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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롱지다 May 20. 2024

육아초보 집사를 지켜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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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 영상을 본 날 마음에 씨가 뿌려졌던 것 같다. 작은 아이가 유튜브를 보다 나를 불렀다. 새하얀 순무의 납작한 귀가 청소기 소리를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영상이었다. 처음으로 고양이란 동물이 귀엽다는 걸 알았다. 그 후로 종종 작은 아이는 무지막지네 영상을 보여주러 뛰어왔고, 크집사 영상도 심심찮게 보여줬다. 그러다 권 과장의 카톡 프사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시간이 멈춰버렸다. 그렇게 우아한 생김새는 사람은 물론 모든 동물을 통틀어 본 적이 없었다. 종을 물어보니 랙돌이란다. 마음에 고양이 싹이 자랐다.


우리 가족의 운명이 첼시를 불렀는지 아님 그 반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첼시는 두툼한 크라프트지로 만든 종이박스에 담겨 우리 집에 왔다. 2021년 8월의 어느 목요일 밤 저녁식사가 끝난 후 불과 2시간여 만에 충동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크림과 치즈 빛이 섞인 첼시는 랙돌이 아닌 브리티쉬 롱헤어다. 분양소에서 내 눈을 사로잡았던 랙돌은 남편이 허가한 금액의 3배 이상이라 금방 마음을 접었다. 작은 아이는 분양소에 들어서자마자 세 번째 유리 케이지 안에서 날뛰던 첼시에게 눈을 떼지 못했고, 작은 아이의 품에 잠시 안긴 첼시는 집에 오는 순간까지 그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이런 게 묘연이라 했던가? 첼시는 자신에게 생명의 시간이 별로 남지 않음을 알았던 것처럼 갖은 애교로 단번에 온 가족을 집사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범백이 낫자마자 고양이 특유의 도도함과 까칠함은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었던지 본색을 드러냈다.


루시는 첼시가 오고 나서 석 달 후인 11월 어느 토요일 전주에서 ktx를 타고 왔다. 시도 때도 없이 깨무는 첼시의 놀이 공격성이 어떠한 방법으로도 나아지지 않아 결정한 선택이었다. 사실 남편은 첼시를 정말 무서워했다. 남편은 갑옷을 두르듯 하루 종일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양말과 슬리퍼를 신었다. 또 고양이를 데려와야 한다는 나와 작은아이의 결정에 남편은 마지못해 우마동(고양이, 강아지 가정 분양 카페)을 검색했다. 남편의 눈길을 사로잡은 루시는 첼시와 같은 종이지만 회색과 푸른빛이 섞인, 첼시보다 훨씬 긴 털을 가졌다. 남편은 난생처음 부모님 허락 없이 스스로 선택한 아기 고양이 루시를 세상 누구보다 애지중지했다.


이제 그 어렵다는 합사가 남았다. 유튜브에서는 이제껏 보지 못한 고양이의 실체를 볼 수 있을 거라며 단단히 마음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고양이의 합사는 일종의 영역다툼과 서열다툼이다. 합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한 집에서 영원히 두 고양이가 만나지 않게 두 집 살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하악질과 냥펀치가 난무하는 합사 과정은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동물의 왕국을 실시간 직관하는 것과 같았다. 첼시와 루시의 싸움은 생일이 늦어 몸집이 상대적으로 작은 루시가 일방적으로 졌다. 남편은 안방에 숨어 남몰래 마음 아파했다. 어떤 때는 루시만 데리고 안방에서 살아야겠다고 호기를 부리기도 했지만 호기심 많은 루시는 자꾸만 탈출해 첼시를 따라다녔다. 결국 합사가 진행되는 동안 남편은 '난 정말 못 보겠어!' 하며 단 한 발짝도 안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3주 후 첼시와 루시의 서열이 정리되자 서로 그루밍을 해주며 잠을 자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첼시의 놀이 공격성도 서서히 사라졌다. 마침내 우리는 아니 나와 작은아이는 그 어렵다는 합사를 해낸 것이다.


*

남편은 사람 아이를 키울 때도 그랬다. 어쩌다 아이들을 맡기고 외출이라도 하면 그새 애들을 데리고 30분 거리의 시댁으로 쪼르르 가버렸다. 아이들에게 크고 작은 상처가 났을 때도 남편은 그 상처를 보는 게 무섭다며 눈을 가리고 반창고만 붙여 놓은 채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 날이 추워지면 해마다 크는 아이들에겐 두꺼운 겉옷이 필요한데 디자인이 안 이쁘다고 사주지 않았다. 돈은 정말 맘에 드는 물건이 있을 때만, 그리고 꼭 그만한 가치가 있을 때만 써야 한다고 했다.


이런 남편도 누구보다 잘하는 일이 있다. 아이들을 다치지 않게 지켜보는 일! 나보다 훨씬 더 아이들을 세심하게 살피고 공감해 주었다. 자칭 트민남인 그는 아이들에게 유행에 앞서가는 힙한 옷을 입혀 동네엄마들과 애들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유리 멘털의 소유자라 자신으로 인해 아이들이 잘못될까 육아의 모든 결정권을 나에게 돌렸다. 서로 다른 교육관으로 다툴 일은 없었지만 나 역시 이번 생은 엄마가 처음이라 아이들을 먹이고 때때마다 뒤처지지 않게 공부시키며 마음까지 헤아리는 일이 항상 쉽지만은 않았다. 그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어린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함께 놀다 밥을 하는 일이었다. 정적인 활동에 최적화된 몸은 아이들과 몸으로 놀거나 아이의 대사에 맞장구를 치는 역할놀이는 낯간지러워 정말이지 하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니 아이들과 노는 게 진심으로 즐거운 사람들은 밥 짓는 일도 놀이로 여긴다는 걸 알았다.


그 시기에 30대였던 남편은 정말 바빴다. 주중은 물론 주말에도 넘쳐나는 회사일로 바빴고 일뿐만 아니라 사회관계를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시대적 분위기에 간혹 쉬는 날이 오면 정말 방전되어 버렸다. 그런 남편에게 아이들과 시간을 갖고 놀아달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결국 남편과 나는 아이들이 원하는 만큼 잘 놀아주는 부모가 되지 못한 채 어느새 사춘기 아이들과 마주했다. 아이들의 사춘기는 다른 어느 집보다 혹독하게 찾아왔다. 불행 중 다행인지 이름있는 심리센터에서 진행한 다양한 검사에서 우리의 양육 태도가 아이의 현 상황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는 걸로 나왔다. 알게 모르게 가졌던 죄책감이 조금은 덜어졌다.


부모가 양육의 과정과 목적에 확신이 있어야 아이들은 헷갈리지 않는다. 또래와 다른 속도로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결심했다. 어린 날 이미 사람에 대한 예의, 사회적 규칙에 대한 이해도는 충분히 교육된 아이들이라 나는 아이들과 남편에게 선언했다. 우리 집은 허락이 필요 없다. 언제든 하고 싶은 일, 하면 행복해지는 일이 있다면 스스로 결정해서 알려만 달라고 했다. 이 선언에 가장 좋아한 사람은 남편이었다. 그는 퇴근 후 대여섯 시간을 핸드폰 게임으로 보냈다. 그렇게 하고도 당당할 수 있으니 세상만사에 너그러움이 넘쳐흘렀다. (나 역시 매일은 아니지만 글을 쓰기 시작하면 4~5시간은 꼼짝하지 않는다. 이 시간만 보장되면 삶이 아름답다.)


**

작년 여름 작은 아이가 아프면서 첼시와 루시가 집에 왔다. 뭔지 모를 두려움에 세상과 스스로를 단절한 작은아이가 아빠도 불편하다며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딸바라기 남편은 자발적 거리두기를 하며 남몰래 울음을 삼켰다. 아이가 유일하게 소통하는 사람은 나였다. 남편은 자기 대신 작은 아이를 잘 챙겨달라며 첼루시의 육아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고양이는 놀랍게도 시계를 볼 줄 안다. 루틴이 정해지면 신기하게도 그 시간을 기억해 남편을 찾는다. 남편의 핸드폰 기상 알람이 울리기 2분 전, 첼시와 루시는 남편 베개 양 옆에 누워 골골거리며 잠을 깨운다. 간식을 달라는 거다. 남편이 일어나 양치를 시작하면 화장실 앞에 나란히 앉아 기다린다. 간식을 달라는 거다. 남편이 옷을 입고 식탁에 놓인 사과 한쪽을 집어 들면 둘 다 식탁에 올라와 사과 접시와 남편의 입을 번갈아보며 기다린다. 간식을 달라는 거다... 이러한 루틴은 주말의 이른 아침에도 어김없다.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온 남편을 보자 맘이 약해졌다. 어머니 집에서 잠 좀 자고 오라고 하면 어느새 문 밖에 나가 있다. 그렇다. 남편을 믿은 내가 바보다!


나와 작은 아이는 '간식은 그만! 제발 놀아줘!'라고 소리친다. 윤샘과 미야옹철님, 냥신님(유튜브 고양이 수의사 선생님들)은 입을 모아 고양이의 모든 문제행동은 사냥놀이로 해결된다고 했다. 그런데 첼루시가 원하는 만큼 사냥놀이를 해주는 일은 쉽지 않다. 고양이는 쉽게 장난감에 질려해 때때마다 새로운 장난감을 사주거나 고도의 밀당 작전으로 흥미를 자극해야 마지못해 움직인다. 고양이한테 놀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면서도 모른 척 간식으로만 때우려 하니 똑똑한 첼루시는 남편만 하루 종일 따라다니며 나날이 통통해지고 있다. 게다가 고양이는 자신을 만지지 않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일 년이 지난 지금도 남편은 첼시를 편히 만지지 못한다. 단 한 번도 물린 적 없는데도 물릴까 무섭다고 한다. 남편이 한발 물러날수록 냥이들은 남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골골 송을 부르고 몸과 얼굴을 비빈다. 나와 작은 아이는 그 행복을 남편 혼자 독차지한다고 샘을 내지만 남편은 울상이다.


대개 육아 초보는 롤모델이 있는데 남편의 경우 시어머니와 내가 그런 존재다. 허약한 남편을 키우느라 밥과 간식에 진심인 어머니의 육아방식을 따라 늘 간식과 사료를 장전하고, 자기 맘대로 살아도 된다고 선언한 나의 방식에 감동한 그는 첼루시에게 똑같이 적용하고 있다. 그러니 첼루시는 더더욱 남편바라기가 되었고 그는 나날이 독박 육아에 지쳐가고 있다. 실은 독박 육아라 하지만 남편이 하는 일은 첼루시의 화장실을 정리하고 사료와 간식을 주는 일뿐이다. 그 외 고양이가 싫어하는 모든 일-빗질하기, 양치하기, 똥꼬 씻기기, 청소기 돌이기 등-은 나와 작은 아이가 다한다.


***

돈을 쓰는 일에 인색한 남편은 냥이들을 위해 기꺼이 캣타워를 사고 최고급 사료와 간식과 장난감에 매달 적지 않은 지출을 한다. 또 길고 풍성한 털 때문에 더위에 약하다는 정보를 듣고는 20년 만에 에어컨도 바꿨다. 사랑한 만큼 신경 쓰이고 신경 쓰이는 만큼 세심해지는 남편은 이제 조금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그 사이에 작은 아이도 많이 나아졌다. 모처럼 오늘 남편은 지난 몇 달간 엄두도 못 내던 핸드폰 게임 속으로 빠져 들고, 첼루시는 그 앞에 앉아 간식을 기다리다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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