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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롱지다 Sep 19. 2024

철학이 필요할 때

2409191227  feat.  김용규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무신론자는 아니지만 종교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딱히 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럼에도 만약 가지게 된다면 내 취향엔 불교가 맞을 것 같다. 불교는 믿음이라기보다 실존을 다루는 철학에 가까우니까. 최근에 막다른 길에 들어선 친구가 하늘의 음성을 듣고 교회를 다니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이가 50이 되면 말도 안 되는 일도 말이 된다) 친구는 모든 종교에 열린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는 모스님의 법문에 심취해 있었다. 그랬기에 나로선 굉장히 신기했고 다른 한편으로 다시 삶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그를 살리신 그분이 나는 너무도 감사했다.   


친구는 알을 깨야 한다는 남편에 혹하여 결혼을 결심했고 남편이 또 다른 알 속에 자신을 가둬버렸다는 걸 깨닫는데 15년이 걸렸다. 그 알을 깨고 나오려 하자 남편의 민낯이 드러났다. 남편은 친구가 변했다고 으르렁거렸고, 친구는 비상식적으로 계산적인 남편으로부터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을 최선의 방법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아이들은 소통의 문을 닫아버렸다. 수심으로 가득한 수많은 낮과 밤을 보내던 어느 날 갑자기 음성이 들려왔다.


'괜찮다. 그만 애써라!'


친구는 그 음성을 따라간 곳에 교회가 있었다고 했다. 이성적인 그답게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어서 온라인으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3년이 지난 지금은 그 어떤 일보다 성경공부가 즐겁고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다고 한다. 남편과 아이들의 관계는 드라마틱하게 나아지지 않았으나 얼핏 들으니 친구의 진심과 노력을 조금씩 알아주는 듯 보였다.


지난주에는 고등학교 동창모임이 있었다. 미션스쿨인 여고를 나온 까닭에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고등학교 친구들은 다 교회를 다닌다. 나만 빼고. 우리들 대화 중 신앙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자연스럽게 주요 이슈로 등장한다.


모태신앙인 L은 교회에서 모태신앙인 남편을 만나 모태신앙으로 아들을 키우고 있다. 특별히 L만 이야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다른 친구들도 모태신앙이고 교회를 다니긴 하나 종교는 개인사에 일부로 여기는 반면 L은 모든 생활이 신앙에서 비롯된다. L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늘 아름답고 좋은 말만 나누며 감사한 일들로 가득하단다. 종교적 지침 아래 형제간의 우애도 남다르고 남편과의 사이도 훌륭하고 아들도 듬직하게 잘 자란다. 하물며 시댁도 L을 고마운 존재로 환영한다고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는 세모나게 눈을 뜨고 L을 대하곤 했다. 그런데 진짜였다. 몇 해 전 L의 아버님 장례식장에서 L의 남편과 두어 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의 얼굴에도 L과 같은 빛이 났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각자의 신앙생활을 이야기하는데 예년과는 좀 달랐다. 아무런 거부감 없이 하나님을 받아들였던 친구들과 달리 사춘기 또는 성인이 된 아이들이 교회를 등한시하는 행동에 다들 우려와 공감을 토해냈기 때문이다. 결론은 하나님 밖의 세상에서 잠시 방황하더라도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며 서로를 응원했다. 안 돌아오면 어쩌나... 나쁜 물이 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나 불안으로 호들갑 떨지 않고 그저 담담한 태도였다. 그 모습들에 처음으로 하나님 안은 대체 어떤 곳이길래 저렇게들 믿고 의지를 할까 의문이 들었다.


의지하고 믿는 구석이 없는 삶은 참 위태롭다. 매번 흔들리면서 기준을 정하다 보니 때론 너무 널널해서 쉽게 무너지고 때론 너무 빡빡해서 숨쉬기 어려웠다. 잘 큰다고 여겼던 아이가 우울의 강을 건너버렸을 때 그로 인해 온 가족의 매일이 변수 없이 지나가지 않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신을 찾았다.


L에게 말했다. 난 늘 내가 체득한 경험과 생각으로 기준을 정하느라 세상을 사는 게 참 버겁고 그만큼 느렸어. 내게도 이유 없이 기준을 정해주는 종교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해. 근데 아직도 그 '이유 없이'가 안 되네! 그러자 L은 뜻밖의 말을 했다.


"난 요즘 이런 기도를 해. 내 삶이 끝날 때까지 이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말이야."


꽃길만 사는 줄 알았던 L도 세상의 뒷면을 모르지는 않았구나 싶어 L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믿음을 지키는 삶도 믿음이 없는 삶도 각자의 이유로 삶이 녹록지 않다면 왠지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종교나 믿음이 요 근래 화두가 된 건 우연히 만난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란 책 덕분이다. 과거에는 철학과 종교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여서 신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전제가 철학사조에 따라 달라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괴테의  '파우스트') 또한 신의 본질은 사랑이며 인간의 구원은 빛과 어둠, 선과 악, 정신과 육체, 숭고와 욕망을 동시에 인정하는 이원론을 통해 더 잘 이룰 수 있다는 헤세의 생각(헤르만헤세 '데미안')에 절로 고개가 끄떡여졌다.


그러자 몇 해 전 인도철학자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온전히 내편이 되어주지 않는 남편 때문에 마음이 참담했던 시기였다. 친구의 친구이자 인도에서 10년 동안 수행하고 돌아온 그는 나의 이야기를 지긋이 들어주었다. 내 말이 끝났을 때 그는 뜬금없이 신에 이르는 길이 3가지가 있다며 말을 시작했다.


"하나는 지식, 다른 하나는 지혜,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사랑이야! 이 길은 사람에 따라  달라. 그중에서 사랑은 가장 빨리 신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지만 가장 힘든 길이지.

너 그래서 힘든 거야!

난 지식이나 지혜로 신에 이르는 타입이라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안될 것 같더라고.

그래서 이젠 사랑으로 한번 도전해 볼까 해!"       


종교가 없는 내게 신은 그저 저만큼 떨어져 나와 상관없이 존재만 하는 존재일 뿐이었는데 내가 그렇게 힘든 이유가 신에 이르는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은 참 어이없게 크나 큰 위로가 되었다. (대충 생각해 봐도 신에 이르는 길이 쉬울 수는 없을 테니까) 가만히 따져보면 인생사 대부분의 절망과 고난은 사랑과 책임에 기인한다. 신이 사랑이라면 그 길 위에 놓인 인간의 실존은 믿든 안 믿든 결국 신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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