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261202
그리 아름답지 않은 내 방이 생겼다. 책상과 책장, 싱글침대 외에 아무런 장식도 없는 그 공간 안에서 나는 잠을 자고 재택근무도 하고 책도 읽고 글도 쓴다.
이사를 오기 전엔 식구 수 대비 방의 개수가 모자라 수년간 거실에 토퍼를 깔고 잤었다. 회사 일은 식탁에서 했고 글은 때때마다 자그마한 상을 펴놓고 썼다. 물론 남편과 한방을 쓰면 굳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내 방 타령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서로의 숙면을 위해 내가 방을 나가기로 했다. 남편은 잠을 잘 자야 기분이 좋은 사람이고, 나는 불면증으로 하룻밤에도 수십 번 일어났다 누웠다를 반복하는 사람이다. 남들처럼 어떻게든 한방을 써보려 했지만 어느 순간 남들처럼 살 수 없는 임계점을 넘어버렸던 것이다. 그 후로 다시는 한 침대는 물론 한 방에 잠을 자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남편의 영역이 확실해진 계기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퇴근한 남편은 방에 들어가 자기만의 시간을 가진 후에 저녁밥을 먹으러 나온다. 어느 날 자신을 위한 선물이라며 45인치 TV를 주문했다. 그 후로 그는 안방에서 전자담배를 피우며 휴대폰 게임을 하고 TV를 보는 시간을 만끽했다. 따로 자기 시작한 후로 나 역시 나만의 밤습관을 맘껏 누리며 산다. 아무 때고 잠이 들었다 깨고, 일어나 하고 싶은 일 - 스탠드를 켜고 책을 읽거나, 휴대폰을 들고 릴스를 한없이 넘긴다거나, 갑자기 샤워를 한다던가 설거지를 하는 일들 - 을 조심스레 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밤사이 방 밖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한다. 서로를 배려하지 않아도 전혀 불편하지 않아서 참 좋다.
다시 아름답지 않은 내 방으로 가보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방을 가져보았다. 그것이 희망사항일 때 그 방에는 포터리반 풍의 아기자기한 꽃무늬 커튼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과 바람결이 살랑거리는 창가 아래 책상이 놓여있었다. 나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날씨와 계절을 음미하다 문득 생각난 듯 글을 쓰고, 이내 졸음을 참지 못해 포근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잠이 들곤 했다. 침대 맞은편에는 연한 보랏빛을 머금은 벽지가 도배된 벽을 배경으로 책장이 있는데 하나씩 모은 책들이 장르별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회사일이 이르게 끝나면 침대에 걸터앉아 책장의 책들을 하나씩 훑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지금의 내 방은 초록지붕 집 2층에 있는 빨강머리 앤의 방과 같다.
준공된 지 10년 된 이 집은 전셋집이다. 일 년 전까지 살았던 집, 결혼 후 25년 동안 살았던 그 집은 40살이 넘었다. 갑자기 집이 팔리고 망연해진 채 돌아다니다 이 집을 만났다. 언덕 위에 있는 아파트 단지 주변은 온통 숲이었다. 비밀번호를 눌러야 공동현관을 통과할 수 있는 것도 신기했고, 현관이 웬만한 작은 화장실 크기인 것도 놀라웠다. 거실 창밖 풍경은 하늘 반, 나무 반이었다. 물도 시원하게 잘 나오고 분리수거도 매일매일 할 수 있다. 방도 식구 수대로 있어서 나는 이 집이 나를 찾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감탄과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40살이 넘은 집과 헤어질 때 아팠던 마음은 이제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공간디자인 전공을 살려 숨겨놓았던 취향을 뽐내며 집을 꾸며보리라 야심 찬 계획을 하나씩 실행하려던 차 아이가 많이 아팠다.
24시간 치매노인을 돌보듯 우울증을 앓고 있는 아이를 지켜보며 회사 일을 했다. 일은 아이가 약을 먹고 잠든 밤시간이나 남편이 쉬는 주말에 했다. 어쩌면 제정신이 아닌 채로 거의 8~9개월을 살았던 것 같다. 7월 말, 회사 대표가 눈을 찌푸리며 일을 더 해달라고 요청했다. 알았다고 대답하고 대표실을 나오는데 깨달았다. 더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걸. 한 달을 공들여 당황한 대표를 설득해 9월 말 퇴사했다. 그 후 하루 4시간 일하고도 회사 다닐 적 받았던 월급의 2배를 받는 프리랜서가 되었다. 혹 몇 달 일을 못하게 될 때를 대비하여 실업급여 신청 서류들을 다 챙겨놓았다. 아이도 조금씩 나아져 간다. 남편도 아이 걱정 없이 회사 일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고, 군대 간 큰 아이도 서울로 발령 나서 한 달에 한 번은 꼭 얼굴을 볼 수 있다. 그래 이 정도면 살만하지 않은가!
이제야 내 방이 눈에 들어왔다. 빨강머리 앤이 처음 마주한 그 방에서 느꼈을 '삭막한' 방이다. 할머니 방에나 있을법한 반들반들한 벽지, 전 세입자가 아주 길고 무거운 액자들을 달아놓았던 모양인지 흉하게 여기저기 뚫려 있는 열댓 개의 큰 못자국, 게다가 창의 위치도 높아서 책상 너머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볼 수 없다. 그런데 뭐 그게 대수인가! 남서향의 방은 하루 종일 햇빛이 들어온다. 밤에는 노란빛의 스탠드를 켜놓고 은은한 뉴에이지 음악이 흘러나오도록 했다. 이 방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나의 체취와 온기가 방에 채워지니 고양이들도 하나 둘 들어와 침대 위, 책상 아래, 책장 위에 자리를 잡고 잠에 든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남편은 내 방에 들어온다. 아주 세게 한번 안아주고 자기 방으로 사라진다. 아이도 종종 잠들기 어려운 날 베개를 들고 찾아온다. 비좁은 침대에 당당히 누워 내 손을 잡고 이내 잠이 든 아이를 바라볼 때면 내 방이 이토록 사랑받고 있구나 싶다. 본의 아니게 그리 아름답지 않은 내 방을 이야기하려다 일 년의 시간이 영화처럼 지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