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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Dec 30. 2020

나를 아낄 수밖에 없었던 건

최근 들어 거울을 조금 오래 보기 시작했다.


며칠 전 아버지가 급성 알레르기로 응급실을 찾았을 때도, 엄마가 휴대폰을 만지다가 "이거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 하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도,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낡아버린 집안 구석구석에서 세월의 흔적을 발견할 때도.


더 거슬러올라가 4년 전, 할아버지의 빈소가 차려지던 날 꼭두새벽부터 눈길을 달려 장지를 찾아 헤맸을 때도, 고모 둘과 고모네 식구들이 빙 둘러앉아 서로에게 위로를 건넸을 때도, 12년 전 외할아버지의 빈소에 조문객들의 발걸음이 뜸해졌던 새벽에도, 앞으로 내가 의지할 사람이라곤 콧물 삐죽 흘리며 쿨쿨 자고 있는 저 열 살짜리 사촌동생이 유일하다는 걸 실감했을 때도. 조용히 상상했었다. 나에게도 친언니나 친오빠가 있었으면. 아니, 하다못해 지금 이 감정을 한마디 내뱉을 수 있는 친동생이라도 있었으면.


불쌍하고 외로운 종류의 느낌은 아니었다. 그건 이미 오래전에 졸업했다. 집에 가서 데리고 놀 동생이 없었던 대신 어울려 다니던 동네 친구들이 있었다. 꼬맹이들과 야산을 휘젓고 다니며 대장 노릇을 할 땐 더할 나위 없는 쾌감을 느꼈고, 집으로 돌아오면 원래 동생이 있는데 오늘만 집에 없다는 듯 상상 속의 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허무맹랑하지만, 어쨌거나 나름의 방법으로 극복해왔다. 오늘 엄마 안 오시니? 발레학원에 마중을 나온 친구 어머니가 물어오면 대차게 고개를 저으며 제가 남동생이 세 쌍둥이라서요, 엄마는 오늘 바쁘세요, 기상천외하고도 뻔뻔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유치원생인 나를 데리러 오지 못하는 부모가 자식한테 소홀하다는 인상을 주기 싫었다. 그러니까 사실은 내가 가진 외로움의 감정보다 외동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 거북했던 것 같다.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는 동생, 나도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매일 꾸고 살았다.


살면서 만난 외동인 친구들은 하나같이 외로움을 토로했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나는 그들에게 늘 위로를 건네는 입장이었다. 나도 언니나 동생 있었으면 좋겠다,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면 "형제나 자매가 있다고 다 좋은 건 아니야, 네가 없어봐서 그래." 아무도 공감해주지 않았다. 단호하게 고개 젓는 친구들을 보며 조용히 수긍했다. 그래, 나한테 형제나 자매가 있었다면 유학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을 거야. 원 없이 하고 싶은 것에 미쳐있지 못했을 거야. 부모의 사랑을 지금처럼 독차지하지는 못했을 거야. 그러니까 받아들여야 맞겠다.


그래서 다 잊고 극복한 감정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며칠 전 아버지가 백내장 수술을 하신다며 대체휴무 쓰고 병원에 따라간다는 지인을 보는 순간 와르르 무너졌다. 응급실에 누워있던 내 아버지가 떠올랐다. 당사자인 아버지조차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나만 바라보던 엄마에게도. 우리 모두에게 처음인 일이었는데, 결정권이 나에게 넘어오고 있다는 사실이 무겁게 느껴졌었다. 동생이 결혼하고도 꼬박꼬박 남편이랑 주말마다 집에 찾아온다며 왜 그런지 몰라, 입을 삐죽거리던 지인. 싫은 듯 좋은 내색을 드러내는 지인을 볼 때면 멀고도 가까울 나의 미래를 떠올렸었다. 내가 애써 친정을 찾지 않으면 주말 내내 고요할 우리 집의 모습도.


그러니까 나에겐 나밖에 없었다. 거액의 물건을 살 때면 다음 달의 나와 다다음달의 나에게 협조를 구한다는 누군가의 우스갯소리처럼 고민이 되는 문제도 기억하고 싶은 순간도 그 모든 걸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나와 또 다른 나뿐이었다. 패기 가득했던 부모의 젊은 시절을 추억할 사람도 나. 부모의 곁을 떠나 오랜 타지 생활에 고단했던 지난날의 나를 위로해줄 사람도 나. 한 지붕 아래 평범하게 살아가는가 싶다가도 크고 작은 문제들로 소소한 복작거림을 하나씩 해쳐나갈 사람도 나. 먼 훗날 부모가 떠났을 때 그리움도 책임감도 짊어질 사람은 나. 이 모든 감정을 차곡차곡 포개어놓다가 다시 찬찬히 들여다볼 사람도 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거울 속 나의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든든하고 정겹다. 정신 나간 소리 같지만, 이만하면 강인하게 잘 살아온 것 같아 뿌듯하고 앞으로 그 어떤 일이 닥쳐도 꿋꿋하게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아 듬직하다. 그러기 위해선 건강을 챙겨야겠구나. 더 부지런해져야겠구나. 힘이 불끈 솟아오르기까지 한다.


눈가에 주름이 생긴 건가. 어젯밤 화장을 제대로 안 지웠나. 연장한 속눈썹이 좀 떨어진 것 같은데. 눈썹을 좀 가다듬어야 하나. 뿌리 염색을 슬슬 할 때가 되었나. 그간 거울을 들여다보는 순간부터 뒤돌아 나오기까지 그칠 줄 모르는 외모 지적질로 가득했단다면 요즘은 마냥 저냥 평온하기만 하다. 내가 기억하는 어릴 적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든 나의 얼굴. 밤거리를 쏘다니며 친구들과 놀러 다니던 20대의 얼굴.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진로를 고민하며 밤을 지새웠던 지난날의 얼굴들까지. 과거 모든 얼굴이 지금 내 앞에 있다. 나는 잘 해왔고, 앞으로도 잘해나갈 거라는 걸 이제는 안다.


별 거 아닌 소소한 변화지만, 조금 많이 반갑다. 이제 조금 덜 외로울 수 있을 것 같고, 더 나를 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나를 얼마큼 사랑하나요? 나를 사랑하기! 와 같은 다소 오글거리는 멘트가 적힌 서적의 베스트셀러에서, 명상법을 안내하는 누군가의 글귀에서, 그 어떤 해답도 찾지 못했었다. 사실은 거울 속에 있었다. 너무나 명백한 백 점짜리 증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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