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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롱지다 Oct 22. 2023

겨울은 뱀의 촉감처럼

202310210959

합정역으로 향하는 퇴근길... 빛이 사라진 도로에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 그 사이에 끼여 얇은 패딩의 단추를 목까지 채워도 맨살로 스미는 바람은 도저히 막아낼 방법이 없다. 기상청 주무관이 말하길 5도 이하의 날이 계속 이어질 때 겨울이 왔다고 한다던데… 어쩌면 어제 퇴근길의 바람은 차갑고 섬뜩한 뱀의 촉감으로 소매 끝에 스며들어 ‘이제 겨울이야!’하는 속삭임이 아니었을까.


10분 전,

6시 정각 송주임과 퇴근 버튼을 누르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고양이 울음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1층 계단 참에 이르렀을 때 손바닥만 한 치즈빛깔 아기고양이가 창문 아래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우리를 보자 필사적으로 목청을 높이고 좁디좁은 계단 참 벽 면에 붙어 요리조리 도망을 다녔다. 아기고양이를 잡겠다고 따라가면 건물 밖으로 도망칠까 봐 가만히 지켜보니 아기고양이는 70cm 높이의 창문 턱으로 점핑을 시도했다. 아기고양이 점프력으론 택도 없이 높아서 좀처럼 창문 턱에 닿지도 못하고 떨어지길 여러 번.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순간 집으로 데려올까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혹시나 해서 창문너머를 보니 엄마고양이가 나를 보고 쓱 사라졌다. 엄마고양이도 아기고양이 때문에 창문 밖에서 동동거렸을 걸 생각하니 얼른 아기고양이를 잡아야만 했다.

'아가... 아가...' 하고 부르니 도망치던 아기고양이가 나를 쳐다보며 한껏 움츠렸다. 한 손으로 잡아 들어 올리니 한 움큼도 안 되는 정말 아가였다. 창문 턱에 올리자마자 아기고양이는 엄마고양이가 사라진 방향으로 쏜살같이 뛰어가버렸다.


날이 차가워졌다. 마음은 더 추워졌다. 세상은 저 여리디 여린 아기고양이가 홀로 살아가기엔 너무 무서운 곳이다. 그래서 신은 엄마를 만들었다고 하던데... 그 엄마도 많아봐야 3살 안팎이라 세상살이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추위가 덥석 다가오면 더해질 텐데. 아기고양이를 엄마에게 보내주어도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5시간 전,

‘VIPS 할인쿠폰이 있는데 점심 같이 할래?' 송주임에게 물었더니 흔쾌히 승낙했다. 내 아들과 3살밖에 차이 나지 않은 송주임은 3년 전 대학졸업 후 우리 회사에 입사가 결정되자마자 서울로 올라왔다. 사무실 근처에 작은 원룸을 구해 씩씩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출근 다음 날부터 고구마 한 개 또는 밥 반공기와 반찬 하나만 도시락을 싸와서 점심으로 먹는다. 그걸로 '식사가 돼?' 하고 물으니 소화가 잘 안 돼서 많이 못 먹기도 하고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게 습관이 되어서 괜찮다고 했다. 그 한 끼라도 제대로 챙겨주고 싶어 나는 출근하는 날에는 웬만하면 송주임에게 밥을 사주려고 한다. 같이 밥 먹을 때 송주임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한 손엔 숟가락, 다른 손엔 젓가락을 들고 아주 아주 천천히 꼭꼭 씹어가며 눈앞에 있는 음식을 깨끗이 다 먹는다. 그 모습에 나는 왠지 식비를 아끼려고 그러는 것 같아 짠한 마음이 든다.


우리는 둘 다 호랑이 띠고 MBTI도 같다. 식사할 때 굳이 의미 없는 인사치레나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근황은 서로 물어보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식사에 집중하고 음식을 씹을 때는 주변 풍경에 눈을 돌린다. VIPS는 우리 같은 사람에게 참 좋은 곳이다. 두 세 차례 서로 엇갈려 먹고 나면 커피와 디저트를 먹는다. 방금 구운 와플에 초코시럽과 생크림을 발라 송주임에게 먹을 건지 물어보았다. 송주임은 고맙다며 방긋 웃었다.


20살이 넘으면 다 어른이라 하지만 내 눈엔 송주임은 이제 겨우 20대 중반을 넘긴 ‘아가’다. 입사한 지 1년이 되었을 무렵 향수병 비슷한 증상으로 꽤 자주 좀 심각하게 아팠다. 그렇게 아파도 부모님에게는 알리지 않고 홀로 견디는 날들이 종종 있었기에 나는 그럴 거면 나랑 병원 갈래? 아님 연차 내고 엄마한테 가서 쉬고 올래?라고 반협박조로 물었다. 그제야 송주임은 '엄마한테 다녀올게요' 하며 연차를 냈다. 며칠 안 되는 연차를 병가로 써버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회 초년생에게 세상은 보이지 않는 감옥처럼 무조건 버터 내야만 하는 곳으로 보였을 테다. 후루룩 되감기가 끝나자 그제밤 TV에서 보았던 실화탐사대가 생각났다.


"어제 TV에서 실화탐사대를 봤어. 너무도 건장한 30대 학원강사가 동료강사와 원장으로부터 수년간 심한 구타와 욕설, 상납에 시달리다 엄마한테 발견돼서 경찰에 신고한 사건이었어. 심지어 동료강사는 제자였고 원장은 학원강사의 대학후배라나 선배라나 어쨌든 오랫동안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대. 학원은 그 동네에서 꽤 잘되는 곳으로 유명했나 봐.


그날도 엄청 맞고 집에 와서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죽으려고 했다는 거야. 다행히 엄마가 방문 사이로 무릎을 꿇고 원장에게 쩔쩔매면서 통화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수상해서 캐물으니 그제야 아들이 그런 일 당해왔다는 걸 털어놓았대. 부모는 당장 경찰에 신고했고.


대학 때 동아리 대표를 했을 만큼 활발하고 리더십도 있던 사람이었다는데 어떻게 그렇게 피하거나 맞설 의지도 없이 가스라이팅을 당해 왔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어. 더 이해가 안 가는 건 제자였던 20대 젊은 동료강사들이야. 원장이 cctv를 보면서 어떻게 때려라 명령을 하면 그대로 때렸다고도 하던데 타인을 때린다는 건 일반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잖아. 전문가는 그러더라고. 어떤 선을 넘어버리면 하루라도 그러지 않으면 허전해진다고 하네."


송주임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다 뭔가 결심이 선 것처럼 눈빛이 찐해졌다.   


"실장님.. 실은 소은씨가 그래서 그만둔 거예요!"  




소은씨는 설계 전공으로 송주임보다 한 살 어리고 입사한 지 이제 1년이 좀 넘었다. 소은씨 역시 지방에서 올라와 자취를 하고 있다. 지난 8월 모 도시에 있는 체험관 공사가 시작되면서 현장 설계팀에 들어갔다. 우리같이 작은 회사는 기획부서는 그나마 실장-과장-주임의 체계가 갖추어져 있지만 설계팀은 신입만 있다. 기획에서 제안서를 만들어 당선이 되면 공사를 진행할 수 있는데 늘 당선이 된다는 보장이 없으니 인건비 차원에서 설계팀에 직원이 많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사는 제안서가 당선되면 자주 합을 맞춰 온 프리랜서 현장소장과 계약을 하고 현장팀을 꾸린다. 다시 말하면 공사가 시작되면 직원인 설계팀 신입이 프리랜서인 현장소장의 지시에 따라 일을 해야 하는 독특한 구조인 것이다. 현장의 특성상 언제든 예측불가능한 일들이 생길 수 있어 야근이나 주말근무가 불가피하고 공사 막바지엔 더 잦아진다. 또한 현장이 서울이 아니라면 공사기간 내내 회사가 정한 현장 근처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야 하는 불편함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설계를 제대로, 빠르게 배우기 위해서는 현장팀에 들어가는 게 제일 좋다. 그래야 현장의 컨디션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서 도면에 반영하고 공사 진행에 따라 실시간 업데이트하여 공사가 끝남과 동시에 발주처에 제출해야 하는 준공도면을 무리 없이 작성할 수 있다. 그렇게 하나의 프로젝트를 내 손으로 끝내고 나면 도면작업에 자신이 생겨 어떤 공사에 투입되더라도 다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대표는 신입인 소은씨에게 일을 배울 좋은 기회가 왔다고 웃었다.


한 달이 지나 송주임에게 소은씨 근황이 궁금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발주처와 아이템 협상이 길어지면서 현장 일이 그렇게 바쁘지 않은데 야근은 물론 주말도 쉬지 않고 근무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너무 놀라 총무과 김과장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며 부당하다고 말을 했더니 김과장은 오히려 소은씨가 왜 자기에게 미리 말하지 않았는지 당황해했다. 그리곤 현장소장에게 전화해 주말근무를 진짜 시키는지 물어보았다. 현장소장은 소은씨가 도면작업이 미숙하니 주말에도 계속 연습하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고 소은씨가 이에 동의를 했다고 한다. 김과장은 야근과 주말근무 수당은 현장소장의 말대로 소은씨 자의라 줄 필요가 없다며 안도했다. 부서도 다르고 일주일에 두 번 출근하는 내가 회사사정에 이렇다 저렇다 할 입장도 아니고 무엇보다 소은씨 자의라 하니 그때는 그렇게 일단락이 되었다.


그러나 어제 송주임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전혀 달랐다. 소은씨는 처음 대표로부터 현장에 내려가는 걸 고민해 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안 가고 싶다'는 의사를 전하려고 했다. 대표는 일을 배울 아주 좋은 기회라며 재차 권유했고 현장소장은 일 배울 생각이 없는 거냐며 당장 내려오라고 화를 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짐을 꾸려 내려간 소은씨에게 도면작업이 느리다는 이유로 현장소장은 야근은 물론 주말에도 나와서 CAD 연습을 하라고 했고 원하는 시간 내에 해내지 못하면 호되게 질책을 했다고 한다. 총무과 전화를 받은 이후로는 소은씨 자의로 근무한 걸 왜 서울 사무소에 알리냐며 점점 화를 내는 강도가 더 세졌다고 한다.


소은씨가 내려간 지 석 달이 다 되어가는 이번주 월요일, 대표와 점심을 먹는데 소은씨가 퇴사를 요청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다음 날 아침 소은씨로부터 퇴사를 전하는 카톡을 받았다. 나는 버티느라 수고했고 잘 쉬다 더 좋은 곳에서 일하길 바란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하루 만에 퇴사처리가 되는 건 이례적이라 의아해했었다.


"지난주 금요일 밤에 소은씨 전화를 받았어요. 석 달 동안 주말을 단 한 번도 못 쉬었고 추석연휴에도 추석 당일만 쉬었대요. 일을 못하는 부분에 대해 뭐라 하는 건 참을 수 있는데 성격이나 표정까지 뭐라 하는 건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면서 저라면 어떻게 할 거냐 묻길래 저는 당장 그만둘 거라 했어요. 그리고 그만두기 전에 수당과 연차 같은 건 다 따져서 챙겨 받아야 한다고 말해 주었어요.


윗분들은 배워야 한다면서 의사를 물어본다 하지만 저희 같은 신입은 그게 명령이잖아요. 저도 소은씨와 비슷한 성격이라 똑 부러지게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를 말하는 게 어려운데 실장님 덕분에 배울 수 있었어요.


월요일 저녁 대표님이 전화하셔서 소은 씨에게 남은 연차와 주말 근무일을 소급 적용하면 수요일까지 근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셨대요. 근데 화요일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현장소장님이 당장 나가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쫓겨나듯 그대로 나왔다고 해요!"


송주임의 성토에 나는 한참 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50대 중반의 현장소장은 기획자들 사이에 평판이 비교적 좋은 사람이다. 그의 순발력과 유연함, 합리적 문제해결 능력 덕분에 그와 일해본 업체들은 그를 믿고 따른다. 발주처 역시 그들의 니즈를 즉각 반영해 주는 그를 좋아했다. 그런 사람이기에 대표도 우리 신입을 맡겼던 거였고. 아마도 그는 무엇이 잘못인지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다. 알았다면 딸뻘이나 되는 어린 신입을 그렇게 막 대하고 내쫓지 못했을 테니까.


다 집어던지고 나와도 시원찮을 판에, 아무 소리 못하고 쫓겨나 남들 일하는 환한 대낮에 기차에 몸을 실은 소은씨 모습이 눈으로 본 것처럼 계속 떠올랐다. 소은씨는 '어른'이라 아마도 부모의 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찬기 서린 자취방에 들어가 자책할까 마음이 쓰였다.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서 더 마음이 아렸다.


회사에서 일을 하기로 했다면 배워야지.

일은 배우지 않으면 잘할 수 없어. 또 일을 하다 혼이 날 수도 있지.

그래서 누군가 내게 화를 낸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용기도 필요해.

  

그러나 배움을 약점으로 나의 시간과 노력을 착취하는 행위는 결단코 올바르지 않아.

만약 그 화가 인신공격으로 변질되었다면 당장 도망쳐야 해.

버티지 말고 도망쳐! 그게 용기야.


나는 송주임에게 이 말을 해주며 나 대신 소은 씨를 다독여주라고 부탁했다. 굳이 이 말을 덧붙인 건 나 역시 곧 휴직을 앞두고 있어 송주임이 불안해했기 때문이다. 한 시간을 넘게 지하철을 타고 집이 가까워질수록 몸에 스민 찬기는 온기로 돌아섰지만 마음은 어째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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