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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롱지다 May 06. 2022

그 공원, 빨간벽돌 원형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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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게임 유치에 막 성공한 대한민국은 잠실 한복판에 스타디움과 선수들이 머무를 아파트를 짓느라 모래산을 쌓고 있었다. 대구 사투리가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던 어린 날, 우리 집은 그 공사현장이 한눈에 내다 보이는 맞은편 아파트 단지로 이사를 왔다. 거실 창을 통해 보이는 거대한 모래산과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 뭉게구름, 그 사이로 허허벌판이 펼쳐진 이곳은 상상하던 서울의 대도시 풍경은 분명 아니었다. 그래도 마음 내킬 때마다 다채로운 빛깔로 흩뿌려진 하늘의 색과 무수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구름의 모양과 질감을 나는 원 없이 누릴 수 있었다.


공사는 2~3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새로운 아파트 단지에는 초등학교, 중학교, 공원이 생겼다. 올림픽대로변에 접하며 단지의 시작점에 위치한 '아시아공원'은 이 동네에 처음으로 생긴 주민편의시설이다. 지하철역에서 올라오면 은행나무가 줄지어 서있는 공원 입구가 보인다. 그 길을 따라 푸릇한 잔디밭을 너머 둘레길 안쪽에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은 빨간색 벽돌로 지어진 자그마한 원형극장이 있다.

고대 그리스 원형극장의 미니어처 같은 그곳은 소규모 공연이나 행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기획된 듯 보였다. 그러나 음향 관리, 대기실, 출입통제 등 공연을 위한 부수적인 기능들의 애매함 덕분인지 일 년에 한두 번 열리는 초등학교 음악회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날들은 다른 용도로 쓰인다.

둘레길을 따라 운동하는 노부부가 쉬어가고, 산책을 즐기던 연인들이 남몰래 키스를 한다. 저녁노을이 지면 청량하고 구슬픈 오카리나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초여름 어느 날은 근처 초중고 학생들의 졸업사진 장소로, 야구 시즌이 시작되면 젊음과 술과 왁자지껄로 그곳의 밤은 활기에 넘친다. 그리고 하늘색이 깊어진 가을이 오면 빨간색 벽돌과 조화를 이룬 산재된 낙엽들이 연인의 사랑이 끝났음을 알리는 장치로서 드라마 속 배경이 된다.

 

지란지교로 세상이 꽃만 같던 시절, 시험이 끝나는 날에는 원형극장 계단참에 앉아 친구와 초코 다이제스티브를 나눠 먹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친구와 학교를 세우는 게 꿈인 나는 아무도 없는 무대를 도화지 삼아 훗날 우리의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소복이 눈 내리는 어느 해 겨울 자락에는 처음으로 사귄 이와 나란히 앉아 여기서 야외 결혼식을 꿈꾸고 있다고 마음을 내비친 적도 있었다.


엄마가 된 후에는 보다 실질적인 의미로 원형극장은 나의 일상에 자리 잡았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하던 길에, 어느새 자박자박 걷는 아이의 손을 잡고 병원 가는 길에 한숨 쉬어 갔다. 점점 불어나는 살들로 우울한 날에는 둘레길을 뛰다가 걷다가 끝내는 빨간 계단에 숨어 감정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주말이 되면 아이의 친구 가족들과 자전거를 타거나 야구를 하고 피자와 치킨을 나누어 먹었다.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순간들이 겹겹이 쌓였지만 아이의 성장과 함께 그곳으로의 발길은 어느새 뜸해져 갔다.     



*

2017년 어느 겨울밤, 학원 간 줄만 알았던 아이의 방에 덩그러니 바닥에 놓인 종이 한 장이 보였다.

연필로 또박또박 눌러쓴 단어들 사이에서 '찾지 말아 줘'라는 문장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하루 이틀 삼일이 지나 사일째 되던 날, 돌아온 아이는 여전히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온몸은 차가웠고 두발은 동상으로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아직 어른의 모양새를 갖추지 못한 아이에게서 담배냄새가 희미한 아기 냄새와 함께 났다. 더 이상 말로도 행동으로도 제재가 불가능한 아이에게 남편과 나는 따뜻한 물을 대야에 담아 말없이 아이의 발을 씻기고 찬기가 가실 때까지 주물렀다.


잘하는 것도 없고 잘하고 싶은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시시하다고 말하던 아이는 학교를 그만두고 싶어 했다. 매일 아침 10분 거리의 등굣길을 차로 바래다주며 하루하루 버텨내는 아이를 다독였다. 열 달이 막 지날 때쯤 아이는 이제 태워주지 않아도 학교 가는 게 싫지 않다며 불쑥 연기학원을 다니고 싶다고 했다. 늘 화만 내던 아이는 이제 유명 희곡의 대사에 이입하여 다양한 감정들을 배우고 쏟아낸다.


울타리를 벗어난 아이는 학원에서 다양한 사연을 가진 친구들을 만나며 세상을 조금씩 알아간다.

부모의 이혼으로 혼자 살고 있는 친구, 하고 싶은 일을 허락해주지 않는 부모에게서 쫓겨난 친구,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겪은 친구, 매일 왕복 다섯 시간을 기차를 타고 등원하는 친구 등 그들이 털어놓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아이는 태연한 척하느라 힘들었다고 했다. 

정작 눈물을 흘리며 연민했던 쪽은 아이의 이야기를 들은 어린 친구들이었다. 아이는 중학교 내내 방 밖을 나오지 않았다. 예민한 몸은 마음을 무력하게 하고 그 마음은 먹는 것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앙상한 몸을 지탱하며 걷는 것조차 힘겨운 어느 날 그렇게 집을 나가버렸었다. 아이는 이상하다고 했다. 나는 안다.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람은 마음이 아픈 사람이란 걸.  


6개월째 늦은 밤 슬며시 옷을 챙겨 입은 아이는 집 밖을 나선다.

부모 마음에 깜깜한 밤은 늘 위험하다. 아이가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지만 함께 따라나서는 일은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일이므로 아이가 돌아올 때까지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엄마! 걱정하지 마... 공원 안에 있는 원형극장이 대사 연습하기에 좋더라고! "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나는 그 작은 무대에 서서 나오지 않은 고음을 내지르는 아이를 상상했다. 아이는 그저 계단참에 앉아 조용히 노래 연습을 하고 대사를 외운다고 한다. 아무도 없는 무대라도 그 무대에 서서 보이지 않는 관객을 향해 연기하는 일은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닌가 보다.


좋든 나쁘든 본인이 경험해야만 움직이는 아이가 있다는 걸 다 키우고서야 알았다. 아이도 남과 다른 자신만의 속도를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꿈을 이루는 시간이 고될수록 희망은 커지는 법! 꿈을 갖는 것이 꿈이었던 아이는 요즘 구름 위를 걷는 듯 입시 준비로 고단한 하루를 만끽한다. 그리고 살아있음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19년 인생 중 가장 빛나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가 내 눈앞에서 웃고 있다.


*

하하!

보통 이렇게 뭉클한 성장기를 던져놓으면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되는 이야기로 끝나야 할 테지만,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예민한 몸과 한 번씩 찾아오는 무력한 마음을 덤덤하게 지켜보며 모눈종이 눈금만큼 미세하게 성장하는 아이의 마음 키를 인내하는 삶은 또다시 나의 몫이 되었다.

그럼에도 나의 바람, 꿈, 기다림이 머물렀던 곳에서 나의 아이가 꿈을 키우는 공간이 된 그 공원 빨간벽돌 원형극장! 그곳은 축소된 본연의 기능으로 아쉬워할 이유가 없음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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