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투두둑!”
“호도독”
“투-욱!“
떨어질 때를 아는 건 오로지 살구와 그 알맹이를 단단하게 붙들고 있던 나뭇가지뿐. 둘 사이 교신이 오가고 모든 조건이 충족했을 때 살구는 맹렬하게 전사한다.
떨어지는 소리가 저마다 다른 건 누구 하나 같은 얼굴이 없기 때문. 크고 뽀얀 놈, 샛노랗게 물든 놈, 한쪽이 새빨갛게 익어가는 놈, 짱돌처럼 작고 단단한 놈, 윗쪽 가지에 달려있던 놈, 바람이 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떨어진 놈. 다 같은 살구놈이지만 각자 다른 처지다. 하필 낙하지점이 내 방 창문 옆 마당이라 나는 창을 닫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무언가에 집중한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온종일 귀만 기울이고 있다.
책장이 한 페이지 넘어갔을 때 “투욱-” 하는 소리가 들리면 온전했던 나의 집중력은 희미하게 흔들린다. 연달아 “투둑툭툭!” 하는 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면 그놈들이 어디께 떨어졌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한다. 이른 아침 여섯시에, 해가 한참 올라간 정오에, 노을이 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저녁 여섯시에, 새벽 한 시가 넘어가는 고요한 시각에도, 살구는 때를 가리지 않고 살아생전 내 본 적 없는 소리를 강렬하게 터뜨린다.
소리가 차곡차곡 쌓여 서너 시간쯤 지나고 나면 나는 참다못해 일어난다. 소쿠리를 들고 마당에 나간다. 나뭇가지 사이 걸터앉은 놈이나 폭신폭신한 흙 위로 뒹굴고 있는 놈들은 상처 하나 없이 반들반들한 껍데기를 보전하지만 자글자글한 돌멩이 위, 뾰족 튀어나온 나뭇가지 위로 떨어진 놈들에겐 꽤나 강렬한 상흔이 새겨진다.
이놈 저놈 할 거 없이 각자의 쓸모가 있는지라 소쿠리에 하나하나 옮겨 담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놈은 또 없는지 집게로 훠이훠이 나뭇잎 속을 뒤져본다. 짙은 녹음 사이로 고개를 디민 뽀오얀 살구색을 발견할 때면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무르익다못해 터진 놈들은 토지와 벌레들에게 양보한다. 쥐 잡듯 뒤지면 살구나무가 괘씸하게 생각할 것 같아 살살 들춰내며 관심 없는 듯 어쩌다 찾은 듯 그렇게 수풀 사이 몇 번을 돌면 금세 한 바구니 가득 차오른다.
깨끗하게 씻어낸 살구들은 한 차례 소쿠리 위에서 말려진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무르익음이 가장 빛을 발하는 뽀송뽀송한 상태가 되면 다시 거둬들인다. 살구청을 담아낼 큰 통 서너 개에 가득 담기고, 살구주로 만들어질 놈들은 예쁜 놈, 덜 예쁜 놈, 달달하게 무르익을 놈으로 갈 길이 나뉜다.
그 어느 때보다 살구가 풍년이라 올해는 주변 지인들에게 나눠줄 살구주도 담가보기로 했다. 크고 작은 유리병에 살구를 통째로 넣어보고 살구씨를 분리해서도 넣어보고 설탕도 곁들여 넣어보고 감초도 예쁜 놈으로다가 골라 넣어보고. 그렇게 서재에 하나둘 늘어가는, 살구 가득 담긴 유리병들을 보면 어찌나 뿌듯한지. 반년 뒤, 3년 뒤, 혹은 그보다 더 먼 미래의 어느 날에 뚜껑을 개봉하는 순간 나는 2023년의 여름을 기억해 낼 수 있을까.
살구가 떨어질 때마다 설렜던 짜릿함, 소쿠리를 챙겨 현관문을 열고 나갈 때 마음 한구석 부풀어 오르던 기대감, 한가득 담긴 살구들을 내밀어 보일 때마다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던 가족들, 살구를 자꾸만 딸구라 발음하던 아버지, 그때마다 작은 폭소를 터뜨리던 집구석의 따뜻한 공기를, 말이다.
아니, 그 무엇보다도 살구의 떨어짐이, 나 좀 봐달라는듯한 둔탁하고도 경쾌한 찰나의 소리가, 그 자연스러움이 신비롭게 다가온 요 며칠이었기에. 나도 그리 살고 싶다, 자연을 닮아가고 싶다, 나지막하게 되뇌이는 여름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