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됐다. 분명 어느 날엔가 아버지는 전립선으로 인한 통증을 호소해 왔을 것이다. 자기 전 화장실에서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새벽에도 몇 번씩 화장실에 다녀가는 일이 잦아졌다. 수년이 지난 오늘날엔 화장실 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날이 드물 정도로 일상이 되었다.
대부분의 날들은 내가 더 늦게 잠이 든다. 보통 하룻밤 사이 적에는 한두 번 많게는 서너 번씩 화장실에 오가는 그에게도 나름의 기준은 있다. 엄마가 잠든 안방 화장실을 쓰느냐, 현관과 내 방에 가까운 공용화장실을 쓰느냐. 안쪽 침실은 큰 나무에 가려져있어 꽤 어둡다. 북향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어두운 밤길-비록 실내이지만 잠결에 걷는 짧은 길 역시 그에겐 밤길일 것이다-을 아버지는 안경 없이 벽을 더듬어 간다는 걸 알게 됐다. 그날로 야광 테이프를 사서 복도 양옆에 놓인 책꽂이에 줄줄이 붙여놓았다. 그러자 엄마는 안방 화장실의 불을 켜놓고 잠에 들었다. 자는 동안에도 켜져 있는 불이 혹여나 엄마의 수면에 방해가 될까 봐 아버진 공용화장실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어렸을 땐 머리만 대도 잠들던 나는 점점 잠귀가 밝은 아버지를 닮아갔다. 덕분에 공용화장실에 아버지가 드나들 때마다 깨곤 했다. 잠에서 깨어났다 하여 화장실 가는 아버지에게 말을 건다거나 한 적은 없지만, 찰나의 뒤척거림이 신경 쓰였던 모양인지 아버지는 또다시 안방 화장실을 이용했다. 어느 날은 안방, 어느 날은 공용화장실로.
불이 꺼진 방 안, 침대에 누워 잠에 들기 전의 고요함 속에서 아버지의 발소리를 듣는 건 이제 익숙해졌다. 맨발로 나뭇바닥을 슥슥 걷는 그 희미한 소리가 점점 멀어지면 안방으로 향하고 있음을 짐작했다. 슥슥 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지면 나는 최대한 자는 척을 하기 위해 숨소리를 죽였다. 요즘 들어 인기척만 느껴도 깨다 보니 아버지의 밤 여정은 다시 안방 쪽으로 향하는 중이다.
아버지의 속을 꽤나 썩여온,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질 기미가 없을 전립선의 고통이라지만 이제 내겐 들려야 마음이 편해지는 소리가 되어버렸다. 그 소리는 이따금씩 내 방안으로도 들어온다. 미처 못 끄고 잠든 작은 스탠드 조명을 꺼주기 위해서다. 귀뚜라미 소리가 좋아 활짝 열어놓고 잔 창문을 닫아주기 위해서다. 가끔은 내 발치까지 내려가있는 이불을 살포시 올려주기 위함이다. 그 발소리가 집안 이곳저곳을 슥슥 소리 내며 오가는 동안 숨죽이고 있는 내 안의 정적이 이젠 따뜻하고 짠한 사랑으로 느껴지는 탓이다.
오늘도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한 나는 정적 속에서 수백 마리에 가까운 양을 한 마리씩 세고 있었고, 아버지는 어김없이 슥슥 소리를 내며 벌써 두 번째 화장실을 다녀온 모양이다. 계절 따라 달라지는 새소리며 저녁때면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들처럼 어김없이 들려오는 작고 희미한 발소리가 여느 밤보다 저며오길래 기록해 본다. 세 번째 발소리가 들리기 전에 어서 노트북을 닫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