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승민 Jan 04. 2021

그러니까 부자란 말이지...

대형 티브이를 옮겨야 할 일이 있었다. 운전이 익숙지 않아 가까운 동생에게 미안함을 무릅쓰고 운반을 부탁했다. 서울에서 파주까지, 다시 파주에서 서울까지. 35km씩 왕복 70km를 동생은 흔쾌히 달려주었다. 마당에 미리 내두었던 대형 티브이 상자를 싣는 순간 뒷좌석 시트에 흙이 떨어졌다. 나를 태워야 하는데, 차가 영 더럽다며 전날 세차까지 해왔다는데, 너무 미안해서 미안하단 말도 안 나왔다. 쭈뼛거리고 서있으니 이럴 때 물티슈가 필요한 법이쥬~ 익살스럽게 받아치며 스윽 닦아내는 동생이다.


대형 티브이 목적지는 지인 집이었다. 지인에겐 36개월 된 딸내미가 있다. 이래저래 신세도 지고, 고마운 게 많아 연말에 뽀로로 생일 케이크 장난감을 선물했더랬다. 찍어준 내비게이션 도착지에 차를 세워두고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칼같이 약속시간을 지키는 그가 어쩐 일인지 나올 낌새가 없다. 잘못 온 건가 스마트폰 지도를 뒤적거리는데 주차장 차들 사이로 지인 얼굴이 보였다. 그 뒤로 분홍색 패딩을 입은 작은 아이가 엄마손을 잡고 서있다. 얼굴이 내 주먹만 한 그 아이 앞에 엄마가 쭈그리고 앉아 말한다. 뽀로로 케이크 사준 분이야. 인사해야지? 감사합니다, 하는 거야. 마스크가 얼굴을 다 가려버릴 정도로 작은 아이 얼굴에 아주 잠깐 들뜬 표정이 스몄다. 뽀로로. 그래, 뽀뽀로. 뽀로로 케이크 주신 분이야. 감사합니다, 할까? 이번엔 나도 쭈그려 앉았다. 작아 보이던 아이가 더 작아 보인다. 귀여운 배꼽인사를 보여주는 아이에게 안 추워? 물어보다 김소영 작가님의 어린이 에세이가 생각나 안 추워요? 고쳐 말해본다. 아이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시선이 줄곧 나를 향해 있다. 새카만 눈동자가 어쩜 저렇게 반짝반짝 빛날까. 아가들은 어쩌면 저리도 사랑스러울까. 엄마 손, 아빠 손 붙잡고 배웅해주는 아이를 뒤고 하고 그제야 깨닫는다. 그 쪼끄마난 아가가 고맙단 인사를 하러 이 추위를 뚫고 나와주었구나. 아가라 패딩 입느라고 걸어오느라고 시간이 걸렸던 거구나. 중무장을 하고 총출동한 세 가족이 눈에 밟힌다.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동생이 있다. 여차저차 볼일이 있어 잠깐 집에 들렀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며칠 전 보던 드라마에 등장하던 잡채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이고, 잡채 먹고 싶다. 동생이 기다렸다는 듯이 묻는다. 잡채 좀 드릴까요? 잡채 있는데. 뭐지, 이 드라마 같은 대사의 전개는? 나는 되묻는다. 지안아, 잡채가 왜 있어? 네가 만들었어? 네. 드릴게요. 많이 만들어놨거든요. 동생은 냉동실에서 주섬주섬 대형 지퍼백을 꺼냈다. 찬장 문을 열고 소형 지퍼백을 꺼내 소분해놨던 잡채 세 덩어리를 집어넣는다. 입구를 꾹꾹 눌러 종이백에 담아주며 고기가 안 들어갔는데, 그래도 먹을만할 거예요. 맡겨놓은 음식 찾아가는 것처럼 내 손에 잡채가 들렸다. 고기가 안 들어갔는데, 먹을만할 거라던 말은 밑밥이었던 게 분명하다. 집으로 돌아와 전자레인지에 돌려 한 덩어리 시식을 해보았는데, 우리 할머니 손맛 잡채가 생각난다. 잡채 예찬론으로 장난 섞인 시 한 편 적어 보냈다. 동생은 후기 치고 너무 고퀄리티가 아니냐며 멋쩍게 웃는다.


그러니까 어느 한 틈도 빌 새가 없다. 사람들의 마음이 차곡차곡 쌓여 틈 사이로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와 풍성한 하루를 만들어버린다. 사실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부탁은 거절해도 그만, 강추위를 뚫고 나와 고맙다는 말 안 해도 그만, 잡채 먹고 싶다는 혼잣말도 흘려버리면 그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들에 마음을 나누는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부자란 말인가.  

작가의 이전글 나를 아낄 수밖에 없었던 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