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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롱지다 May 05. 2022

아기 고양이가 노란색 커튼 자락  아래서 잠이 들었다

지난밤 아기 고양이가 노란색 커튼 자락 아래서 얼굴을 파묻고 잠이 들었다.


거실 창 너머 부드러운 햇살이 어둠을 가리기 시작하면 잠이 깬다. 소파 밑에 깔아놓은 매트리스 위에서 찌뿌둥한 통증을 물리치려 기지개를 켠 순간, 소파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아기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고양이는 나른한 움직임으로 두 팔을 쭉 뻗고 스트레칭을 했다. 제 얼굴보다 더 크게 입을 벌리며 하품을 하는 모습에 나는 섬찟 무서움을 느낀다. 하품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흔들니 원래의 귀여운 얼굴로 돌아왔다. 소파에서 깡총 뛰어내려 이제는 내 빰에 보드라운 털을 비빈다. 마지막으로 까끌한 혓바닥으로 내 코와 볼을 꼼꼼히 핥고 나서야 자신만의 기상 의식을 마친다.


작은 아이가 아프지 않았다면 아기 고양이는 내 인생에, 우리 가족의 일상에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

" 엄마! 나 숨을 못 쉬겠어...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 너 학원 갔잖아. 지금 학원 앞이니?"

" 엄마! 길 건너편에 예지가 있는데 나도 모르게 숨어버렸어. 그리고 계속 눈물만 나와.

  가슴이 너무 빨리 뛰어서 움직일 수가 없어!"


한여름 토요일 밤 10시쯤 걸려온 아이의 다급한 전화에 나는 큰 동요 없이 학원 근처로 차를 몰았다. 길 가 아무 곳에 차를 대고 학원가 골목길을 돌아다니다 아이를 발견했다. 책가방을 끌어안고 쪼그리고 앉아 두 무릎 사이로 머리를 파묻고 있는 아이는 가녀린 어깨를 가쁘게 들썩거리며 숨을 쉬어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내 몸보다 더 큰 아이를 앞에서 감싸 안고 나 역시 쪼그리고 앉아 말없이 기다렸다. 실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이의 전화에 동요가 없었던 것도 아이를 그렇게 안고 있어도, 그 상황이 단지 일시적인 그리고 아무 일 아닌 것처럼 지나가는 일인 줄로만 알았다.


아이의 증상은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아이와 우리 가족을 덮쳤다. 예고 없이 심장이 초고속으로 달리는 바람에 아이는 길을 걷다가도 머리를 감다가도 자리에 주저앉아 그 시간이 지나가기를 울면서 기다렸다. 매일 아침 부지런히 학교 갈 준비를 마치고 현관문을 나설 때면 온몸이 바스러지듯 아이는 쓰러져버린다. 아이를 소파에 옮기고 담임선생님께 등교를 못 하겠다는 메시지를 남기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어느 날부터는 코로나로 재택근무가 일상이 된 아빠와 한 집에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출근하는 날에는 아이는 방 밖으로 단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아이는 아빠한테 너무 미안한데 아빠가 너무 불편하다고 또 울었다.


" 엄마... 자꾸 생각이 스쳐가. 나는 쓸모없는 쓰레기라고. 정말 그래? "

" 생각이 이젠 말소리로 들려! 내가 뭔가를 하려고만 하면 자꾸 뭐라 해. 어차피 안 될 일을 왜 하냐고. 그냥 죽으라고! "


혼자 있을 때 그 생각 혹은 말소리가 유독 심해진다는 이야기를 듣던 날, 나는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이젠 24시간 아이와 한 몸이 되어 겁에 질려있는 아이의 상태를 지켜보았다. 아이는 학교, 학원, 친구, 카톡, 인스타 등 사회와 연결된 모든 통로를 끊어버렸다. 집 밖을 나서는 일은 꿈에서나마 가능한 일이었고, 그 나이 또래가 생각 없이 해나가는 사소한 모든 일상이 사라져 버렸다. 심리상담센터에서는 학교 부적응으로 인한 우울증이라 하고 정신과에서는 불안장애라 하고 한의원에서는 간에 독소가 쌓여 몸과 마음의 균형이 깨졌다고 했다. 사주 보는 이는 아이의 인생에서 가장 안 좋은 시기가 온 것이니 가만히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누구의 말이 맞는 건지...

 

*

큰 아이가 혼자만의 동굴에서 나온 지 3년 만에 작은 아이가 같은 이유 다른 증상으로 자신만의 늪에 빠진 것이다. 다행인 것은 큰 아이 때 경험으로 남편과 나는 작은 아이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이의 마음속 이야기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남편은 자발적 거리두기에 들어갔다. 그러다가도 아이가 뭔가를 필요로 할 때를 눈치껏 알아채서 남몰래 해결해 놓았다. 큰 아이는 늦은 밤 귀갓길에 동생이 좋아하는 마이쥬와 자몽허니블랙티를 사와 아무렇지도 않게 동생 방에 밀어 넣었다. 나는 다른 가족이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아이가 심연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가만히 듣고 달래다 싸우고 조언을 남발했다.  


그렇게 여름이 사라지려 할 때 큰 아이가 결심을 내렸다. 고양이를 데려와도 좋아!

우리 가족은 작은 아이만 빼고 어느 누구도 동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종이 다른 동물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이 있었던 것이다. 작은 아이는 어릴 때부터 개나 고양이를 키워야만 하는 이유를 ppt로 만들고 학년이 바뀔 때마다 업데이트해서 가족을 설득했다. 그러나 나는 키우는 비용을 앞세워, 남편과 큰 아이는 무서움을 앞세워 반려했었다. 이제는 아무도 반대할 수 없는 이유가 생겨버렸다.


오빠 덕분에 가질 수 있는 고양이라 작은 아이는 오빠가 좋아하는 축구팀의 이름을 따서 '첼시'라는 이름을 미리 지어놓았다. 첼시라는 이름에 걸맞은 고양이를 찾으러 여러 분양소를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구경만 하자고 간 첫 번째 분양소에서 우리는 단번에 첼시를 만났다. 분양소 한쪽 벽에 칸칸이 설치된 유리 창 너머의 고양이들을 찬찬히 살피던 중 세 번째 칸에서 유독 날뛰며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스스로를 어필하던 아기 고양이를 보았다. 케이지 밖으로 꺼내자 고양이는 작은 아이의 옷자락을 꽉 움켜쥔 채 품 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 그대로 우리는 분양소에서 챙겨준 사료 한 봉지, 화장실 박스만 들고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집으로 돌아왔다.


손바닥만 한 두 달 된 아기 고양이가 불러온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집안에 들어선 순간 미처 청소하지 못한 침대 밑과 책장, 옷장 틈새로 첼시가 이리저리 숨어버리는 바람에 작은 아이는 밤새 첼시를 찾느라 회색 먼지뭉치와 싸워야 했다. 나는 비염 증세가 도져 재채기, 눈물, 콧물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새벽녘 겨우 잠이 든 첼시를 내려다보며 작은 아이와 나는 똑같은 말을 했다.


" 어떡하지? "


충동의 결과를 책임지는 시간은 앞으로 최소 15년이다. 두 아이 모두 성인이 되는 날, 남편과 나는 긴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했었다. 캠핑용 의자 두 개,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침낭 두 개를 싣고 차가 다닐 수 있는 어느 곳이든 정처 없이 떠돌아다녀보자는 것이 우리의 노후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날이 3년 후로 다가왔다. 계획은 언제나 비껴간다. 도대체 누가 인생을 계획하며 살라고 했던가? 심지어 그 누가는 계획성 있는 인생이 꿈꾸던 삶으로 이끈다고도 했다. 그는 진심 삶을 살아보기나 하고 한 말이었을까?


*

분양소에서 분양계약서를 쓰면서 주의를 준 사항이 있었다. 분양받은 고양이가 혹시 설사를 하면 꼭 병원에 데려가라고 했다. 첼시는 꼭 하루하고 반나절을 신나게 집안 곳곳을 탐험하고 사람새끼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수만 가지 애교로 순식간에 가족을 집사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이틀을 힘없이 잠만 자고 설사를 했다. 병원에 데려가니 치사율이 90% 이상인 범백 바이러스(사람으로 치면 백혈병 같은)에 감염되었다고 했다. 분양소와 연계된 병원임에도 전염성이 높다는 이유로 입원 치료를 거부당했다. 겨우 연결된 다른 병원으로 가자마자 첼시는 백색 형광등이 차갑다 못해 서늘한, 병원 안쪽 공간에 설치된 철제 케이지에 철컥 갇혀버렸고 우리는 첼시와 이별의 인사도 나눌 겨를도 없이 헤어졌다.

시간은 더디게 정말 더디게 흘러갔다. 마침내 첼시가 범백을 이겨내고 슈퍼 첼시로 거듭났다는 소식에 병원으로 내달렸다. 나는 작은 아이에게 고맙다고 했다. 너의 아픔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하찮고 소중한 생명 하나를 구했다고.

분양계약서에는 2주 안에 고양이가 아프거나 죽으면 병원비 일체를 지원하거나 다른 고양이로 바꿔준다고 쓰여있다. 치사율과 전염성이 높은 범백 바이러스에 걸린 고양이는 대부분 병원비가 분양비보다 높다. 그래서 분양소나 병원에서는 고양이를 포기할 가능성이 높았고,  첼시의 경우 그날 그렇게 우리 품 안에 파고들지 않았다면 치료는커녕 폐사될 확률이 아주 높은 고양이였다. 병원과 분양소에서 첼시를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는 병원 간호사가 그만 오라는 만류에도 일주일 동안 매일 병원 앞을 지키고 분양소에 연락을 했었다.  


작은 아이는 첼시를 안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 엄마... 이렇게 잉여로운 생활이 언제까지 갈까? "

약기운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가 말을 걸었다.


" 왜 별로야? "

" 아니. 좋긴 한데... 나도 남들처럼 뭔가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해. "

" 너는 참 운이 좋아! 살면서 스스로 잉여로운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는 건 쉽지 않아. 근데 너는  어쩔 수 없이 지금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그냥 즐겨보자! "

" 엄마... 근데 나는 내가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우리가 첼시를 지켜냈던 그날 이후로 내가 세상에 있어도 되는 사람인 것 같아 기분이 좀 나아졌어! 이게 말이지 내가 사람이든 동물이든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 "


겨울이 시작되고 새해가 밝았다.

작은 아이는 학교를 가지 않는다.

간다면 등교만 할 것이다. 공부를 제외한 모든 활동은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좋아하는 스케이트장을 혼자서도 갈 수 있을 만큼 집 밖을 나설 수도 있다. 불안장애로 복용하는 약도 서서히 줄이고 예고 없이 등장하는 불안감에 서투르지만 대처할 수 있는 힘도 생겨났다.


*

사랑은 또 다른 사랑으로 극복하듯 꺾어진 희망도 또 다른 희망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것일까? 첼시가 집에 온 이후로 각자의 아픔을 갖고 있는 가족은 예전보다 더 깊은 연대감을 느끼고 더 많이 웃고, 충분히 혹은 그 이상을 위로받고 있는 중이다. 고양이 특유의 까칠함과 츤데레 성향은 온종일 집사들의 애를 태우고, 예상치 못한 순간 무릎냥이 되어 극세사보다도 더 부드러운 털을 만져달라고 유혹하면 세상 걱정이 녹아내린다. 첼시를 가슴에 안고 가만히 눈을 감으면 금방이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만 같은 솜사탕 같은 희망이 몽글몽글 피어난다. 작은 아이는 첼시를 들여다보며 내면의 어려움을 잊어버리고, 나는 조금씩 나아지는 아이를 들여다보며 내 노후의 모습을 잊어버린다. 세상 누구보다도 여린 딸바라기 남편은 첼시의 재정적 지원과 일상 케어를 전담함으로써 마침내 작은 아이의 마음을 열었다. 틈만 나면 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우마동(고양이 가정 분양 네이버 카페)을 들여다보며 첼시의 동생들을 물색 중이다. 대학입시 준비와 아르바이트로 치열한 하루를 보내고 온 큰 아이는 첼시의 치즈 빛깔 부드러운 털에 얼굴을 비비며 소원을 말한다. '첼시야! 형 대학 좀 보내줘'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이란 유명 희극인의 말이 있다. 아니다 때로는 멀리서 보면 아픔인 삶도 가까이서 보면 시트콤인 경우도 있다. 여전히 끝은 손 닿을 듯 멀어진다. 그렇다고 뭐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 아이를 키우지 않았다면 이해할 수 없는 세계와 고양이를 키우지 않았다면 영원히 몰랐을 세계 속에서 나는 말할 수 없는 행복과 슬픔, 충만한 감동과 고단함을 매 순간 마주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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