데, 그냥 그래야만 제 할 일 마치고 편한 맘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27일. 아버지가 갈색 노트를 건네주면서 덧붙였던 말처럼 그건 나를 향한 편지가 아니었다. 독백이었다. 내가 읽을 거란 걸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는 듯. 거칠고 격한 감정을 다 쏟아내고 있었다. 그 가식 없는 표현 방식이 달가우면서도 무겁다. 할머니와 아버지와 엄마, 고모의 이야기. 도움이 필요한 할머니와 금이야 옥이야 길러낸 아버지. 평생 시댁만 가면 외딴섬에 둥둥 떠있던 엄마, 애증의 시누이였던 고모.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혀오는 그들의 관계를 풀어낼 언어가 아직 나에겐 없다. 침대에 앉아 다시 읽어 내려갔다. 처음 읽었을 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글자가 눈에 띄고, 잘못 이해했던 구석을 발견한다. 반복해서 읽어낼수록 무겁다. 뜻도 제대로 이해 못하고 무얼 어떻게 옮겨 적는 담.  그만두었다.


20대 타지 생활의 여파를 오늘에서야 느낀다. 어휘력이 너무나 후달린다. 밥을 먹다가도 이어가던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표현할 마땅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머뭇거린다. 맞은편에 앉은 친구가 말해주어 알았다. 찾고 있던 '성역 없이'였다. 어쩌면 이럴 수 있는가. 점점 말을 잃어가는 기분이다.


이청준의 눈길을 필사하고 있다. 필사라고 해봐야 도구는 노트북이다. 거창하게 꾹꾹 눌러 담은 필체로 노트를 가득 채우는 그런 노력은 아니다. 나에게 가장 익숙한 손가락의 감각으로 필체를 읽히려고 노력 중이다. 생각보다 재밌다. 한동안 소설만 읽고 지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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